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27화 (727/858)

제727화

나 의정이 나간 후, 정선제는 우물쭈물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 의정은 말리려는 것이겠지만 자신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한편, 채결은 놀라서 온몸이 다 경직되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폐하…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정선제는 수치심을 느꼈으나 그것은 이내 분노가 되었다. 그는 채결을 노려보며 사납게 반문했다.

“그렇게까지라니? 몸을 잘 보양하면 된다는 나 의정의 말을 너도 듣지 않았느냐? 어차피 보양은 해야 하니,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채결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곧 정선제의 마음을 헤아렸다. 조정 대신들이 지난번 갈란군주의 일로 침궁까지 쫓아와 갈란군주를 벌하라고 몰아세우지 않았던가. 그 일로 정선제는 대신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 느꼈고, 그 원인이 바로 본인이 병약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 밤잠을 줄여 가며 장계를 처리하는 것도 자신이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몸을 혹사하는 만큼 용안도 초췌해졌기에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한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아직 쓸 만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폐하께선 현명하시니 그것도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채결은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한 사이답게, 정선제는 채결의 눈빛만 봐도 그가 자신의 속내를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기가 생기지 않더라도 수녀를 간택하면…….”

“폐하의 위용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채결이 은근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궁에서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수녀를 들이지 않았습니다. 고인 물처럼 적막한 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하겠습니다.”

정선제의 눈이 더욱 번뜩였다. 과연 채결의 말대로였다. 그의 눈동자에 새로운 희망이 차올랐다.

십여 년 전부터 자신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결국 ‘그 일’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억지로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후궁에 발길을 끊었다.

‘하나 방금 나 의정이 새로운 약방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다시 짐을 위풍당당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까지 좋아지진 못하더라도 나쁠 게 없었다. 아름다운 수녀를 몇 명 뽑아 놓고 이따금 찾아가 바라만 봐도 남들에게는 충분히 총애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남자의 존엄을 세울 수 있을 터.

* * *

이튿날 아침.

정선제는 조회를 파하고 황급히 대신들을 돌려보냈다. 대신들은 대전에서 파도처럼 밀려 나와 제각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예부상서 여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자기 밑의 시랑 두 명과 함께 막 집무실에 들어서려는데 채결이 들어왔다.

여지와 시랑들은 채결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채 공공, 이 시간에 어쩐 일이오? 어서방에서 한창 바쁠 시간일 텐데, 설마 폐하께서 공공에게 편히 쉬라고 휴가라도 주신 게요?”

여지가 농담을 건네자 채결도 따라 웃으며 역시 농담조로 대꾸했다.

“제가 아무리 한가하더라도 예부만은 못하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공공. 바깥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 말을 믿지 마시게. 우리도 바쁘게 일하고 있으니!”

“아무렴요. 바쁜 일이 많으시지요! 더군다나 이제 한가하게 계시고 싶어도 못 그러실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여지와 시랑들은 채결이 일을 시키러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공, 맡기실 일이 있으면 어서 말씀하시구려.”

“곧 날씨가 따뜻한 삼월입니다!”

채결이 웃으며 말을 받자 여지와 시랑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삼월? 삼월에 무슨 중요한 기념일이 있던가? 회시會試와 전시殿試 정도밖에 없는 것 같은데, 3년에 한 번 치르는 춘시春試는 작년에 치렀으니 올해는 그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채결은 더 뜸을 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벌써 오랫동안 수녀 간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날씨 좋은 삼월에 예부에서 준비해 주십시오.”

“오오오. 네, 알겠습니다!”

여지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하온데 수녀 간택이라면?”

“예.”

“폐하의 수녀 간택 말이지요?”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채결이 쏘아보며 되묻자 여지가 헛기침을 하더니 자신도 그럴 줄 알았단 듯 태도를 바꾸었다.

“공공의 말씀이 지당하오. 그런데 일등 간택으로 하는지 아니면 이등 간택으로 하는지 정해졌소이까?”

일등 간택이란 도성과 각 주에서 명문 귀족들만 뽑는 것이다. 반면에 이등 간택은 신분만 깨끗하면 관가든 상인이든 일반 백성이든 간에 적정 연령의 여자들이면 모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등이면 됩니다.”

“알겠소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상서 대인. 소인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채결은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떴다.

여지와 시랑들은 채결이 나간 쪽을 보며 얼이 나가 있다가 우시랑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수녀를 간택하신다고? 십 년이 넘도록 수녀 간택을 한 적이 없는데, 게다가…….”

황제는 벌써 몇 년째 후궁에 발도 들이지 않고 있었다! 정선제의 자손이 많아 대신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수녀 선발이라니!

“황제 폐하께서 수녀를 간택하신다 하니 그대로 준비하면 되지!”

여지가 헛기침으로 입단속을 대신했다.

“갑시다. 할 일이 많으니.”

여지는 그길로 각 주부州府에 수녀 간택 공문을 보냈다.

* * *

그 시각, 봉의궁.

봉의궁 안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화초를 좋아하는 정 황후는 여기에 여러 꽃을 심고 직접 가꿨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근래 정원에는 그녀가 아끼는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정원 한편의 원형 석탁. 정 황후는 맞은편에 앉은 태자에게 직접 차를 따라 주며 권했다.

“내가 직접 말린 화차인데 맛을 보게.”

태자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지만 찌푸린 미간은 그대로였다.

“어떤가?”

“괜찮습니다.”

태자는 여전히 우울한 기색을 띤 채 눈썹을 찌푸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때 어린 환관 하나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마마, 전하.”

정 황후가 돌아보자 환관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무슨 일이냐?”

“마마, 황제 폐하께서 수녀 간택을 준비한다 하십니다.”

환관이 말하자 정 황후와 태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무슨 말이냐? 뭘 뽑아?”

“수녀 간택!”

정 황후와 태자는 깜짝 놀랐다. 놀람이 채 가라앉기도 전, 정 황후의 두 눈에 힘이 한껏 들어갔다. 정선제의 사내구실이 어떠한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정선제는 이미 십 년 넘게 후궁에 ‘그러한’ 발걸음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수녀를 들인다고?

정 황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간단히 알겠노라고만 했다.

“그래, 잘 알았다.”

환관은 그제야 한숨 돌리고 돌아갔다.

태자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수녀 간택?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수녀를 들이겠다는 건지. 정말 수십 년은 더 살 줄 아나 보지?

정 황후도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여러 일을 겪었다고 해도, 후궁에 새사람을 들인다면 질투는 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불만스러웠다. 정선제는 요즘 일을 너무 많이 벌이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실까요?”

태자의 낯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람이 늙으면 다 그렇지. 어떻게든 젊은 시절의 기분을 되찾으려고 안달인 게야.”

정 황후는 웃었으나 태자는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차갑게 소리쳤다.

“아바마마도 참! 누가 봐도 몸이 안 좋으신데 말이지요! 바로 저번에도 앓으셨는데, 몸조리는 하지 않으시고 무슨 수녀 간택이랍니까.”

정 황후는 안색이 변하더니 차갑게 말했다.

“태자, 무슨 쓸데없는 소린가?”

태자는 조금 침착해졌지만 여전히 침울해 보였다. 정 황후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타일렀다.

“모자 사이에 터놓고 얘기해 보자. 네 마음이 급한 것은 알지만 내가 언제 안 된다더냐? 하나 이 어미가 늘 말했듯이,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큰 뜻을 이룰 수 있는데 왜 모험을 하려 하느냐?”

“어마마마, 소자는 이삼십 년을 더 기다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슨 이삼십 년? 너도 방금 말했잖니. 병이 깊은데도 저렇게 기어이 국정을 살피는 것은 허세를 부리는 것뿐이야. 황제의 몸은 이미 희망이 없다. 하나 폐하가 수십 년 동안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셨으니 너도 마지막까지 효자가 되어야 해! 자연스럽게 황위를 이어받아야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래야 아름답지 않겠니.”

정 황후가 좋게 다독였으나 오늘만큼은 태자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수녀 간택을 하면 건강이 점점 좋아지실지도 모릅니다.”

“그럴 리가.”

정 황후는 목소리를 낮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이 태의가 황제는 겨우 버티고 있다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사실 자신도 마음이 급했지만, 그렇기에 정 황후는 더더욱 실수하지 않으려고 만사에 조심했다.

“지금 황제의 건강은 전적으로 나 의정이 맡고 있습니다.”

태자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이리 반박했으나 정 황후는 도리어 하하 웃었다.

“네 아바마마는 나 의정을 몹시 신뢰하시지. 두 사람 정말 사이가 좋아! 하나, 그렇다고 나 의정이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 같으냐?”

태자는 깜짝 놀라 눈썹을 위로 당겼고 정 황후는 묘한 미소를 띠며 홀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 중병에 걸렸을 때 황제는 이미 근본까지 상했다. 빠르면 일이 년, 늦어도 삼 년에서 오 년이야.”

태자의 안색이 드디어 조금 풀렸고, 정 황후는 그 변화를 지켜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자가 조급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시시때때로 태자를 설득하고 그 마음을 풀어 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가 봐라. 참, 측비가 회임을 했으니 더 많이 함께 시간을 보내렴.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바로 네 적자가 될 것이다. 딸이더라도 주묘서가 출산을 하면 태자비로 봉하자꾸나.”

“네.”

태자는 예를 행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자가 돌아간 후, 정 황후는 정선제에게 갔다.

정선제가 어서방에서 장계를 읽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보니 정 황후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쩐 일이오, 황후?”

“폐하께서 수녀를 간택하신다는 채결의 말을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궁에 새사람을 들이지 않았는데 이제 궁에 새로이 활력을 불어넣으신다니, 신첩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정선제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 간택하겠다 했을 때 대신들이 그에게 나이 들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젊은 처녀를 탐낸다고 욕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황후가 찾아와 울고불고하면서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컸다. 하지만 막상 정 황후는 울기는커녕 기뻐하며 찬성하는 게 아닌가.

정선제는 과연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단 생각에 한층 자신이 붙었다.

“황후는 역시 남다른 사람이군. 황후가 대범하고 현명해서 짐은 안심이오.”

“신첩은 폐하의 옥체가 날로 건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정선제는 마음이 따뜻해져 들고 있던 장계를 내려놓고 정 황후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짐이 오랫동안 황후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군. 자, 같이 화원으로 가 좀 걸읍시다.”

“네.”

정 황후는 여전히 곱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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