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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715화 (715/858)

제715화

“마마… 저, 저는 정말로 갈란을 아낍니다……. 그래서 평왕비가 저에게 부탁을 하니 저도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됐네!”

태후는 변명은 더 듣고 싶지 않단 듯 차가운 눈길로 진씨를 훑었다.

“우리 터놓고 제대로 이야기해 보지. 진서후가 잘나가고 있으니 부인은 마음이 불편해서 매일 어떻게 하면 진서후를 이길 수 있을지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황가의 여식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었겠지.”

진씨의 낯빛이 달라졌다.

“태후 마마, 제가 어찌…….”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자애롭지 않은 어머니라는 평판은 바라지 않았다.

“더 말할 것도 없네. 부인은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인가?”

태후가 차가운 눈으로 진씨를 응시하니 진씨는 무서워 벌벌 떨었다.

“진서후는 우리 대제 최고의 장수일세.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제의 변방은 진서후가 맡을 것이야.”

확언하는 목소리는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진씨는 죽을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태후였다. 작년, 덕행에 문제가 있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장만만은 태자 측비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쫓겨났다. 지금 주묘서는 황후 자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만약 눈앞의 늙은 여우가 또 한 번 입을 잘못 놀린다면…….

“태후 마마, 명심하겠습니다.”

진씨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진서후의 생모인 이낭은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네.”

이미 알겠다고 했는데, 저 늙은 여우는 아직도 들은 척 만 척! 뭐 어찌하라는 거야! 진씨는 마음을 다잡으며 억지로 웃었다.

“네, 셋째가 돌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니. 주씨 집안 이공자처럼 생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네가 잘 보살펴 줘야지 이렇게 있는 대로 일을 벌여야 하겠나? 이게 현모양처가 할 일인가?”

태후의 말에 진씨는 고개를 숙여 더듬더듬 대답했다.

“태후 마마, 제가 양처가 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실 셋째 생모인 운 이낭은 전에…….”

“예전에 어쨌다는 말인가?”

진씨를 주시하는 태후의 두 눈이 은근히 반짝였다. 진씨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보탰다.

“운 이낭은 기루에서 데려온 여자로, 집안에 들어온 후에도 법도를 따르기는커녕 안하무인으로 굴며 몇 번이나 비양을 해치려 했습니다. 그때는 묵묵히 참았지만 나중에 운 이낭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셋째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벌써 죽었는데 진씨는 필사적으로 운 이낭의 죄목을 만들어 냈다. 아무튼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설령 잘못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어야 했다.

태후가 하얀 눈썹을 찌푸렸다.

“진서후와 그 이낭이 많이 닮았나?”

“닮았습니다. 마치 찍어 낸 것처럼 제 생모와 많이 닮았습니다……. 볼 때면 운 이낭이 벌였던 못된 짓들이 생각나 여태 셋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태후 마마께서 가르침을 주셔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반드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진씨는 진실한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태후는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나 형제자매는 서로 이해하고 도와줘야 하는 법이네. 그래, 이만 돌아가 보게.”

진씨는 그제야 안심하고 수안궁을 떠났다.

진씨가 나간 후 태후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폐하께 아뢰어라.”

채결이 병풍 뒤에서 나타나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일 감사합니다, 태후 마마.”

태후는 두어 번 기침을 했다.

“감사는 무슨. 하지만 폐하께서 이걸 왜 묻는 것이냐?”

정선제는 태후에게 자신이 무엇을 의심하는지는 알리지 않고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만 알렸다.

“그게…….”

채결은 몹시 곤란한 표정이었다.

만약 주운환이 운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고 말을 했다가 나중에 사실로 드러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리되면 정선제는 주운환을 없애 버릴 텐데 그러면 황제가 얼마나 무정해 보이겠는가. 그래서 정선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콜록콜록, 됐다. 나도 그저 말이나 해 본 것이다.”

태후는 살짝 한숨을 쉬며 채결을 다독였다.

“폐하께서 말하기 싫어하신다면, 너도 곤란해할 것 없다.”

채결은 그제야 웃음기를 되찾았다.

“감사합니다, 마마.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채결은 수안궁을 나서자마자 어서방으로 향했다. 들어가니 정선제는 탁자에 앉아 장계를 읽고 있었다. 그러나 안색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이 병색이 완연했다.

“폐하. 태후 마마께서 여쭈어보셨습니다. 주 부인이 직접 말하기를 진서후와 그 이낭은 한 틀로 찍어낸 것처럼 닮았다고 합니다.”

정선제는 흠칫 놀라 운하를 떠올렸다. 기억 속의 그녀는 열 살짜리 작은 소녀였지만 확실히 컸으면 주운환과 닮았을 수도 있었다…….

“주 부인이 이 일을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그럴 리가요. 주 부인은 태후 마마께서 혼을 내시니 메추라기처럼 놀라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태후 마마께 꾸중을 들었다고만 생각할 겁니다.”

“그럼 됐다.”

정선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책을 꺼내 펼쳐 들고 그림 한 폭을 꺼냈다.

“자, 이걸 용효에게 전해 줘라.”

채결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로 건네받았다.

“네.”

궁 안에서 운하공주의 초상화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거기다 세월이 20여 년이나 지났으니 운하에 대한 정선제의 기억 역시 흐릿해졌다. 하지만 주운환이 나타나자 정선제는 그의 외모를 통해 성장한 운하공주를 그려 볼 수 있었다.

지난번 용효를 불렀을 때는 정선제가 이미 주운환에 대한 의심을 거둔 후였기 때문에 형식적인 조사를 시킨 것에 불과했고, 당연히 초상화도 들려 주지 않았었다.

애초에 정선제는 평왕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초상화를 생각하게 됐다. 운하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며 알아보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정선제는 젊은 시절에 그림을 곧잘 그렸었기에 주운환의 용모에 운하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합쳐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주운환이 정말 생모와 한 틀에서 찍어 낸 것처럼 닮았다면… 이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채결은 잠자코 그림을 들고나와 해동청 다리의 죽통에 집어넣고, 날려 보냈다.

* * *

그 시각. 진씨는 동화문에서 장 마마를 만나 함께 마차를 타고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마차가 수화문에 멈춰 서자 장 마마는 물건을 들고 쌩하니 공거로 향했고 진씨는 일상원으로 걸음하다 마중 나온 정 마마와 마주쳤다.

“마님, 정말 갈란군주의 일 때문이었나요? 방금 장 마마가 물건을 잔뜩 들고 가는 걸 봤습니다.”

그러나 진씨는 굳은 얼굴로 딱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들어가자!”

정 마마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일단 진씨의 뒤를 따라 일상원으로 들어갔다. 진씨는 탑상에 앉고 나서야 수안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 마마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태후 마마께서 장 마마를 먼저 내보내셨잖습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님을 망신 준 것은 아니니 마님을 크게 혼내신 건 아닌 셈입니다.

마님, 아침에 춘산이 한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기회가 오든 누가 부추기든 세상에 이유 없는 복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측비 마마의 미래는 셋째 나리에게 달려 있으니, 황후 자리에 오른 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진씨는 차가운 신음을 내뱉었다.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는 앞에 없는 누군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각, 공거.

장 마마는 태후가 하사한 물건을 가지고 약 냄새가 진동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침상에 누워 있던 매씨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눈을 떴다.

“왔구나.”

“네.”

장 마마가 침상 곁으로 가 하사품들을 내려놓았다.

“태후 마마께서 마님께 이 약들을 하사하셨어요.”

“그래.”

매씨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리고?”

장 마마는 가까이 다가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했다.

“태후 마마께서 정말 떠보려고 부르신 게 맞았습니다! 평왕비가 뭔가 말을 한 게 분명해요. 지난번 연회에서 갈란군주가 일부러 셋째 마님의 팔찌를 내보였던 것 하며… 차근차근 셋째 나리의 신분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던 게 분명합니다. 이제는 이득을 못 보게 생겼으니 이 일을 황제 폐하께 알려 공을 세워서 죄를 피하려는 게지요.”

“흥!”

매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팔찌는 실지로 운하가 남긴 것이라 엽연채에게 준 것이지만, 누가 아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주운환의 생김새만으로도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를 모를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이름이 알려지면 소용돌이에 휩쓸릴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명예, 질투, 증오… 그야말로 온갖 것이 그에게 몰려올 것이다.

처음엔 비적이더니 그다음에는 갈란군주까지……. 모든 것이 주운환을 향하고 있었다.

그까짓 팔찌 하나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었다. 애시당초 운하를 빼닮은 주운환의 얼굴 때문에 무엇이든 빌미로 삼아 수작을 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정선제는 의심이 많으니 금린위에서 뭐라도 찾는다면 무정하게 주운환을 처리할 것이었다.

“노마님, 상황이 이러한데 셋째 나리께 운 이낭의 일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장 마마의 말에 매씨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즘 셋째는 어떤 것 같더냐?”

“잘 지내시는 듯했습니다. 적어도 셋째 마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고요. 지난번 집에 있을 때도 노마님께 책을 읽어 드리러 오셨잖습니까.”

엽연채가 책을 읽어 준 얘기가 나오자 매씨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럼 셋째와 양왕이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는 말이구나. 아니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양왕은 도성의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지난번 비적 사건의 목표가 사실은 셋째의 진짜 신분이라는 것을 우리도 짐작했는데 양왕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

양왕이 감추기로 했다는 건 주운환이 진실을 알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계속 알아보고 계시는데…….”

장 마마는 좀처럼 걱정을 거두지 못했으나 매씨가 딱 잘랐다.

“셋째에게 말해 봐야 소용없다. 병사라도 일으키라는 거냐? 셋째가 침착한 것을 보면 양왕에게 계획이 있는 거야. 일전에 황제 폐하가 중병에 걸렸었고 태자와 황제의 사이도 점점 나빠지고 있는데, 양왕이 도성에 남아 있지 않고 황실을 흔들고 있는 걸 보면 벌써 계획을 세워 놓은 거야. 우리는 조용히 지켜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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