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4화
태후의 말대로 자신이 주씨 집안에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소씨 집안에서 적과 내통했다며 도성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주씨 집안도 무관 집안이었으니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어 주씨 집안의 분위기까지 몹시 무거웠었다.
이후, 황제는 곧 새 황후를 맞이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도성에서 ‘소 황후’는 금기어가 되었고, 소씨 집안이 복권된 후에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말을 최대한 아꼈다.
진씨도 오늘 태후 마마가 별안간 그녀의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양왕이 얼마 전 태자를 해치려다 발각돼 도성에서 도망쳤는데 말이다.
“소씨가 매화를 참 잘 키웠어.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라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고상한 일이 매화 가꾸는 거였지. 소씨가 있던 몇 년 동안 궁중의 매화를 보고 많은 문인들이 발걸음을 떼지 못했지. 그 매화를 보고 있으면 천고의 명작을 쓸 수 있다고 말들 했었어.”
태후가 웃음을 흘리자 진씨와 장 마마도 따라 웃었다.
“아깝지…….”
태후는 추억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갑자기 장 마마를 보았다.
“참, 그러고 보면 소 황후와 노태군 사이가 정말 좋았었지.”
“맞습니다.”
장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마님이 선황후 마마보다 나이는 훨씬 많으시지만, 두 분 모두 무예를 사랑하시고 병사들을 이끌고 출정한 경험이 있으셔서 통하시는 점이 많았습니다.”
“정말 그랬지. 한데 소 황후가 노태군에게 뭔가를 선물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장 마마가 놀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게 있었습니까?”
“응? 시간이 오래됐다 보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나.”
태후가 머리를 만지며 잘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니 장 마마는 농담조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소인 생각엔 태후 마마께서 잘못 기억하고 계신 듯합니다. 선황후 마마는 하사품을 내리는 등의 번잡스러운 일을 가장 머리 아파하셨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명절 같은 때에는 모두 궁의 마마들이 알아서 하신 것입니다.
아. 그런데 소인이 기억하기로는…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하사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태후가 처진 눈을 크게 뜨고 장 마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인가?”
“어느 해 겨울이었는데…….”
장 마마가 가만가만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궁에 무슨 연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평왕 전하의 만월 연회였던 것 같은데, 저희 노마님도 참석하셨습니다. 연회장에서 선황후 마마께서 병이 나셨단 소식을 듣게 됐고, 노마님은 마마를 뵈러 가셨지요.
찾아뵈었더니 선황후 마마께서 경대의 장신구를 가리키시면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니 가져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황후 마마의 장신구에 손을 대겠습니까. 저희 노마님도 감히 그러지 못하셨습니다.
그래도 선황후 마마께서 계속 권하시고 또 무언가 근심거리가 있는 듯한 모습이셨기에 노마님이 어쩔 수 없이 탁자에서 머리 장식 두 개와 팔찌 두 개를 가져가셨습니다. 선황후 마마께선 아껴 보관하지 말고 바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들면 직접 하고 어울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줘도 된다고도 하셨지요.”
태후의 눈이 빛난 반면에 진씨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집에 그렇게 좋은 물건이 있었는데 여태 몰랐다는 게 언짢아서였다.
“노마님께서 물건을 가져오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 마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소씨 집안이 적과 내통했다고 모함을 당하는 바람에 소 황후가 폐비된 일이었다.
“그래서 그 물건들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 주지도 못하고 집에 보관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작년 가을에야 노마님이 어쩐 일인지 갑자기 이 물건들을 떠올리시고 꺼내 보셨습니다. 그날 마침 셋째 손자며느리가 문안을 오셨기에 그중 팔찌를 하나 건네주셨지요.”
진씨의 안색은 더 못 봐 줄 지경이었다.
작년 가을이면 주운환이 출정하여 생사를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때 집안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쓸데없이 명줄만 긴 노친네가! 귀하디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진씨는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작년 묘서가 혼인을 준비할 때 집안 사정이 어려워 좋은 물건을 마련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노마님은 귀중한 물건을 그리 많이 가지고 계시면서 묘서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으셨네요.”
장 마마는 냉소하며 당시 일을 상기시켰다.
“소인은 노마님이 그때 큰아가씨 뺨을 때리신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진씨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엽연채를 불러 놓고 황제 폐하께 가서 주묘서의 혼인을 허락한다는 성지를 내려 달라 부탁하라며 그 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다. 그리고 그 노인네가 갑자기 뛰어나와 묘서의 뺨을 때렸었다.
태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주묘서를 미워해서 안 주는 게 명백한데 진씨는 뭘 따지고 드는지. 그 곁에 선 강 마마가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마마,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 그래. 벌써 오시로구나. 어서 식사를 준비해라. 주 부인도 오늘 나와 함께 먹고 가지.”
태후는 근처의 각루刻漏(좁은 구멍을 통하여 물이 일정한 속도로 그릇에 떨어지게 하여 시간을 재는 도구)를 확인하고 이리 권했다.
“네.”
진씨는 당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강 마마가 태후를 부축해 일어섰고 사람들은 서차간에서 나와 반청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자리를 비우자 한편의 봉황 병풍 뒤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바로 정선제였다. 얼굴이 창백한 채, 채결의 부축을 받고 있는 그는 억지로 쇠약한 몸을 끌고 나온 차였다.
“채결, 네가 보기에는 어떠냐?”
정선제의 눈빛이 음울했다.
주운환 일에 대해서라면 정선제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뭐라도 나오길 목이 빠지게 고대하건만 여전히 주운환의 죽은 생모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금린위도 계속 조사 중이었다.
그래서 태후에게 엽연채의 팔찌에 대해 알아봐 달라 부탁한 것이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그 팔찌는 매 노태군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처음엔 소 황후가 매 노태군에게 준 것이었다.
“소인이 보기에 장 마마의 말은 사실 같습니다. 정말 평왕비의 말씀대로 그 팔찌가 운하공주께서 남기신 것이라면, 감히 드러내 놓지 못하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 엽연채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차고 다니지 않습니까.
지난번 폐하께서 그 팔찌를 보고 몇 마디 물으셨을 때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고 그 후에도 숨기는 기색이 없고요. 하니 그 팔찌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엽연채는 아마 그 팔찌가 선황후의 물건이었던 것도 모르는 눈치입니다.”
채결의 말에 정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용효를 기다려 보자꾸나.”
말끝에 정선제가 일순 휘청거리자 채결은 소스라치며 그를 붙잡았다.
“폐하, 어서 침궁으로 돌아가시지요!”
“됐다. 짐은 서재로 가겠다.”
며칠 조정에 나가지 않는 동안 대신들이 모두 문안 장계를 올렸다.
예전 같으면 그러겠거니, 그저 넘길 텐데 큰 병을 앓은 이후 자신의 몸 상태에 몹시 민감해졌기 때문인지 대신들이 자신의 몸 상태를 염탐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늘 대신들에게 자신이 무척 정정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직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 있으니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다 듣고 짐에게 오너라.”
“네.”
정선제의 갑작스러운 말에 채결이 허리 숙여 대답했다.
* * *
태후는 진씨를 데리고 대전을 나가 식사를 한 후 돌아왔다.
강 마마가 태후를 부축해 자리에 앉게 도왔다. 태후는 하좌에 서 있는 진씨와 장 마마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요즘 주씨 집안에 일이 많아. 다 갈란 때문이지……. 그 녀석, 혼인하기 전에는 천진난만하기만 했는데, 몇 년 동안 오씨 집안 며느리로 살더니 저렇게 되어 버렸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역시 갈란의 일 때문에 떡고물이라도 주려고 부른 거구나! 진씨의 눈이 반짝이더니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자책하실 것 없습니다, 태후 마마. 그 오씨 집안은… 서자가 거리 한복판에서 적모를 때리는 집안이니 원래 그렇게 싹수가 노란 집안입니다. 군주가 아무리 순진무구했어도 그런 집에 들어갔으니 몹쓸 병이 옮지 않기가 어려웠겠지요.”
장 마마는 남몰래 진씨를 흘겨보았다. 오십보백보 주제에, 자기는 뭐 잘났다고!
한편,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이 일로 주씨 집안의 어린 공자도 다치고 노태군도 많이 놀랐을 거야. 강 마마, 가져오게.”
강 마마는 ‘네.’ 하고 나가더니 궁녀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쟁반에는 붉은 비단이 깔려 있고 고급스러운 상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딱 봐도 상자 안에 든 것은 진귀한 약재였고, 비단은 궁에서 직접 만든 고급품이었다.
“이것들은 주 공자와 노태군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니 부인과 마마가 전해 주게.”
값나가는 하사품들을 보자 진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태후 마마.”
“하지만 주 부인이 그때 오씨 집안에 쫓아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나중의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이렇게 말하며 진씨를 바라보는 태후의 눈에 노기가 담겨 있었다.
순간 경직된 진씨는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황당했다. 혼을 내려면 밥을 먹기 전에 먼저 혼내고 그다음엔 선물을 내려 위로하는 게 맞는 것이다. 선물을 내리고 다시 혼을 내는 법이 어디 있나.
“내 부인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장 마마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게.”
“네.”
장 마마는 태후에게 대답하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진씨를 한번 훑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씨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했다. 따로 남겨서 꾸중을 하면 그다음에는 바로 쫓겨나듯 나가야 할 텐데 그렇다면 자신의 체면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대전 분위기는 한층 냉랭해졌다. 진씨는 어색해진 표정으로 입을 뗐다.
“하하, 태후 마마…….”
태후는 말없이 인삼탕을 들어 한 입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고 나서야 진씨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정말 부인과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네.”
“네.”
진씨는 온몸이 뻣뻣해져 더는 입꼬리도 당기지 못했다.
“이번 일은 부인이 먼저 시작한 거라고 내가 좀 전에 말했네. 자네가 먼저 수작을 부려서 지금 이 꼴이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