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9화
“누군지 모릅니다, 저는 모릅니다…….”
잡아떼기 무섭게 남자가 황사구를 힘껏 걷어찼고 황사구는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모르는 사람? 당연히 모르겠지. 네가 사고판 여자가 수백 명은 족히 될 텐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다 알아보겠더냐!”
황사구의 낯빛이 변하더니 얼른 일어나 앉았다.
“아, 저는, 아닙니다……. 살려 주십시오, 나리! 살려 주세요!”
하나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는 줄은 황사구 저도 알았다. 자기를 여기까지 붙잡아 온 것을 보면 이미 다 알아봤을 것 아닌가. 이렇게 맞아 죽겠구나, 직감한 황사구는 부디 살려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림을 잘 봐라. 알아보겠나?”
그러나 남자는 냉랭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황사구는 덜덜대는 목을 겨우 가눠 그림을 잠시 보더니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릅니다. 정말로 모릅니다.”
그의 손을 거쳐 간 여자가 정말 수백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장사를 그만둔 지도 한참 됐는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남자는 말없이 앞으로 나오더니 황사구의 머리를 한 대 내려쳤다. 황사구가 고통에 겨워 소리를 지르며 쓰러지는데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이 여자를 네 사촌 형인지 뭔지한테 팔아넘긴 것 아니냐? 그 사촌이 빚쟁이한테 또 넘겼고.”
황사구의 표정이 변했다. 그제야 사촌 형에게 여자 하나를 팔았던 것이 기억났다.
눈앞의 초상화도 볼수록 낯익었다. 그래, 이 여자다! 엄청나게 예뻤던 그 여자! 그때 외로운 처지의 사촌 형을 생각해 싸게 넘겼었다!
하지만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제 사람들이 찾아오다니?! 혼비백산한 황사구의 얼굴이 하얘졌다.
보통 여자가 실종된 지 오래되면 찾는 사람이 없기 마련이었다. 특히 부호들은 더더욱 그랬다.
여자가 실종되면 곧 몸이 더럽혀지니, 체면을 잃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부호들은 며칠 찾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니 20년 만에 실종된 여자를 찾겠다고 누가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내의 차림새를 보니 어떻게 봐도 귀족 집안 같은데. 왜 이제야? 황사구는 놀라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나리,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소인도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황사구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 변명이 씨알도 안 먹힐 성싶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원해서 이 여자를 팔았다고 하면 남자가 자기를 때려죽일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너를 살려 줄 수 있다!”
“뭐라구요?”
황사구는 깜짝 놀랐다. 살려 준다고?
“어제 동정을 들었나?”
남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황사구는 흠칫했다.
“무슨 동정 말입니까?”
“그림 속의 그 여자는 우리 조씨 집안 적장녀이다. 20여 년 전에 실종되어 우리 노야도 포기하셨지. 하지만 오직 이 딸 하나뿐인 주인마님은 20년 만에 딸과 꼭 닮은 아이를 보고 딸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하셨다.
조사할수록 그 아이의 모친이 실종된 딸인 것 같은데 외모가 닮은 것 말고는 내력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마리를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역시 대부호의 딸이었구나! 황사구는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어제 우리가 보낸 사람들이 이미 이 마을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고 있는데, 들은 게 있나?”
남자의 물음에 황사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나올 때 낯선 이들이 집집이 들러 사람을 찾지 않았던가!
그때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눈앞의 남자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이 여자를 찾으러 왔단 거 아닌가! 즉, 나를 찾아온 것이다!
“허허, 우리 소저가 오래전에 사라지신 후로 마님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다. 이 여인이 정말 사라진 우리 소저인지 확인하면 손주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것이다. 당연히 소저를 팔아넘긴 너희들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황사구의 표정이 급변하며 소리쳤다.
“나리, 나리……! 제발요……! 제발 살려 주세요. 방금 제 목숨을 살려 줄 수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요.”
황사구가 당시 사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치가 빨랐기 때문이다. 이 남자가 나를 아직까지 어찌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협상의 여지가 있는 거다! 황사구가 이리 생각하며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드니 남자는 인자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둘째 마님은 그 아이가 인정받아 집에 오는 걸 원하지 않으시지.”
황사구는 순간 멍해졌으나 이내 희망에 찼다. 대갓집에는 워낙 남모르는 비밀이 많았다. 첩이 본처의 아들에게 독을 먹였다느니 본처가 이상한 구실로 서출의 자식을 때려죽였다느니, 무슨 일이건 비밀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저 조씨 집안도 마찬가지로, 주인마님은 그 여인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고, 둘째 마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한 줄기 서광을 본 황사구는 남자에게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나리,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남자는 허허 웃더니 이리 대답했다.
“네가 말해 봐라.”
“아, 그 사람들이 찾아오면 죽어도 모른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여인을 모른다고 잡아떼면 되겠지요?”
황사구가 다급히 머리를 굴렸으나 남자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니다! 지금까지 그 많은 여인들이 네 손을 거쳤는데 네가 죽어라 잡아뗀다고 해 봐야 너를 놓아줄 것 같으냐? 그자들이 너를 믿겠더냐?”
황사구의 안색이 변했다. 맞다. 모든 이가 자신을 가리키고 있으니 아니라고 잡아떼 봐야 몰매나 맞을 것이고 심하면 목숨도 잃을지도 모른다.
“나리, 뜸 들이지 마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세요.”
황사구가 거듭 읍소하자 남자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몸을 굽혀 황사구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말을 마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를 타고 떠났다.
혼자 남은 황사구는 자리에 앉아 우두커니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멍멍하니 있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마을로 돌아오니 저 멀리 자기 집 근처 용수나무 아래에 낯선 이들이 앉아 있었다.
황사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그 여인을 찾으러 온 것이다!
‘절대로 내막을 알려 줄 수 없다. 그 여인의 식구들이 보복하러 올 테니까.’
황사구는 감정을 추스르더니 허리춤에 매단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는 휘청거리며 집으로 갔다.
십하촌.
용효와 부하들은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황사구가 귀가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니 정말 찾기 힘듭니다.”
부하가 용효에게 이리 보고하는 찰나, 용효 옆의 노파가 반색을 했다.
“아이고. 황사구, 이제 오는구먼. 저이가 바로 이 근처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 장사꾼이지요! 허허허!”
황사구는 노파가 자기를 남한테 사람 장사꾼이라고 소개하자 얼굴을 붉히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누가 사람 장사꾼이라는 거요? 내가 사람 파는 것을 당신이 봤소? 나는 그냥 내 손에 사람이 떨어진 김에 중매하는 할멈에게 소개해 준 것뿐이라고!”
노파는 건성건성 대답하며 손짓을 했다.
“아휴, 그래, 알았어, 알았네. 오늘은 자네하고 말씨름하고 싶지 않으니 얼른 이리 와 보게. 여기 이 나리들이 당신을 찾고 있었어.”
용효의 눈이 차갑게 빛나더니 웃으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르신. 당신이 바로 황사구로군.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황사구는 낮게 신음하며 되물었다.
“나한테 뭘 물어본단 말이요?”
용효가 뒤를 돌아보자 부하 두 명이 단숨에 황사구를 잡아채 바닥에 찍어 눌렀다.
“아이쿠야! 뭐 하는 거……!”
황사구가 아파서 소리를 질렀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억센 손이 황사구의 입에 더러운 천을 쑤셔 박았다. 부하들이 황사구를 끌어다 말에 태우자 노파는 놀라 토끼 눈을 떴지만 용효가 다시 은자를 쥐여 주자 모른 척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갔다.
‘인신매매꾼이 자기가 사람을 사고팔았다고 인정할 리가 없다. 초상화를 꺼내 보여 줘도 모른다고 할 테지. 그러니 제일 좋은 방법은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마친 용효는 말에 올라 세차게 채찍을 내려쳤다. 말은 쏜살같이 마을을 벗어나 인적 없는 산 중턱에 멈춰 섰다.
용효와 부하들은 말에서 내려 황사구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용효는 그제야 초상화를 꺼냈다.
“이 사람을 알아보겠나?”
황사구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정말 그 여인이구나! 침착해, 침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황사구는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일 셈이요? 그리고 이 여자는 대체 누군데 갑자기 눈앞에 들이대는 게요?”
용효가 껄껄 웃으며 도리어 물었다.
“나는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묻고 싶은데! 당신, 사람 장사 하던 사람이잖아, 그것도 죄다 여자들만!”
황사구의 낯빛이 변했다.
“당신들… 이게…….”
황사구는 자기도 모르게 초상화를 뚫어져라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소! 내가 무슨 사람 장사꾼이란 말이오. 내가 돈 버는 꼴이 못마땅한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리요. 그냥 마을과 현에 있는 중매꾼들과 조금 아는 사이라서 사람 파는 일을 도와줬을 뿐이오.”
“모른다?”
용효가 냉소하며 힘껏 황사구를 걷어찼다.
“아아악! 난 정말 모르오……!”
용효는 울부짖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며 매섭게 추궁했다.
“네가 어떤 놈인지 모두 알고 있는데 아직도 잡아떼는 것이냐! 내가 네놈을 관아로 끌고 가야 실토할 셈이냐!”
뒤에 서 있던 부하가 차갑게 말했다.
“대인, 이놈은 관짝을 보기 전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놈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때려죽이면 감옥이라도 갈 줄 아나 봅니다! 바로 지현에게 넘겨서 우리가 자기를 어찌할지 실제로 보여 주시지요.”
황사구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정말 이자들이 관아에서 온 걸까? 그의 머릿속에 어느 대부호의 집사 같던, 자기를 가두었던 남자가 떠올렸다.
‘어느 지방의 부호인 줄 알았더니 설마 관아를 움직일 수 있는 고관대작 귀족 집안일 줄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절대 말할 수 없다! 죽어도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정말 자기 딸을 팔아 버린 것을 그 댁 마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복수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