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12화 (712/858)

제712화

그 시각, 진서후부.

갈란군주가 옥에 갇힌 후, 엽연채와 주운환은 짐을 챙겨 진서후부로 돌아갔고, 주운환은 그다음 날 도성 병영으로 돌아갔다.

운연거. 방금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평상에 걸터앉아 화본을 보고 있었고, 혜연과 청유는 주변에 앉아 수를 놓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 부인은 내일 아침 일찍 오기로 했어요. 마님, 유모랑 교육 마마(예절, 법도를 가르치고 주인의 일상생활을 돌보는 마마) 말고도 집에 사람이 더 필요해요. 처음에는 식구라야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뿐이라 우리 네 명으로 충분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살림이 커지니 식구도 적지만 하인도 부족한 게 바로 느껴지지 뭐예요.”

혜연이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엽연채는 화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설렁설렁 대답했다. 혜연과 청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청유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님이 이렇게 하루 종일 화본만 보시니 도련님께서 자라 과거를 치르는 대신 화본을 쓰신다 할지도 몰라요.”

엽연채는 이 말을 듣고 깔깔 웃었다.

“화본이 어때서? 화본도 좋지. 책 쓰는 사람들은 참 대단하지 않니?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잖아.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못한 직업이 아니란다. 게다가 아들인 줄 어떻게 아니? 딸일 수도 있지.”

“아가씨라면 마님처럼 매일 집에서 화본만 보시겠지요.”

청유는 제 말에 제가 웃음이 터졌는지 ‘풉’ 소리를 냈다.

“알았다, 알았어. 밖에 나가서 좀 걷자. 그만 볼게.”

엽연채는 책을 탁자 한편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화본을 들여다본 지도 꽤 됐다 싶은 것이었다. 어릴 때 외출할 기회가 적어 친구를 만날 기회도 남들보다 적었던 게 아쉽기도 했다.

‘앞으로 아기가 태어나면 자주 밖에 데리고 다녀야지.’

“그럼 마님, 지금 얼른 나가서 많이 걷다 오시지요.”

청유는 냅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엽연채의 마음이 바뀌어 또다시 평상에 드러누워 화본을 보겠다고 하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나갈 요량이었다.

엽연채가 청유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는데 소월이 들어왔다.

“셋째 마님, 측비 마마가 왔습니다.”

엽연채는 멈칫했지만 곧 입매에 조소를 걸었다.

“오늘은 못 나가 보겠구나.”

“올 것을 알고 계셨잖아요.”

청유는 이렇게 말하며 눈을 번득였다.

“측비 마마 혼자 오셨니? 주인마님은?”

혜연이 소월에게 물었다.

“마님은 보이지 않고 측비 마마 혼자 춘산과 녹지를 데리고 오셨습니다.”

소월의 대답에 청유는 조금 미심쩍단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매번 모녀가 함께 일을 꾸미더니, 오늘은 이상하네요.”

“그 사람이 무슨 염치로 오겠어.”

혜연은 엽연채를 부축해 일으켜 앉히며 이리 말했고, 소월은 조용히 엽연채의 잔에다 차를 따랐다.

곧 밖에서 여종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고 주묘서가 춘산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엽연채는 아름다운 눈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측비 마마, 시간이 나시면 집에 가서 어머니와 더 시간을 더 보내지 않으시고요. 요즘 집에서 적적히 지내시는 것 같던데요.”

주묘서는 원망과 노여움이 솟구쳐 목에 턱 걸리는 바람에 바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뒤에 있던 춘산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마님은 벌써 뵙고 오는 길입니다. 마님은 악녀에게 미혹됐다면서 몹시 후회하고 계십니다. 하도 마음이 괴로워 병이 나셨는데도 셋째 마님께 사과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셔서 저희가 이리 오게 됐습니다.”

엽연채는 눈도 들지 않고 얘기했다.

“사과한 다음에는 또 나를 무슨 함정에 빠뜨리시려고? 하, 이미 몇 번이나 겪어 봤잖나. 당신들의 사과와 화해는 모두 입으로만 하는 소리라서 돌아서면 또 나를 모함할 게 불 보듯 뻔하네. 측비 마마, 마마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복은 저에겐 없나 봅니다.”

춘산의 얼굴이 굳고 주묘서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나는… 정말 새언니와 잘 지내고 싶어요. 어머니가 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요. 갑자기 그 과부를 집에 들이시겠다기에 녹엽을 시켜 그러지 마시라는 말만 전했었죠. 얼마 후 아바마마께서 혼인을 허락하실 줄 어찌 알았겠어요. 학해 일은… 어머니가 워낙 애가 타니 새언니를 잠깐 오해한 것뿐이에요.

새언니,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걸 알아요. 그래서… 성의를 보여 드리고 싶어 찾아온 거랍니다.”

측비는 배를 내밀고 다가오면서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지금 우리 둘 다 임신 중이니 제 아들의 아내로 새언니의 딸을 맞이하겠어요!”

뜬금없는 제안에 엽연채는 하마터면 폭소할 뻔했으나 다행히 ‘푸흡’ 하고 입바람을 부는 데서 그칠 수 있었다.

주인 못지않게 황당해진 청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측비 마마, 지금 복중 아기의 혼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희 마님이 원하든 아니든 그건 둘째치고, 측비 마마도 참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마마가 아들을 낳고 저희 셋째 마님이 딸을 낳을 줄 어떻게 아세요?”

주묘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뜻이냐? 지난번 법화사에서 불공을 드릴 때 주지 스님이 내 배 속의 아기가 분명 아들이라고 하셨다. 안심하세요, 새언니. 새언니가 이번에 아들을 낳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요. 언제든 딸을 낳으면 반드시 그 애를 정비로 맞이할 거예요!”

주묘서는 다급한 마음에 자기 밑천을 다 드러냈다!

태자가 즉위하면 내 아들이 태자다! 일국의 황태자! 엽연채의 딸이 시집을 오면 그녀는 태자비, 곧 미래의 황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자리를 약속했는데 누군들 마음이 동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 당장을 모면하기 위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내 아들이 어찌 주운환 같은 천한 서출의 씨를 아내로 맞이한단 말인가.

황후가 되면 내 이 연놈들을 죽을 때까지 자근자근 짓밟아 주리라! 아니, 죽인다고 그간의 한이 다 풀릴 리 없으니 고통스럽게 살아가게 해 주마.

주묘서는 이들이 오래도록 비참하게 살아남아 자신들의 영광을 보길 바랐다.

‘혼약은……. 하, 엽연채가 딸을 낳지 못하거나 딸이 죽으면 알아서 무산될 얘기고. 정말 혼인을 한다 해도 쫓아낼 방법은 부지기수니까.’

주묘서는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엽연채를 바라보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미안해요. 저는 하나도 관심 없어요.”

주묘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지 무슨 뜻이겠어요. 재미있는 말이긴 하네요.”

엽연채는 천천히 눈을 들어 주묘서를 힐끗 보았다.

“이……!”

주묘서의 안색이 바뀌었다. 이렇게 후한 조건을 제시했는데도 걸려들지 않는다니! 뒤에 선 춘산과 녹지도 어두운 표정으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엽연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며칠 후 제 생일 연회가 있어요. 청유야, 가서 첩자를 가져와라.”

“네.”

청유가 침실로 향하자 주묘서 일행은 어리둥절해했다. 갑자기 초대를 해 준다고……?

청유는 금박 해당화가 찍힌 첩자를 한 장 들고 돌아와 주묘서에게 건넸다.

“측비 마마.”

주묘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차라 춘산이 얼른 앞으로 나와 대신 받았다. 지금 같은 때에 엽연채가 체면을 구겼다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감사합니다, 셋째 마님. 측비 마마도 꼭 참석하실 겁니다.”

엽연채는 관심 없단 듯 하품을 하며 그들을 내쫓았다.

“영 피곤하네요. 아가씨도 어서 돌아가세요.”

주묘서는 입을 꼭 다물었고 춘산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셋째 마님, 푹 쉬세요.”

춘산은 주묘서를 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수화문을 향하면서 녹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이게 무슨 태도일까요? 마마의 존귀한 어린 마마를 언급했는데도 아무 관심 없다며 첩자나 한 장 쥐여 주고 우리를 쫓아내다니요?”

주묘서는 배를 받친 채 코웃음을 쳤다.

“흥. 안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이제껏 나를 상대도 안 하다가 내가 배 속 아이들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니 생각이 바뀐 거지. 그렇다고 아양을 떨긴 뭣하니, 기 싸움 하자는 게지.”

“맞습니다. 셋째 마님도 마음이 흔들린 게 분명합니다. 자기 딸이 나중에 불리할까 봐 바로 대답을 하지 않은 것뿐이겠죠. 얕잡아 보일까 봐서요.”

춘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동조했다. 그러나 주묘서는 도리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금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있으라지. 그럼 나도 황후가 돼서 저것의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때 가서 울며불며 사정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춘산의 얼굴이 굳었다. 잘 지낼 수는 없는 걸까? 왜 늘 화를 자초하지 못해 안달인 걸까?

그러나 춘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묘서 모녀가 얼마나 엽연채 부부를 뼛속까지 미워하는지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암만 설득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게 빤했다.

주묘서 일행이 탄 마차는 곧 태자부에 도착했다.

주비양이 갈란군주를 아내로 맞은 후 태자는 주묘서에게 줄곧 냉랭하게 굴었다. 회임 중임을 핑계로 그녀의 처소에서는 잠도 자지 않고 심지어 밥도 먹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주묘서는 묘언헌으로 돌아가면서 춘산더러 수화문 밖에서 태자를 기다리라고 시켰다.

해 질 녘이 되어서 태자가 돌아오자 춘산이 반갑게 맞이했다.

“전하, 측비 마마가 전하가 가장 좋아하시는 산약압사죽山藥鴨絲粥(오리 참마죽)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태자의 차가운 얼굴에 경멸이 스쳤다. 음식 따위로 저를 불러들이려는 수작이 어찌나 같잖은지 몰랐다.

지금 조정의 일로도 충분히 머리 아픈데 갈란군주가 남편을 독살한 일로 정선제까지 경계하고 조심하기 시작했다. 계획한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몰랐다.

여기에 진씨까지 바보 같은 짓을 벌여서 엽연채의 미움을 샀다. 엽연채는 진씨를 미워했고, 당연히 그 친딸인 주묘서도 싫어했다. 주운환이 자기까지 미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구나! 잠자코 있으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틀린 생각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든 황제를 시해하는 일!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이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을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태자는 냉수를 한 바가지 뒤집어쓴 듯했다. 황제를 시해하고 보위를 차지하겠다는 마음이 적잖이 사그라들었다.

“전하?”

춘산이 조심스레 부르자 태자는 담담히 거절했다.

“됐다.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 지금 입맛이 나와 맞지 않을 것이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오늘 측비 마마께서 진서후부에 다녀오셨는데 셋째 마님이 마마께 몇 가지 요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마와 전하 입맛에 맞을 것이라 장담하셨습니다.”

춘산의 이 말에 어둡던 태자의 낯빛이 조금 달라졌다. 주묘서가 진서후부에? 게다가 엽연채가 주묘서에게 음식까지 가르쳐 줬다니, 두 사람 사이가 손쓸 수 없게 틀어지지 않았단 얘기인가?

태자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나아져 묘언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지를 부려 맡은 바를 완수한 춘산은 그를 안내하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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