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0화
이때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목덜미에 떨어지자 주 선생은 추워서 덜덜 떨었다. 그리고 양왕의 두 눈 속에 서린 냉기도 날씨 못잖게 더욱 차가워졌다.
“밑에 있는 놈들을 처리해야겠다.”
주 선생은 양왕의 냉랭한 목소리에 흠칫하더니 이내 그를 만류했다.
“저 밑을 보십시오. 적어도 이삼십 명은 됩니다.”
양왕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어두울 때 하면 된다. 길도 미끄럽고 우리가 높은 곳에 있으니까. 내일까지 기다리면 죽는 건 우리다.”
주 선생이 잠깐 멈칫하더니 눈을 빛냈다. 그렇다. 고지를 선점한 건 자신들이고 양왕은 거의 백발백중인 신궁이다! 조금 후에 높이 올라가기만 하면 원하는 누구든 죽일 수 있고 어둠을 틈타 몸을 감출 수도 있으리라.
한편, 추격병들은 쉬지 않고 산을 수색했다. 하지만 날은 어둡고 눈길은 미끄러웠다.
이런 금쪽같은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눈이 내리다니. 하늘도 무심하지, 다들 속으로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사이로 하늘을 가르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악!”
별안간 날카로운 비명이 났다. 횃불을 든 채 사람을 찾느라 여념이 없던 추격병들 여럿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들 무리 중 한 사람이 갑자기 고꾸라진 것이다.
바닥에 엎어진 사내는 벌써 화살에 맞아 숨이 끊어진 후였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양왕이다!”
추격병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산에 나무는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하늘에서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으니, 사람이 어디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통령 진신은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사람도 부족한데 이런 악천후까지 만났으니 지금이 수색의 적기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양왕을 이 정도까지 궁지로 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양왕을 잡거나 죽인다면 벼슬과 재물을 보장해 줄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니, 이것은 전에 없는 큰 기회였다.
부귀영화를 위험 속에서 얻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뜻할 터.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수색하라!”
진신이 소리치자 병사들은 떡을 먹으면서 수색을 재개했다. 그러나 또다시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또 들리더니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분노한 진신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고 곧 동쪽 나무에서 기척을 느꼈다.
“여기다!”
진신이 그쪽을 가리켰으나 다가가기도 전에 다시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병사들을 연이어 쓰러뜨렸다.
진신은 크게 분노하며 돌아섰지만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곧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대장!”
대장이 죽자 모두 놀라 횃불을 떨어뜨렸다.
“흩어져라!”
한 무리가 우르르 산을 내려갔다.
양왕과 주 선생도 때를 놓치지 않고 나무에서 뛰어내려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산을 내려갔다. 그러나 산기슭에 당도해 보니 추격병들이 벌써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을 죽인 후였다.
“전하, 우선 숨을 곳을 찾겠습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니 오늘 밤은 숨어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다.”
주 선생의 제안을 양왕이 어두운 얼굴로 거절했고 주 선생은 다만 낮게 한숨을 쉬었다.
“시선을 돌릴 흔적을 남기자꾸나.”
두 사람은 눈 위에 서쪽으로 가는 흔적을 남기고 아까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눈도 오고 날도 어두워 정말 고생스러웠다. 게다가 도중에 아직도 자신들을 쫓고 있는 추격대를 발견하면서 어쩔 수 없이 피할 만한 곳을 찾아 숨어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에 돌아갔을 때는 이미 이튿날 해 질 녘이었다.
양왕과 주 선생은 먼 길을 돌아와 몸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주 선생은 딱딱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눈앞의 오두막을 보았다. 여기 숨긴 건가?
양왕과 함께 오두막으로 들어가자 주 선생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차가운 표정의 양왕은 부서진 의자에 올라가더니 몸을 젖혀 위층으로 올라섰다.
주 선생은 서 있는 양왕을 보며 우두커니 생각하다 바로 따라 올라갔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금세 2층으로 올라간 주 선생은 양왕 곁에서 함께 굳어 버렸다. 위층은 텅 비어 있었다! 귀신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없다니?! 양왕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림 같은 얼굴에는 광폭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양왕이 아래층으로 뛰어내리자 주 선생도 서둘러 따라 내려왔다.
양왕은 어두운 얼굴로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 어지러운 발자국이 보였다. 방금 전에는 들어오기 급급해 이 발자국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
양왕은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뜬 채 쪼그리고 앉아 발자국을 면면히 살펴보았다.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자!”
주 선생이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반짝였다.
“석명촌입니다!”
두 사람은 황급히 오두막을 벗어나 석명촌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기도 전에 스무 명가량의 무리가 저 멀리서 그들을 향해 바삐 오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하배였고, 언서와 언동 형제도 그와 함께 있었다.
“전하!”
언서 형제는 격해진 목소리로 부르며 다가왔으나 양왕은 다만 하배를 차갑게 쏘아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서지 않겠다 하지 않았나?”
“사숙이 보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맏형이긴 하나 주로 결정하는 것은 사숙이고 다들 사숙의 말에 따릅니다.”
대답하는 하배의 목소리는 정말로 내키지 않는단 듯 잔뜩 성이 나 있었다.
“하.”
양왕은 코웃음을 쳤다.
저번에 하 장군 외 자리에 나온 노인은 세 명뿐이더니, 빠진 한 사람이 바로 하배가 말하는 사숙인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자리를 비웠던!
양왕은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리 중 한 남자가 끌고 있는 수레 위에 낡은 외투가 덮여 있었다. 안에 있는 뭔가를 꽁꽁 싸매 새까만 머리만 살짝 보였다.
내려다보는 양왕의 얼굴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그는 낡은 외투를 휙 걷어냈다. 눈처럼 하얀 조앵기의 얼굴이 드러나자 양왕은 노기가 치밀었다.
“조앵기!”
하배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그 전 상황을 설명했다.
“종자粽子(각종 재료를 대나무 잎 등에 싸서 쪄 먹는 요리)처럼 꽁꽁 묶인 채로 오두막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저희가 우연히 거길 가지 않았으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수레에 누운 조앵기는 정말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성싶었다. 양왕은 차가운 눈으로 하배를 보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죽으면 죽는 거지.”
하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외투를 벗어 조앵기에게 덮어 주었다.
하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황당하단 듯이 물었다.
“나중에 쓸 데가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에 죽으면 어쩔 수 없지. 신경 쓸 것 없다.”
양왕의 말에 하배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양왕 전하 같은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나도 이제껏 하 소장군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전에는 죽이라고 하더니 지금은 또 사람을 죽일 뻔했다고 탓하는구나.”
하배는 숨을 크게 쉬었다. 세상에, 양왕과는 정말 맞지 않는구나!
양왕 일행은 그대로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한 양왕과 주 선생 일행은 지난번 그 집으로 들어갔다.
양왕이 조앵기를 안아 들자 하배는 굳은 얼굴로 방 하나를 가리켰다. 양왕은 조앵기를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눈처럼 창백했다.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것 같은 하얀 얼굴로 숨도 약하게 쉬고 있었다.
양왕은 무표정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전하.”
이때, 밖에서 주 선생이 그를 불렀다. 양왕이 나가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노인이 서 있었다. 보자마자 하배가 말한 사숙이라는 것을 알았다.
양왕은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장군.”
“장군은 무슨 장군입니까.”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형님은 워낙 옹고집이라 설득이 어렵습니다. 하나 나이 먹은 우리야 그렇다고 쳐도, 젊은 아이들이 훈련한 것마저 헛수고가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따로 계획이 있다 약속하셨고 또 저 여자가 정말로 전하를 따른다면 전하를 믿어야지요.”
“이해해 줘서 고맙습니다.”
양왕과 말을 주고받은 후, 노인은 인자한 얼굴로 하배를 불렀다.
“가거라! 양왕 전하를 도성까지 호위해라!”
하배는 낮게 신음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전에, 본왕은 먼저 사주沙洲로 가 일을 보고 도성에 갈 것이다. 추격병이 있으면 하 소장군이 따돌려 주게.”
벌써 임무를 주다니, 하배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숙의 말대로 일단 따르기로 결정했으면 복종하고 믿을 수밖에.
“이 여인은 우선 여기 두시지요. 아니면 사주까지 데려가시겠습니까?”
“우선 여기 두지요.”
노인의 제안에 양왕이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이들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 자신이 없는 틈을 타 조앵기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더욱이 사주의 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중병까지 앓고 있는 여자를 데리고 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노인은 양왕과 몇 마디 더 나눈 후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시키고 지팡이를 짚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노인이 살고 있는 집. 뜰에 나이가 지긋한 한 남자가 앉아 있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헛기침을 했다. 하 장군이었다.
노인은 맞은편에 앉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우리 노인네들의 고집 때문에 아이들 앞길을 막으면 안 되잖소. 그리고 정말 그렇게 못 미더워서 아이들이 따를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호송은 한번 해 줍시다! 앞으로 아이들이 쓰지도 못할 능력인데, 한 번쯤은 실력을 펼쳐 봐야 나중에도 여한이 없겠지요!
그리고… 그분을 생각해 마지막 정으로 그 아이를 도와주는 셈 칩시다. 이렇게 해야 아쉬움이 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 장군은 일순 움칫하더니 곡주 한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목이 화끈거렸다. 어찌 된 일인지 눈까지 쓰려 왔다.
하 장군은 노인을 차갑게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결국 돌아온 셈이군!”
노인은 하 장군의 말에 기가 차 웃었다.
“성을 내긴 왜 내요? 형님이 보낸 거면서!”
하 장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됐으니 가! 가서 내 잠자리나 좀 준비해 줘. 우리 집은 손님들한테 내줘서 잘 데가 없어.”
“하하하, 그럽시다.”
노인은 웃으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