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9화
“이랴!”
말발굽 소리가 작은 마을을 울리면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양왕은 매섭게 채찍을 휘둘렀고 품속의 여인은 덜덜 떨었다. 뒤따르는 호위무사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양왕의 머릿속에 하 장군 일행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조앵기를 죽여라…….
하하. 생각하다 보니 양왕은 냉소를 참을 수 없었다. 조앵기는 나의 것이다. 죽이란다고 죽일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신하 주제에 감히 군주를 압박하다니, 본왕의 위엄은 안중에도 없단 말인가!
그때, 누가 번개처럼 다가와서 보니 길을 알아보러 갔던 수풍이었다. 한데 채찍질하며 달려오는 얼굴이 창백했다.
“전하, 진신 놈이 동쪽에서 이리 오고 있습니다!”
주 선생과 언서의 안색이 달라졌다. 진신은 계속해서 그들을 쫓던 군대의 수장이었다.
양왕은 힘껏 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었다.
“가자!”
몸이 홱 한편으로 쏠리자 조앵기는 양왕의 옷자락을 꽉 그러쥐었다. 놀라서 그의 품속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지만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런 추격전이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뒤로 말발굽 소리와 소란스러운 인기척들이 들려왔다.
“공격!”
양왕은 고함과 함께 말 옆에 걸어 두었던 화살을 꺼내 들고 몸을 돌렸다.
뒤로 도는 바람에 그가 두른 외투가 바람에 휘날렸고 조앵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십수 명의 기병이 자신들 뒤를 쫓고 있는 모습은 똑똑히 보았다.
언동 일행은 칼을 빼어 들고 접전을 벌였다. 양왕은 침착하고 냉정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겨 댔고 예리한 화살이 날아가 단번에 투구를 쓴 중년 남자를 쏘아 떨어뜨렸다.
“대장!”
진신을 따르던 병사들이 크게 놀라 소리쳤지만, 언동 일행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전하, 먼저 가십시오!”
언동이 뒤에서 소리를 치자 양왕은 채찍질을 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부하들과 추격대의 접전이 등 뒤로 점차 멀어졌다.
양왕은 이를 꾹 깨물었다. 격렬하게 달린 탓에 말은 그와 그 앞에 앉은 사람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요동쳤다. 조앵기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입술을 꼭 깨문 채 울음소리도 감히 내지 못했다.
말은 어느새 나뭇잎 하나 없이 벌거벗은 숲 근처에 도착했고 등 뒤의 싸움 소리는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저 앞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말발굽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양왕의 안색이 변했다.
또 몰려오는구나! 앞에 이런 추격병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온통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최악을 상정하자 양왕의 낯빛이 더욱 안 좋아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조앵기는 그의 몸에 기대 미동도 않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양왕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월의 바람은 아직 찼고 벌거숭이 나무들 위로는 눈부시게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일순 양왕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더니 그는 채찍을 휘둘러 숲을 벗어났다.
양왕 품속에 안겨 있는 조앵기에게는 혹독한 추위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외투에 둘러싸인 채 옷섶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얼마나 흔들렸는지 드디어 말이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양왕은 조앵기를 끌어 내렸다. 조앵기의 굳은 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껍게 쌓인 눈 위로 쓰러졌다.
“앗……!”
눈밭으로 쓰러지면서 조앵기의 굳은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수북하게 쌓인 눈 속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가는 2층 오두막이 보였다. 한데 여기저기 허물어진 것이 눈보라가 치면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쌓인 눈 속에 파묻힌 조앵기는 팔다리를 잘 가누지 못하고 낑낑댔다. 그동안 양왕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자신의 예측대로, 방금 본 추격병들은 그들 몇몇이 다가 아닌 듯했다.
조앵기까지 데리고는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양왕의 얼굴이 한층 냉기가 서렸다.
조앵기는 한동안 기를 쓰더니 결국 눈밭을 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빠져나오기도 전에 양왕이 다가가 한 팔로 그녀를 들쳐 안고 앞에 보이는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조앵기는 그가 저를 틀어쥐다시피 한 게 너무 아파 입술을 깨물었지만 양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두막에 들어가 보니 큰 방이 나왔다. 눈 닿는 곳마다 모두 낡아 빠진 것이 얼마나 오래 방치된 곳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쪽에는 반 층 위로 통하는, 마찬가지로 오래된 좁은 계단이 나 있었다.
양왕은 조앵기를 바닥에 홱 던졌다.
조앵기는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얼른 바닥에 꿇어앉아 양왕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녀는 하얀 얼굴을 들어 눈물을 머금은 큰 눈으로 양왕을 바라보았다.
“하하…….”
얼음장 같은 양왕의 얼굴에 차디찬 웃음이 걸렸다. 그는 조앵기의 턱을 들어 올리나 싶더니 한 손으로 조앵기의 두 손을 잡고, 한 손으론 그녀를 일으킨 다음 바닥에서 나무 덩굴을 주워 그녀의 손을 묶었다.
조앵기는 경악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뭐 하시는 거예요?”
“움직이지 마! 여기서 가만히 본왕을 기다려라.”
양왕은 조앵기의 두 손을 등 뒤로 향하게 묶고는 그녀를 다시 바닥에 눌러 앉혔다. 이어 무릎을 그녀의 허리에 받치더니 이번엔 그녀의 발을 묶기 시작했다.
“아아악……!”
조앵기는 몸부림치며 애걸했다.
“가만있을게요, 말 잘 들을게요.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릴게요……! 전하, 묶지 마세요… 무서워요……! 제발 묶지 마세요, 네?”
“안 돼. 묶어 두지 않으면 도망갈 것 아니냐.”
양왕이 차갑게 웃으며 줄을 힘껏 당겼다.
“아니에요, 아녜요! 안 그래요! 절대! 전하, 전하!”
손발이 줄에 단단히 고정되어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조앵기는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고 울부짖었다. 다친 들짐승처럼 우짖고 또 부르짖었다.
“조용히 있거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양왕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까지 꽉 틀어막아 버렸다. 손발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리도 낼 수 없게 된 조앵기는 이젠 제 뜻대로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멍하니 양왕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밖에는.
양왕은 조용해진 조앵기를 들쳐 안고 반쯤 드러난 2층으로 올라가 그녀를 구석에 내던졌다.
“꼼짝 말고 여기 조용히 있어! 아니면 거지가 주워 간다 해도 본왕은 널 찾지 않을 것이다.”
양왕은 다시 1층으로 내려온 다음, 계단을 부숴 한편에 밀어 두고 오두막을 나섰다.
양왕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다 이내 사라지자 오두막은 고요에 휩싸였다.
꽁꽁 묶인 조앵기는 구석에 웅크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고 끝내 그녀는 다시 꿈틀대며 발버둥 쳤다.
양왕을 따라 도성을 떠난 이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양왕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짐이고 치욕이었으니 언젠가는 버릴 게 뻔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렇게 묶어 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실낱같은 살길이라도 남겨 주면 안 된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미련하고 어리석어도 묶어 두지 않으면 어쩌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꼭 이리 해야만 했을까? 조금의 여지도 줄 수 없었던 걸까…….’
조앵기는 두려움 속에서 한참을 바둥거리느라 온몸에 기운이 쏙 빠졌지만, 저를 구속하는 것을 하나도 떨쳐 내지 못했다. 여전히 손도 발도 까닥할 수 없고, 입을 열어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몸부림을 쳤지만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깊이 한숨 쉬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내 인생다운 결말일지도 몰라.’
묶인 채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아무리 소리쳐 봐도 모조리 헛수고일 뿐인 인생.
‘이젠, 지쳤어…….’
조앵기는 죽은 듯 그 자리에 누워 버렸다.
한편, 양왕은 허름한 오두막에서 나와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한번 웃더니 세차게 채찍을 휘둘렀다.
“저기다!”
뒤에서 성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보자 기마병 네댓이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다.
“과연 양왕이군! 죽여도 된다!”
“여자도 있지 않았나?”
“무슨 상관이야! 양왕만 잡으면 돼! 가자!”
소리치며 모두들 대도를 꺼내 들었다.
양왕은 말 허리에 매어 둔 활을 잡아채더니 몸을 돌려 한꺼번에 화살 세 발을 겨누었다.
“망할, 양왕은 신궁이라 했다! 흩어져!”
기병 중 누군가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기병들은 바로 흩어졌으나 양왕이 빛나는 눈을 살짝 치켜뜨며 시위를 당기던 손을 살짝 틀자 화살의 방향이 바뀌었다. 양왕은 눈을 번뜩이며 기병들을 비웃었다.
“그건 본왕의 물건이다. 누구도 손댈 수 없다!”
핑! 하는 소리가 나며 화살 세 발이 세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혼비백산한 기병들이 미처 어떤 반응도 하기 전에 퍽퍽퍽! 큰 소리가 나더니 세 사람이 동시에 말에서 떨어졌다.
주인을 잃은 말들도 넘어지면서 울음소리가 길게 퍼져 나갔다. 화살에 맞지 않은 남은 두 사람도 죽은 동료들의 시체와 말에 걸려 낙마해 버렸다.
“이랴!”
양왕은 힘껏 채찍질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눈밭에 떨어져 엉망진창이 된 기마병 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가 자신보다 크게 다친 동료를 부축했다. 그러면서 나머지 세 명을 살펴보니 모두 심장에 화살을 맞고 즉사한 후였다.
살아남은 두 기마병은 몹시 놀라 말을 잃었다. 잠시 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방금 양왕이 ‘본왕의 것’ 어쩌고라고 했잖나. 그게 무슨 뜻이지?”
“몰라. 일단 돌아가서 대장과 합류하자고!”
기마병들을 따돌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저 멀리서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끝도 없구나! 양왕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양왕은 더욱 급히 말을 몰았다. 저자들을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떼어 놔야 했다!
내달리던 중 양왕은 자신을 수색 중인 또 다른 무리를 발견했지만 해치우지 않고 다만 계속해서 큰길을 향했다. 도중에 주 선생을 만나 함께 쫓기면서 양왕은 추격대를 남쪽으로 유인했다.
돌고 돌아 5리 정도 달린 양왕과 주 선생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산 아래에서는 온통 추격병들이 수색 중이었다.
산 위의 두 사람은 평평한 곳에 바짝 엎드려 산 밑에서 깜빡이는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 선생은 깊은숨을 내쉬며 고개 들어 양왕을 바라봤다. 양왕은 흙먼지 따위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눈부신 눈빛은 가려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예리하게 집중하는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 양왕은 계속 같은 표정이었다. 주 선생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물었다.
“전하, 왕비 마마는 어디 계십니까?”
양왕의 어두운 눈빛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죽었다.”
꼬질꼬질한 주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헛웃음이 나왔다. 예, 전하가 그리 말씀하시니 신하 된 자로서 믿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