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08화 (708/858)

제708화

쾅! 양왕이 탁자를 세게 쳤다. 그의 관옥 같은 얼굴에 서릿발이 내리듯 차디찬 한기가 서리면서 방의 온도마저 순간 낮아지는 듯했다.

“본왕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인을 마음에 품은 적 없다고!”

양왕이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양왕이 그녀에게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전하는 왜 그녀를 데리고 다니십니까?”

하배의 질문에 양왕이 대답하기도 전에 하 장군이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소신은 감히 전하의 방법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적이 내놓는 산해진미는 독이 없어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를 어미라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맞습니다.”

옆자리의 세 노인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다 떠나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가 내려 준 여인이 아닌가. 입으로는 철천지원수라 욕하면서 손으로는 넙죽 받다니. 이래서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소인배와 무에 다르겠는가.

양왕의 매력적인 얼굴이 한층 음울해지나 싶더니 그의 붉은 입이 냉랭하게 웃었다.

“노장군들이 그 도리를 알고 계시니 다시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십니까, 전하?”

“적이 내린 산해진미는 독이 없어도 먹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하나 어린 시절 억지로 제게 붙여 줬기에 그땐 원하지 않아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저에게 준 치욕인데 어찌 쉽게 죽이겠습니까. 그래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앞으로 적당한 방법을 찾아 그들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양왕이 하 장군에게 이리 답하자 주 선생이 얼른 그 뒷말을 이었다.

“저희의 본거지도 바로 그렇게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 장군의 얼굴은 더욱 냉락해졌다.

“본거지고 뭐고 간에 정씨 집안 악녀가 준 것이니 죽여야 깔끔합니다.”

하배가 굳은 얼굴로 말을 덧댔다.

“전하, 제 부친이 그분의 부하이긴 했지만 혼인하시던 날 그분은 이 군대를 해산시키셨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분의 부하가 아니니 그 명령을 들을 필요도 없고, 전하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기다리고 그 충심을 저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에 대한 마지막 의리입니다. 이 충심은 믿을 만한 것이고 소중히 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가 보시기에도 그러한 가치가 있습니까?”

“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을 죽이십시오.”

“죽이지 않는다. 본왕이 그 여인을 처리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 장군 이마에 솟아오른 핏줄이 불끈거렸다.

“좋습니다. 전하가 그러시다면 우둔한 저희가 헛되이 기다렸군요. 소씨 집안 군대가 없어진 후 저희는 갑옷을 내려놓고 더 이상 조정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양왕의 얼굴은 어두워졌고 주 선생과 언서는 흠칫 놀랐다.

하배 역시 부친의 발언에 놀랐지만 표정은 한층 결연해졌다. 자신들은 어려서부터 소 황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그녀를 동경하고 연민했다. 그녀는 한마디로 일종의 신앙이었다. 십 년을 하루처럼 고된 훈련을 감내한 것도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신앙을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있는 사람이 소 황후를 지키지 않다니…….

“흥, 전하는 그 요물에게 미혹된 게지.”

양왕은 물담배 피우는 노인의 빈정거림에 코웃음을 쳤다.

“미혹? 그 여인에게? 그 여인에게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하는가?”

양왕은 이를 악물며 부정했고 보다 못한 언서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마당에 왜 그 여인을 죽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여인을 죽이면 저희는 전하를 따를 것입니다. 머릿수는 적어도 이 아이들이 없으면 정주까지도 가지 못하실 겁니다.”

물담배 피우는 노인의 말에 양왕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본왕에게는 본왕의 처리 방식이 있다. 본왕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이는 본왕도 쓰지 않는다.”

“전하!”

주 선생과 언서는 크게 놀라 양왕에게 다가갔고 수영이 입을 열었다.

“전하, 곧 사주로 가야 하는데 금린위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들과 마주칠 수도 있는데…….”

철컹. 수영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양왕이 거칠게 허리춤의 검을 뽑았고, 선혈이 흩날리는 수영의 머리가 쿵 하고 땅에 떨어졌다.

하 장군을 비롯한 모두가 일순 말을 잃었다. 하배는 더욱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양왕을 바라보았다. 한기가 서린 남자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살을 에는 듯한 깊고 어두운 심연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제게 닿자 하배는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물론 하 장군에게 ‘담력을 키워야 하니 산적들을 죽이고 와라.’란 명을 받은 적도 있으니 다들 손에 피를 묻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 경우가 달랐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으니 놀랄 수밖에.

툭, 투둑. 선명한 피가 예리한 칼날을 따라 흘러 바닥에 떨어지며 귀를 찔러 댔다. 모두 그 쟁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양왕이 얼음장 같은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 등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절망적이기까지 한 고독이 느껴져 모두 빳빳하게 굳었다.

하 장군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내질렀다.

“과연 그분의 아들이군! 성격까지 똑같아!”

회상에 잠긴 노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지금의 정선제, 당시엔 미약하기만 하던 황자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그녀를 데리고 담벼락 모퉁이에 앉아 얘기했었다.

“장군, 그 하얀 녀석은 좋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 마. 나 그 사람 안 좋아하니까!”

“정말 안 좋아해요?”

“정말이지!”

“그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멀리하면 안 돼요? 신분도 골치 아픈 황자인데 얼굴까지 하얀 것이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아요.”

“하하하. 검술을 가르쳐 주는 것뿐이야.”

그녀는 손을 저으며 뛰어갔다. 그녀 허리춤에 매인 날카로운 검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 뒤로 햇빛이 쏟아지며 그 눈매가 흐릿해졌다. 그녀가 돌아서자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칼 위의 선홍색 머리끈만 그녀를 따라 뛰어올랐다가 이내 흐트러졌다.

검술 연습에서 꽃 피는 달밤, 그리고 혼인에서 죽음까지.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 인생이 그리 묻혔다.

“나는 그 사람과 다릅니다.”

냉랭한 목소리가 사람들을 어두운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하 장군을 비롯한 전원이 고개를 들어 양왕의 서릿발 날리는 얼굴을 바라봤다.

양왕의 냉혹하지만 고아한 눈이 사람들을 하나씩 훑다가 하배에게서 멈췄다.

“괜히 기다렸다? 그렇다! 모두들 헛되이 기다렸다! 하지만 본왕은 너희들이 없어도 이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본왕은 무사히 도성에 도착할 것이다.”

하 장군은 흥분에 가득 차서 콧김을 뿜어냈다.

“이런……!”

반면에 양왕은 침착했고, 너무나 아름다운 그 눈엔 조롱과 경멸이 가득했다.

“장군은 이미 움직일 수도 없고 군대를 떠났으니,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는 것도 좋을 테지요. 한적하니 남산도 보이고 유유자적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하나 당신 눈앞의 이 젊은이들은? 당신의 말만 믿고 어려서부터 고된 훈련을 했습니다. 당신이 신념을 주고,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헛된 기다림이 되었군요!”

하 장군과 세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 장군은 또다시 이마에 핏대가 섰지만 할 말이 없었다. 양왕의 말대로였다. 자신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지만 기다림이 수포가 되면 이 젊은이들은 그 이상과 포부를 펼쳐 보지도 못하게 되니, 자신들도 괴로웠다.

그때 하배가 크게 반박했다.

“당신이 따를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왕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너희가 군인이 되고 싶다면 응당 그러한 혼이 있어야 한다. 본왕이 처리할 때가 올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지만 너희는 본왕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는데 어찌 충심을 논하느냐.”

하배의 까만 얼굴이 이지러졌다.

“너희들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할 뿐이다. 너희가 없다면 본왕은 그저 조금 더 고생을 할 뿐이지. 도성의 황위는 본왕의 것이다! 그리고 본왕 없이는 너희는 헛수고를 한 것에 불과하니, 평생 여기서 농사나 짓거라! 가자!”

말을 마친 양왕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고, 주 선생과 언서는 멈칫하다 양왕의 뒤를 따랐다.

하배는 양왕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고, 하 장군은 더없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물담배를 피우던 노인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곤 하 장군을 다독이려 했다.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지. 전하가 왕이고, 주인이야! 약속하신다니 우리도 믿어 보자구.”

“나가, 자네도 나가게!”

그러나 노한 하 장군은 그를 내쫓았다.

* * *

양왕과 주 선생 일행은 마을 입구로 향했다. 앞서가는 양왕의 전신에서 한기가 흘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아도 주 선생과 언서가 어떤 표정일지, 어떤 마음일지 알았으나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을 입구. 언동과 수시는 무너진 담벼락 아래 아무 표정 없이 서 있었다. 조앵기는 돌 더미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을 내려뜨린 채라, 칠흑 같은 머릿단만 보였다.

그녀를 보자 양왕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그녀를 죽이라던 목소리가 하나, 둘 떠올라 더욱 화가 났다.

조앵기는 멀리서도 그의 냉랭한 시선을 느꼈고 그러자마자 작은 몸이 떨려 왔다.

“전하…….”

양왕의 그린 듯한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양왕은 조앵기를 들어 올렸다. 양왕에게 들린 그녀는 신음했지만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를 따라나선 이후로 몇 번이나 이렇게 짐짝처럼 들렸는지. 진작에 적응한 후였다.

양왕은 말에 올라타 단숨에 그녀를 앞에 앉혔다.

언동 일행은 잠시 멈칫했고, 개중 언동이 뒤를 돌아보며 모두의 의문을 입 밖에 내었다.

“전하, 소씨 집안 부하들은요?”

양왕은 다만 냉랭하게 대꾸했다.

“본왕에게 완전히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본왕도 원치 않는다.”

언동과 수시는 깜짝 놀랐다가 곧 마음이 무거워져서 양왕 앞의 조앵기를 쳐다봤다. 조앵기는 그들의 냉랭한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들자 놀라서 양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이 옷섶 안까지 들어갈 판이었다.

“가자!”

양왕이 일갈하며 채찍을 세차게 후려치자 그의 준마가 날 듯이 달려 나갔다. 나머지 일행은 잇따라 말에 올랐다. 이 길을 떠난 이후로 조앵기 문제로 양왕과 대립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지키는 것과 두 사람을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물론 모두 양왕에 대한 충심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람들인지라 성패와 상관없이 목숨을 바쳐 양왕을 지킬 것이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계속 양왕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 때문에 양왕은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더욱이 앞으로의 길은 점점 더 위험해질 것이다……. 생각을 하던 호위무사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고 조앵기를 보는 눈빛에는 적대감이 점점 강해졌다. 항명을 하더라도 그녀를 죽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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