제731화
“어마마마!”
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난번 엽연채의 생일에 아바마마가 선물을 하사하신 걸 생각해 보세요. 주운환의 생일에는 무엇을 하사하실지 모릅니다. 야금야금 주운환의 마음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저는 다시 아바마마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처지가 될 것입니다.”
정 황후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한데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정 황후와 태자가 놀라 벌떡 일어섰다.
“하하하, 태자가 와 있었구나.”
정선제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요즘 조정의 일이 바빠 너희 모자와 함께 식사를 한 지도 오래되었어. 짐이 너무 늦었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딱 맞춰 오셨습니다.”
정 황후도 웃으며 맞이하면서 사 마마에게 분부했다.
“식사를 준비해라.”
“네.”
사 마마가 나가고 태자는 환한 얼굴의 정선제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들이 식탁에 앉자 궁녀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고, 탁자는 이내 정선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 찼다.
정 황후는 정선제에게 탕을 떠서 건넸다.
“폐하, 삼선목서산양탕三鲜木樨山羊汤입니다. 많이 드십시오.”
“그래.”
한 그릇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정선제는 새하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맛이 좋군! 한 그릇 더 주게나!”
정 황후는 웃으며 다시 한 그릇을 떠서 건넸다. 수녀 간택은 고목나무처럼 말라붙은 정선제의 마음에 봄비를 내려 줬다. 그는 벌써 수십 년은 젊어진 듯 입맛이 돌아, 앉은자리에서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다.
정 황후와 태자는 정선제의 먹성을 보자 저게 어떻게 3년 뒤면 죽을 사람인가 싶었다. 오히려 회춘하고 있대도 믿을 성싶었다.
정 황후는 더욱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황후, 어찌 먹지는 않고 짐만 보고 있소?”
정선제의 말에 정 황후는 움찔하더니 곧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가 잘 잡수시는 것을 보니 정말 기쁩니다. 수십 년은 젊어지신 것 같아요!”
“그런가?”
정선제는 기분이 더욱 유쾌해져 껄껄 웃었다.
“그런데 신첩은 갑자기 많이 잡수셨다가 소화가 안 되실까 걱정입니다.”
“무슨 소리를, 겨우 두 그릇 가지고. 젊었을 때는 세 그릇도 끄떡없었소! 못 믿겠으면 나 의정에게 물어보시오.”
“네. 폐하께 어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지 신첩이 잘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먹읍시다. 어서 들어요.”
잔뜩 신이 난 정선제는 정 황후와 태자에게 이것저것 음식을 손수 집어 주었다.
“우리 세 식구가 이렇게 둘러앉아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군.”
정 황후의 얼굴은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그 속에 진심은 한 톨도 없었다. 저렇게 먹는데 목에 걸리지도 않고!
그렇게 식사를 마친 그들이 동차간으로 건너가 차를 마시며 쉬는데, 정선제가 정말 나 의정을 불러들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후 마마,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나 의정이 인사하자 정선제는 찻잔을 내려놓고 웃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게. 짐에게 어떤 보양식이 좋을지 황후에게 아뢰고 사 마마는 잘 기억해 두게.”
“네.”
나 의정은 무엇이 어떻게 좋은지 일일이 고해 바쳤다. 듣고 있던 정 황후의 얼굴이 한층 일그러졌다. 나 의정이 말하는 식재료는 하나같이 원기를 강화하고 양기를 보해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쇠약한 사람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인데, 이리 권한다는 것은 곧 정선제의 몸이 상당히 회복되었다는 얘기 아닌가! 정 황후의 마음이 조금씩 또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갔다.
“황후 마마께서 이런 음식들을 준비해 주시면 폐하는 분명 백 살까지 무병장수하실 겁니다! 어쩌면 내년에는 황손까지 얻으실지도 모르지요!”
나 의정에 말에 정선제가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하!”
정 황후도 따라 웃었으나 속은 썩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백 살이라니, 40년이나 더 산다고? 게다가 자식까지? 허!
지금은 태자에게 경쟁자라고 할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황제가 황자를 여럿 낳고 수십 년을 더 산다면, 그동안 어린 황자들은 어른이 될 것이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의정은 듣기 좋은 말을 얼마간 더 하다가 돌아갔다.
차를 다 마신 정선제도 슬슬 어서방으로 가려는데 환관 하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폐하, 상관 통령이 백주泊州에서 양왕을 발견하고 한바탕 교전하였다 합니다.”
정선제는 양왕의 소식이 들리면 어떤 상황이든 간에 제일 먼저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일러두었다. 하여 정선제가 황후와 여유로운 때를 보내고 있음에도 환관이 들어와 보고한 것이다.
정선제와 정 황후, 태자 모두 놀란 가운데 정선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결과는?”
“그… 병사들을 이끌던 진백호가 죽고 양왕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정선제의 표정이 한층 복잡해졌다.
“다쳤다더냐?”
정 황후가 황급히 환관에게 물었다.
“부상은 없는 것 같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절대…….”
정 황후의 이 말에 오히려 정선제가 흰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항은 황명을 거스르는 짓이다. 병사들이 상황을 봐서 알아서 하라고 해라. 그만 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환관이 자리를 떠나자 정 황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폐하… 하지만 그때…….”
양왕이 태자에게 독을 썼다는 이야기는 모두 자신들이 꾸며 낸 것이지 않던가. 그런데 정선제는 도리어 정 황후와 태자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역적 놈이 망상에 사로잡혀 얻지 못할 것을 탐하느라 반역을 시도한 거다. 짐에게 태자는 언제나 건이 너였다! 너야말로 이 땅에서 제일 제대로 된 정통 후계자다.”
그러나 태자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래, 내가 바로 적통 후계자지. 한데 어느 세월에 후계를 이으란 말인가? 다 늙어서 이어받으란 말인가?’
정선제는 정 황후와 태자의 손을 꼭 잡았다. 태자와 정 황후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그의 마음이 봄날 호수처럼 편안해졌다.
“이런 황후와 태자가 있으니 짐이 참 기쁘구나.”
정선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짐은 이만 정사를 처리하러 가 보겠다.”
정선제가 가고 난 뒤, 정 황후가 입을 열었다.
“네 아바마마의 계승자는 언제나, 처음부터 너였다!”
“네.”
태자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정 황후는 살짝 한숨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하지만 너무 오래됐지!”
“맞습니다! 어마마마도 방금 나 의정의 말을 들으셨지요. 제가 어찌 더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어렵게 양왕을 누르고 다른 형제들을 물리쳤습니까. 한데 20년 후에 또다시 어린 형제들과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태자의 눈에 냉소가 어렸고 정 황후의 눈빛에도 독기가 스쳤다.
“주운환과 이야기해 보거라.”
“네.”
기뻐하는 태자를 보고 정 황후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굳혔다. 자신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한번 결정하면 누구도 그 굳은 결심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다. 흘러가는 판세를 보니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더 늦어지면 변수가 생길 것이다.
* * *
진서후부.
엽연채는 낮은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주운환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 뭘 그리고 있습니까?”
주운환이 묻자 엽연채의 붉은 입술에 웃음이 어렸다.
“어제 주묘서가 장명쇄를 그린답시고 저를 태자부로 불렀어요. 자기한테 좋은 옥이 생겼다면서 장명쇄 두 개를 만들어서 각자의 아이에게 하나씩 주자는 거예요.”
주운환은 픽 비웃었다.
“꿈도 야무지군요.”
“그러니까요. 내가 왜 자기랑 나눠 갖겠어요. 그래서 어제는 아무렇게나 그렸는데 하다 보니 우리 아기에게 정말로 하나 만들어 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들으며 주운환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좋은 생각이네요. 아, 오늘 해당화 모양으로 옥을 하나 새겨 와야겠습니다.”
두 부부가 이렇듯 눈으로 정을 주고받고 있는데, 주렴이 열리며 소월이 들어왔다.
“나리, 마님. 태자부에서 첩자가 왔습니다.”
왔구나! 주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가 봐라.”
“네.”
주운환은 첩자를 받아 내려놓았고 엽연채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림 그리는 데 열중하며 툭 내뱉었다.
“밖에서 술 한잔하자는 거죠?”
주운환이 살짝 웃었다.
“맞아요.”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오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였다.
“저녁으로 부군이 좋아하는 야압탕을 준비했는데.”
“지금 먹겠습니다.”
“아직은 다 안 됐어요.”
엽연채의 까만 눈동자가 주운환의 얼굴을 향했다.
“부군, 준비는 다 됐어요?”
“네.”
주운환은 엽연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부인은 부인하고 아기만 신경 쓰십시오. 나머지는 전부 나에게 맡겨요. 곧 끝날 겁니다.”
* * *
도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인 천수하. 이곳은 밤이 되면 일렁이는 물결은 사라지고 화려한 불빛만 너울거렸다.
지금도 곳곳에 초롱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한 놀잇배들이 강에 넘실대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흥을 돋우는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강가에 도착한 주운환이 말에서 내리자 점원 차림의 사내가 바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후야.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운환은 손에 쥔 고삐를 여양에게 건네주고 점원을 따라 천수하에서 가장 화려한 놀잇배로 들어갔다.
배 안이라 공간은 협소해도 구조는 여느 주루와 큰 차이가 없었고, 입구에서부터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주운환은 점원을 따라 복잡한 대당을 지나 내실로 들어갔다. 주렴이 쳐진 방은 굉장히 고급스러웠지만 자리는 좁아 태자는 책상다리를 한 채 낮은 탁상에 앉아 있었다. 촛불이 따뜻하게 그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전하.”
주운환이 다가가 태자 앞에 앉았다.
“일찍 오셨군요, 전하.”
“심란한 일이 많아 먼저 마시고 있었지.”
태자는 주운환에게 술을 한잔 따랐다.
“어쩐지 자네를 불러내지 못하겠더군.”
주운환이 가볍게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소신을 부르지 못하시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얼마 전 갈란의 일로 우리 황실의 위신만 떨어진 게 아니라 자네 주씨 가문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지 않았나. 나도 참 부끄러웠다네.”
“말씀이 과하십니다, 전하. 갈란군주는 갈란군주고 전하는 전하이십니다. 어찌 자책을 하십니까?”
주운환의 안색을 살피던 태자는 갈란군주를 거론하는 순간, 주운환의 눈에 강한 증오가 스치는 걸 보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