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1화
금린위가 사주에서 보낸 답신이 도성에 도착했다. 채결은 서신을 받자마자 정선제의 침궁으로 가 그에게 공손히 바쳤다.
침상에 앉아 있던 정선제는 서신은 받지 않고 다만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아낸 건가?”
“아직입니다. 그러나 사주에 거의 도착했다 하니 며칠이면 진상이 드러날 것이옵니다.”
정선제가 묵묵히 손을 흔들자 채결은 서신을 내려놓고 말머리를 틀었다.
“참, 대리시에서는 이미 조사를 마쳤습니다. 갈란군주의 소행으로 판결할 수 있습니다만 폐하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선제는 그 처지고 탁한 눈을 들더니 힘없이 대꾸했다.
“우선 그냥 둬라.”
채결은 정선제가 지금 금린위가 답을 알아내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만약 사실로 밝혀지면 평왕비에게 더 알아봐야 할 것이고, 그러면 평왕비와 갈란군주의 공을 인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래, 갈란이 오일의와 주학해에게 쓴 약이 무엇이냐? 지난번에 얼핏 연지 뭐라고 들은 것 같은데…….”
“연지묵이었습니다.”
대답하는 채결의 눈썹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약은 남쪽 이민족의 물건이라 나 의정도 잘 모르는 종류라 합니다. 진서후 부인이 우연히 잡서에서 보지 않았더라면, 또 주학해 머리의 붉은 반점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군주가 또 같은 식으로 일을 벌이지만 않았으면 꼬리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선제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 약을 오일의와 주학해에게 썼으니 망정이지, 만약 자신에게 썼다면…….
예전에는 병리와 의학에 관해서라면 나 의정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과연 뛰는 자 위에 나는 자가 있었다. 나 의정이 있다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정선제의 마음 한편에 깃들었다.
“세상에는 별 기이한 독약도 많구나.”
정선제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말을 덧댔다.
“짐도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
“물론입니다. 별의별 독약이 다 있다고 합니다. 잡수시는 것 말고도 입으시는 옷과 일상 용품도 모두 조심하셔야 합니다.”
정선제는 몸을 흠칫 떨더니 주변을 경계 가득한 눈으로 훑었다. 날 선 시선이 박고가博古架(진열 칸이 많은 장식용 선반)에 놓인 분경에서 멈추었다.
“저 꽃을 너무 오래 뒀구나. 채결, 사람을 시켜 매일 신선한 것으로 바꿔 놓아라.”
“알겠습니다. 소인은 물러나겠습니다.”
채결은 명을 수행하러 밖으로 향했는데, 나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태자와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전하.”
인사를 하고는 정선제에게 고했다.
“황제 폐하, 태자 전하가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태자가 안으로 들어가 정선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바마마, 이제 기운을 좀 차리셨군요.”
태자의 두 눈이 남모르게 반짝였다. 기운 어쩌고는 그냥 하는 말이고, 정선제는 며칠 새에 훨씬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태자는 큰 기대는 품지 않았다. 지난번에 그 난리를 치면서도 죽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쇠심줄 같은 명이 끊어질 리가 있는가.
“하하, 오냐.”
반면, 정선제는 태자가 문안을 오자 기분이 썩 좋아져서 그를 반가이 맞았다. 태자는 그에게 몇 마디 한담을 건네다 본론을 꺼냈다.
“남쪽의 역병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그 장계가 서재에 잔뜩 쌓여 있습니다.”
정선제는 화병으로 벌써 사흘째 조회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역병이 돌고 있으니 급히 처리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태자에게 권한을 넘겨 관장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선제는 얼마 전까지 병으로 죽을 뻔했다가 또다시 앓아누운 참이었다. 그는 대신들의 생각을 빤히 읽었다. 자신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며 언제 붕어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걱정하고 있을 터.
그러니 이때 태자에게 조정 일을 맡긴다면 황제의 위엄을 조금씩 넘겨주는 셈 아니겠는가?
정선제는 침착하게 말했다.
“장계를 모두 가져오거라. 어떻게 할지 짐이 한번 보겠다.”
태자의 마음속에 증오가 일었다. 전에는 맡겼던 것을 지금은 맡기지 못하겠다는 것은 본인이 아직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단 소리 아닌가!
“그러면 소자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나 태자는 억분을 억누른 채 다만 이리 말하고는 밖으로 향했다. 그렇게 정선제의 침궁을 나서던 태자는 멀리서 어린 환관이 분경을 들고 오는 걸 보고 물었다.
“그걸 어디로 가지고 가는 거냐?”
어린 환관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예, 전하. 소인은 황제 폐하의 침궁에 가고 있습니다. 채 공공께서 오늘부터 매일 새로운 분경으로 바꾸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서재의 것도 같이요.”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태자는 오한이 다 들었다. 태연한 척하려 해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계속 떨리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갈란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시간 동안, 그도 팽팽 놀고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정선제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할 수 있을까 궁리를 거듭했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약을 먹이든지 하여 정선제를 그 자신도 모르는 새에 죽이는 것이었다!
태자는 정선제에게 어떻게 독을 먹여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수하에게 약을 찾아보라 시켰고, 그들 중 하나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손을 쓸 수 있다는 좋은 소식도 들은 차였다.
그런데 갈란군주가 남편을 독살한 일 때문에 정선제가 경계하고 몸을 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원하던 바를 이루겠는가!
* * *
봄이 되어 날이 따뜻해지니 버드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렸다.
그러나 갈란군주는 여전히 대리시에 갇힌 채였고, 그녀의 일은 백성들의 입에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갈란군주가 갇힌 후 평왕비는 문을 걸어 닫고 평왕부에 틀어박혔고, 오씨 가문 역시 두문불출하며 찾아오는 손님도 거절했다. 주씨 집안 역시 대문을 굳게 잠그고 하인들만 장을 보러 나올 뿐이었다. 매일같이 밖에서 친구들과 차 마시며 한담을 나누던 주 백야마저 문을 나서지 않았다.
도성 상황이 이러니 진서후부에서는 가깝게 지내던 권세가들에만 첩자를 보냈다. 첩자에는 엽연채의 생일을 맞아 조촐한 축하연을 열 계획이니 참석해 달라고 쓰여 있었다.
일상원. 진씨가 평상에 앉아 있는데 여종이 들어왔다.
“둘째 아가씨께서 감기에 걸려 문안을 드리러 오지 못한답니다.”
진씨는 차갑게 흘겨보며 짧게 대꾸했다.
“알았다.”
쨍그랑!
여종이 나가자 진씨는 들고 있던 청화 찻잔을 바닥에 힘껏 내던져 산산조각 내 버렸다.
“이 몹쓸 것!”
그날 관아에서 돌아온 후 주 백야는 화가 나서 매일 바깥채에 머물렀고, 안채에 들어와도 백 이낭이나 비 이낭만 찾았다.
그뿐 아니라 모두들 마치 자신이 죄인이나 역신疫神이라도 되는 양 피해 다니기 바빴다. 주묘화는 꾀병을 핑계로 문안도 오지 않았고 강심설은 한술 더 떠 변명도 없이 오지 않겠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끝이었다.
진씨는 성이 날 대로 났지만, 수선을 피울 염치가 없어 병이 난 척 일상원에 내내 틀어박혀 있었다.
“마님, 측비 마마가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씨는 깜짝 놀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비양을 제외하면 그녀가 지금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주묘서였는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이다!
쿵쿵쿵.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주렴이 열리고 주묘서가 들어왔다.
회임 석 달째인 그녀는 이제 티가 나기 시작해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 그녀의 작은 얼굴은 어머니가 된다는 기쁨은 찾아볼 수 없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분기탱천한 주묘서를 보자 진씨는 민망해 어쩔 줄 몰랐다.
“묘서야, 어쩐 일로 왔니?”
“왜요, 오면 안 되나요?”
주묘서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배 속의 아기가 걱정되어 그렇지. 이제 석 달째이니 잘 쉬어야 할 때 아니더냐.”
“하하, 쉬라고요? 어머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 저더러 편히 쉬라는 거세요?”
주묘서의 말끝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빽 소리를 질렀다.
“제가 뭐라 했어요! 그 과부를 며느리 삼아서는 안 된다니까, 기어이!”
갈란군주와 주비양의 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태자는 그때부터 주묘서도 싸늘하게 대했다. 그래서 주묘서는 녹지를 보내 진씨에게 말을 전했는데 그때 진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잠깐만 참으렴. 태자 전하의 냉대도 잠시다. 네 새언니가 오라비를 도와 모든 것을 손에 넣게 해 주면, 태자 전하도 다시 너를 가장 총애하시지 않겠니.”
그러나 결과적으론 주비양은 주운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주운환을 해치우기는커녕 주씨 집안 전체가 온 도성의 웃음거리만 되지 않았는가! 집안에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사람을 들여 끝도 없이 탐욕을 부리도록 놓아둔 대가로!
딸에게 비난을 들으니 진씨도 화가 단단히 났다.
“너는 내가……! 나도 너희들을 위해서 그런 거 아니냐!”
모녀간에 불화의 불씨가 커지려는 찰나, 춘산이 끼어들었다.
“마님 그리고 측비 마마, 지금은 어떻게 해야 셋째 나리 내외와의 관계를 회복할지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닷새 후면 셋째 마님의 생일 축하연이 있습니다. 연회 첩자는 이미 다 돌렸다는데 측비 마마께만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진씨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소리냐? 그게 감히!”
진씨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아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이런 상황에 하필 엽연채의 생일이라니. 부를 손님들은 다 불렀으면서 주묘서만 빼놓다니! 이건 진서후부와 주묘서가 원수졌다고 온 도성에 알리는 꼴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불만스럽다고 해도 진씨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엽연채 부부와 사이가 있는 대로 틀어졌으니 가까운 척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보세요! 앞으로 태자 전하가 저를 어떻게 보시겠어요? 저더러 태자부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으란 말이에요? 나중에 전하가 즉위하더라도 황후가 내 자리라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냐고요.”
주묘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원망을 쏟아 냈다.
“마마, 지금 와서 탓을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춘산이 주묘서를 붙들고 이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진씨를 쳐다봤다.
“마님도 곤란하신 건 압니다. 하지만 마마를 위해 한번 굽히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님과 마마 모두 평생 이렇게 지내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진씨의 표정이 변했다. 굽히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진씨는 다시는 그 천한 서자 내외가 자기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정 마마도 진씨를 설득했다.
“마님, 춘산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셋째 나리 내외와 화해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과하시지요.”
진씨는 이를 악물었다.
“사과를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그런다고 받아 주겠어? 자업자득이라면서 어떤 망신을 줄 줄 알고.”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분명히 통할 거예요.”
정 마마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며 눈을 반짝였다.
“무슨 방법?”
주묘서와 진씨가 놀란 얼굴로 정 마마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얼른 모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렇게 정 마마와 한참 소리를 죽여 상의한 끝에 주묘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출발하자.”
말을 마친 주묘서는 춘산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 마차에 타고 곧장 정륭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