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9화
뒤에 서 있던 청유는 그 말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한 소리 해 버렸다.
“어제 그렇게 많은 손님이 측비 마마를 보러 갔는데요? 더구나 주인마님도 자주 측비 마마를 보러 가시는데 왜 굳이 우리 셋째 마님까지 부르죠?”
녹지가 차갑게 청유를 흘겨보나 싶더니 이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야 번지르르하기만 하죠. 반면에 셋째 마님은 저희 측비 마마와 같이 회임 중이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든 다른 사람들 말보다 더 믿음이 가고요.”
청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측비 마마는 걱정되고 우리 셋째 마님 몸이 무거운 건 보이지도 않나 보죠?”
이번에도 엽연채 대신 청유가 나서자 녹지는 몹시 분했지만 못 들은 체했다.
“참! 셋째 마님, 저희 측비 마마께서 백빙白氷 비취를 구해서 장명쇄長命鎖(장수를 기원하는 자물쇠 모양 장신구) 두 개를 만들려 하세요. 두 집에 아이가 태어나면 하나씩 나눠 주시려고요. 측비 마마가 지금 도안을 그리고 계시는데 어찌 된 건지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아 고생이세요. 하니 셋째 마님, 내일 시간이 되시면 한번 오셔서 도와주세요.”
청유는 퍼뜩 지난번 주묘서가 와서 화해를 청한답시고 배 속 아이들의 복중 정혼을 이야기하던 게 생각이 났다. 이제는 장명쇄 두 개를 만들겠다고? 그것도 옥 한 덩어리로 한 쌍을? 정말 그렇다면 이건 정혼의 징표나 다름없지 않은가!
한편, 녹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엽연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펴보았지만 엽연채는 그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래, 알겠구나.”
어쨌든 엽연채의 입에서 ‘그래’란 소리가 나오자 녹지의 눈에 비웃음이 가득 담겼다. 조금 전까지는 거드름을 피우고 있더니 두 집 아이들의 정혼 장명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좋아라 하다니. 난 네년이 이 미끼를 물 것을 벌써 알고 있었지!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전하거라.”
“네.”
녹지는 엽연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 청유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셋째 마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측비 마마의 아이는 황실의 자손인지라 혼사 같은 중대사는 측비 마마 혼자 결정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그래도 방금 소인이 드린 말씀은 다른 곳에 전하지 말아 주십시오.”
“물론이지.”
엽연채의 대답을 듣고 녹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청유는 흔들리는 주렴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돌아봤다.
“마님… 설마 정말 주묘서의 아이와 복중 정혼을 할 건 아니시죠?”
“걱정하지 말아. 그런 생각 없으니.”
엽연채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청유는 그제야 한숨 놓았다.
“그런데 마님은 왜… 꼭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보였어요.”
“청유야, 이 일은 더 알려고 하지 말거라.”
청유가 뜻밖의 말에 놀랐으나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지금 녹지가 한 말은 어디 퍼뜨리지 말고.”
“그럼요.”
청유가 알겠다고 하자 엽연채도 세 번 말하지 않았다. 활발해 보여도 속은 신중하고 듬직하다는 것이 청유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아침에 먹던 그 자미로紫米露나 좀 가져다줘.”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아침을 먹고 태자부로 출발했다.
일행이 수화문에 내렸으나 주묘서의 측근인 녹지나 춘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불러 놓고 맞이도 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경우람? 청유와 혜연은 기분이 상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으나 엽연채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태자부의 하인이 얼른 나와 엽연채를 반갑게 맞이하며 데리고 갔다.
엽연채는 혜연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묘언헌으로 향했다.
묘언헌에 들어서자 춘산이 놀랐단 듯 인사를 해 왔다.
“어머! 셋째 마님이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주묘서가 일어서 엽연채가 들어오는 것을 맞이했다.
“작은새언니, 오셨네요. 어서 이리 와서 제가 그린 은쇄 좀 봐 줘요.”
“그래요.”
엽연채와 주묘서는 함께 정丁차간으로 들어가 앉았다.
청유가 보니 정말로 반쯤 그린 도안이 있었는데, 너무 평범해서 차라리 바깥의 은 상점에 가서 만들어 달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수작인지 도통 모르겠네.’
청유는 남몰래 긴장했지만, 주묘서는 엽연채를 끌어다 앉히고 정말 오전 내내 장명쇄 도안에 대해 의논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엽연채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주묘서의 눈이 차갑게 반짝였다.
몇 시진이 지나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주묘서는 마음이 급해 수화문에서 태자가 귀가하길 기다렸다. 하나 술시戌時(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일각이 되어서야 태자는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태자가 이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자 주묘서가 바로 달려갔다.
“전하.”
“측비 마마, 어찌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이계가 놀란 소리를 냈으나 주묘서는 알은척도 하지 않고 태자에게 아양을 떨었다.
“전하가 걱정되고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하, 신첩이 회산갈비탕을 준비했으니 같이 가셔요.”
태자는 정선제의 수녀 간택 때문에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으나 주묘서가 잡아끄는 대로 가만히 따라갔다.
함께 묘언헌에 들어가자 주묘서는 그를 식탁으로 끌어다 앉히고 탕을 떴다. 따뜻한 갈비탕을 손에 들고 있으니 태자는 오랜만에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짜증으로 일렁이던 마음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하, 요 며칠 어찌 이리 늦으세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묘서가 입을 삐죽거리자 태자는 심기가 도로 불편해져 차갑게 내뱉었다.
“공무가 바쁘다.”
“아. 신첩도 오늘에야 들었어요. 아바마마의 수녀 간택 때문에 전하도 바쁘신 거겠죠.”
태자는 ‘수녀 간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수녀 간택은 본궁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야.”
“그렇군요.”
주묘서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난 양,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찮으셔서 무척 야위셨는데 갑자기 수녀 간택이라니. 바깥에서는 모두들 아바마마가 노익장을 발휘하신다고 얘기하더라고요.”
태자의 이마에서 핏줄이 불뚝불뚝 뛰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 황후의 말이 떠오르면서 그는 마음을 겨우 가누고 차갑게 웃었다.
“누가 알겠더냐! 사실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몸으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지도.”
“그럼요. 누가 알겠어요. 전에 태의원의 태의들이 아바마마를 치료할 때도 다들 회복할 수 없다고 하더니 결국… 나 의정이 살려 냈잖아요! 큰일을 무사히 넘기셨으니 아바마마는 분명 큰 복을 누리시겠지요. 지금 수녀 간택도 그중 하나 같고요!”
주묘서는 나직이 한숨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또 혼자 깔깔댔다. 반면, 태자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주묘서의 말대로였다! 당시 모든 태의들이 황제가 죽을 것이라 했는데 나 의정이 떡하니 살려 내지 않았던가.
‘지금 이 태의가 황제의 몸 상태가 풍전등화나 다름없다고 했지만, 정선제 곁을 지키고 선 건 그자가 아니라 나 의정이잖은가! 이 태의의 의술은 나 의정에게 비할 바가 못 돼!’
이 태의가 정선제에게 길어야 5년밖에 남지 않았다 했다지만, 그건 이 태의의 예측이었다. 나 의정이 신묘한 의술로 30년, 아니 50년을 더 살게 하면……!
“아바마마는 노익장이시니 전하에게 남동생을 만들어 주실지도 몰라요. 태조 황제 폐하처럼요.”
주묘서가 말을 듣자 태자는 생각에 잠겼다. 태조 황제! 예순여덟에 막내아들을 보고… 20년을 더 사시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끝내 원래의 태자를 폐하고 자신이 가장 예뻐한 막내아들을 태자로 세웠단 사실이었다!
태자는 생각을 곱씹다가 어두워진 얼굴로 주묘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주묘서는 흠칫 놀랐지만 이를 악물고 얘기했다.
“전하… 신첩, 신첩은 단지 전하가 걱정되어서 그래요.”
태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주묘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분명 전하가 보위에 올라야 하는데… 어떻게… 아바마마가 갑자기 멀쩡해지시다니요! 저도 전하의 효심이 깊은 것은 알지만, 자애로운 아버지가 있어야 효자도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보세요! 반쯤 죽었던 사람이 무슨 속셈인지 수녀를 간택하겠다 하고, 정말로 즐겨 보겠다는 욕심이면 상관없지만 그러다가 황자라도 몇 명 생기면… 그리고 20년을 더 사시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주묘서의 말이 구구절절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태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참, 전하. 며칠 전 제게 백빙 비취가 생겼는데, 작은새언니가 그 얘기를 듣더니 장명쇄 두 개를 만들어 두 집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자고 하는데 어떨 것 같아요?”
주묘서가 묻자 태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주묘서와 엽연채 사이는 틀어졌고, 옛정을 회복한다고 해도 어차피 체면치레를 위해서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명쇄를 나눠 갖겠다니? 만약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태어난다면 그건 정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태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정선제가 주운환에게 많은 은정을 베풀고 있지만 사실 주운환은 자신과 훨씬 가까웠다.
태자는 가슴이 뛰어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묘언헌을 빠져나왔다. 그는 서재로 향하는 길에 이계를 시켜 송초를 비롯한 몇몇 수하를 불러들였다.
“아바마마의 수녀 간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황제 폐하는 이미 기력이 쇠진하셨으니 그저 과시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송초는 태자의 뜻을 알고 이렇게 대답했으나 태자는 그의 대답이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 아바마마의 중병 때도 시간이 머지않았으니 본궁에게 즉위 준비를 하라고 했잖은가!”
태자가 눈썹을 찡그리며 질책하자 송초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함께 있던 이계가 다급하게 나섰다.
“전하, 황후 마마께서 반드시… 반드시 때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이 태의가…….”
송초가 다시 입을 열자 태자가 냉소했다.
“그 늙은이가 뭐라더냐? 태의원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것은 나 의정인데 이 태의가 뭘 안단 말이냐? 그자의 의술이 어디 나 의정에 비할 수나 있겠느냐? 나 의정이 이 태의 수준이었다면 아바마마는 벌써 붕어하셨을 거다!”
송초와 이계는 말이 없었고, 조용히 있던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세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부에서 용포도 마련하여 폐하께서 소천하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건강이 호전되셨으니까요! 하지만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니 태자 전하는 우선 침착하게 지켜보십시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찌 알겠습니까?”
만류하는 말에 태자는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본궁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본궁은 태자이지만 내일도 그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아바마마가 속 빈 강정 같아도 내년이라도 본궁에게 황자 동생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다시 20년 후엔 태자의 자리가 누구의 것일지는 모르지! 너희들 모두 걱정만 하느라 벌벌 떨고 있으니 어찌 큰일을 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