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3화
태자는 곧 묘언헌에 도착했다. 녹지를 비롯한 시녀들이 다급히 몰려왔다.
“오셨습니까, 전하.”
태자가 처소 안으로 들어가자 주묘서가 더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군요, 전하! 어서 오세요. 신첩이 오늘 전하를 위해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태자는 그녀에게는 알은체도 않고 차가운 얼굴로 춘산과 시녀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나가 있어라!”
녹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춘산이 그녀를 잡아끌며 고개를 숙였다.
“네.”
춘산을 비롯한 모두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전하…….”
처소 안은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태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싸늘한 표정으로 주묘서에게 물었다.
“셋째 오라버니 내외와 얼굴도 안 보는 것 아니었소?”
어떤 일들은 본인에게 정확히 물어 확인해야 하는 법이었다. 주묘서는 굳은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갈란군주의 일은… 저희도 피해자예요. 남편을 죽이는 악독한 여자를 누가 며느리로 삼고 싶겠어요. 학해 일은 제 어머니가 작은새언니를 오해해서… 새언니가 화가 많이 났지만 제가 찾아가서 모두 오해였을 뿐이라고 잘 설명했어요.
가족은 뼈와 살을 나눈 사이잖아요. 설령 뼈가 부러져도 그 뿌리는 이어져 있는 거예요. 그렇다 해도 어떻게 사소한 문제도 없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갈란군주 그 못된 여자가 중간에서 이간질하고 몰래 모략을 꾸미는 바람에 이 모든 사달이 일어난 거예요. 제 얘기를 듣고 새언니도 기분을 풀었어요. 저한테 임부에게 좋은 음식도 가르쳐 주고 같이 어울리자고 생일 연회 첩자도 준걸요.”
주묘서는 감정에 복받친 듯 말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태자는 앞에 놓인 항탁을 내려다보았다. 금박 해당화가 붙은 첩자를 보고서야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묘서, 본궁은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너희들 사이에 소란이 이는 게 싫은 거지.”
“네.”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끌었다.
“전하, 어서 식사하세요. 다 식겠어요.”
두 사람은 그제야 반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태자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엽연채가 통이 크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적어도 자신과 주운환 사이에는 문제가 생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남서쪽의 응성과 도성 병영 모두가 여전히 내 것이다. 만약, 만약에…….’
하나 이리 생각해도 태자는 기분이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요즘 되는 일이 하나 없는 게, 하늘이 가만있으라고 내게 경고하는 걸까. 태자는 우울한 기색으로 식탁에 앉았다.
* * *
이튿날 아침. 춘산이 정국백부로 향해 주묘서와 엽연채의 사이가 어느 정도 풀어졌고 태자도 주묘서와 식사를 했다고 전하자 진씨는 크게 안도했다.
춘산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마님, 앞으로 무슨 일이든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어떤 기회가 생기더라도 누가 부추기더라도, 세상에 이유 없는 복은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측비 마마의 미래는 모두 셋째 나리에게 달렸습니다!”
진씨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제 한낱 여종까지 나를 훈계하는구나! 하지만 지금 주묘서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는 건 사실이기에 진씨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마님.”
그때 녹엽이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속이 상한 진씨는 녹엽까지 허둥대자 정색을 했다.
“태후 마마를 따르는 강 마마가 왔습니다.”
녹엽의 대답에 진씨와 춘산 모두 화들짝 놀랐다.
“뭐? 누구라고? 태후 마마?”
진씨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태후는 여든의 고령으로 몸이 좋지 않아 어지간해서는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수안궁에 은거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측근 마마를 보내다니 무슨 일이지?
“네, 태후 마마 궁에서 온 마마입니다.”
녹엽이 숨을 헐떡이며 재차 말하자 진씨는 춘산과 시선을 한 차례 더 교환한 후 급히 일렀다.
“어서 안으로 모셔라.”
“네.”
녹엽이 밖으로 나가고 진씨와 춘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주렴이 촤르륵 걷히더니 칠순쯤 돼 보이는 마마가 들어와 웃으며 인사했다.
“부인을 뵈옵니다.”
“아이, 강 마마 그리 예의를 차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진씨도 웃으며 남회색 비단옷 차림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앉으세요, 마마.”
진씨가 강 마마를 평상에 끌어다 앉히려는데 그녀는 사양하고 선 채로 용건을 전했다.
“오늘 소인은 태후 마마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태후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태후 마마께서는 연로하셔서 조용히 지내시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그래도 때로는 답답해하십니다. 비슷한 연배의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데, 안타깝게도 궁의 어르신들은 이미 대부분 세상을 뜨셨지요. 이번에 마마께서 갑자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노태군을 떠올리시더니 소인더러 말동무를 해 주십사 청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 명줄 긴 노인네를 찾는다고? 진씨는 내심 놀랐으나 겉으로는 그저 웃어 보였다.
“그랬군요. 그럼 제가 노태군을 모셔오지요.”
“부인도 함께 궁으로 가시지요. 마마께서 부인을 만나신 지도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강 마마의 말에 진씨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저도 궁에 따라가도 될지 여쭤보려 했어요. 태후 마마께서 제 생각을 해 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십여 년 전, 주씨 집안이 몰락하기 전에는 자신도 종종 궁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는 태후의 건강도 훨씬 좋아 종종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면 소인은 밖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강 마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자 진씨는 그녀를 문밖까지 마중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진씨는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해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우리 생각이 났다고?”
춘산이 대답했다.
“갈란군주의 일 때문 아닐까요? 요즘은 그게 제일 큰일이지 않습니까.”
춘산의 말을 곱씹으며 진씨가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정 마마가 말을 보탰다.
“춘산의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갈란군주는 황실의 군주이고 황제 폐하의 친손녀잖습니까. 그런데 남편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우리 주씨 집안 자손에게 독까지 먹였으니, 황제 폐하께서 저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신 거죠. 그래도 체통은 지켜야 하니 태후 마마가 대신 저희를 부르시는 거고요. 겉으로는 이야기나 하자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위로 선물을 하사하시려는 것이겠지요.”
춘산은 제 말이 바로 이거라는 양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윽고 진씨의 얼굴에 웃음빛이 어렸는데, 이번에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태후가 정말로 자신들을 그런 까닭에서 불렀다면 체면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온 셈이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마님,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춘산이 태자부로 돌아간 후 진씨는 재빨리 단장을 마치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수화문에 도착하니 강 마마와 매씨의 측근 장 마마만 기다리고 있고, 매씨는 보이지 않았다.
진씨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장 마마에게 물었다.
“어머님은?”
“노마님은 요즘 군주의 일로 병세가 위중해져 일어서지도 못하고 계시는데, 마님께선 여태 모르셨습니까.”
장 마마의 대답에 진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강 마마도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어쨌든 갈란군주는 종실의 여자이니 그녀도 친정 식구로서 면목이 없을 터였다.
강 마마는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태후 마마께서는 노태군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노태군의 병세가 가볍지 않은 듯합니다. 장 마마도 같이 가서 말씀을 드려야 태후 마마께서 안심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었습니다, 부인, 장 마마, 어서 타십시오.”
진씨와 장 마마가 마차에 올랐다.
붉은 바퀴에 양산이 달린 화려한 마차가 수화문을 지나 궁으로 직행했다.
마차는 반 시진 정도 걸려 궁에 도착했고 진씨 일행은 다시 가마로 갈아타고 수안궁에 들어섰다. 이들이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백발 노부인이 평상에 앉아 있었다. 나이는 여든이 넘어 보였지만, 머리에 보석 장신구를 가득 치장해 무척 부귀한 모습이었다.
“태후 마마를 뵈옵니다.”
태후가 고개를 들어 진씨와 장 마마를 쳐다봤다.
“어째 매 노태군은 보이지 않느냐?”
“마마께 아뢰옵니다. 노태군은 지금 와병 중이라 실로 바깥출입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말씀을 전할 노태군의 시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오.”
강 마마가 고하자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걱정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부인과 마마는 자리에 앉게.”
“감사합니다, 마마.”
진씨와 장 마마가 자리에 앉자 태후가 장 마마에게 말을 붙였다.
“요즘 노태군 건강이 어떤가?”
장 마마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방금 와병 중이라고 했는데 ‘건강’ 운운하니 영 생뚱맞게 들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노태군은 오래 몸이 좋지 않았는데 요즘 날씨가 추웠다 더웠다 하니 더 심해졌습니다.”
“거기도 그렇구먼. 나도 요 몇 년 몸이 점점 나빠져.”
태후는 말을 하며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그러고는 장 마마에게 매씨의 상태를 세세히 물어보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이 계절에는 백화난만하기 마련인데, 이젠 내 몸이 그 꽃향기를 맡지 못해. 딱 매화만 빼고.”
태후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드리워지자 진씨가 웃으며 말했다.
“매화를 말씀하시니, 저희 별장의 매화원이 조금 유명한 편인 게 생각나는군요. 태후 마마의 혈색이 좋아 보이시니 언제 오셔서 한번 구경하시지요.”
장 마마는 진씨의 작태에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셋째 나리의 매화원이 자기 것인 양 떠들어 대는 것으로 모자라 생색을 내며 태후 마마까지 초대하다니.
“오, 그런가? 언제 이 관절병이 잠잠한 날 건너가 매화 구경을 하도록 하지.”
태후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강 마마도 말을 거들었다.
“태후 마마는 거의 20년 동안 궁을 나서지 않으셨으니, 날이 좋을 때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아휴. 우리 궁의 매화도 예전에는 바깥에 뒤지지 않았는데. 이제 알아봐 줄 사람이 없는 게 아쉽구나. 그네가 떠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지!”
태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추억에 잠겨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강 마마도 그 옆에서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아봐 줄 사람? 태후 마마께서 누굴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씨가 묻자 태후가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도 알 텐데. 자네가 주씨 집안에 시집오면서 도성에 온 후였을 거야. 선황후 소씨의 일을 말한 걸세.”
진씨가 흠칫 놀랐다. 소 황후. 물론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태후가 오늘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지금 정 황후가 계후繼后인 것도, 그 전에 다른 황후가 있었던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