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7화
양왕의 두 눈이 살짝 빛났다. 주운환은 자신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이자들이 우러러보는 여장군의 외손자였다. 하지만 하 장군으로부터 완전한 충성심을 얻기 전까지는 밝힐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게 마지막 전투였지요.”
한편에 서 있던 마른 노인이 물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하 장군은 한순간에 현실로 끌려온 기분이었다. 그의 눈에 상심이 스쳐 지나갔다.
“소씨 집안에 일이 생긴 것을 일 년이 지난 후에야 들었습니다. 그분께서 귀양 간 곳을 찾고 나니 소씨 집안은 이미 복권이 되었고 전하는 이미 도성으로 보내지신 후였습니다.”
그에 그저 짐을 싸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소씨 집안이 복권되었다는 것은 곧 소씨 집안과 소 황후를 대신해 복수할 필요도 없어졌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주 선생은 그들에게 이후의 일을 들려주었다.
“복권이 되고 전하도 도성으로 돌아오셨다고는 하나, 도성에서 하루도 편히 지내신 날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 망할 황제가 얼마나 도량이 넓은지 이야기했지만, 실지로는 모두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황제는 평소 전하께 많은 것을 하사했지만 그 또한 정말 하사품에 불과했지요. 전하께 그림 한 폭을 내려 주면 태자에게는 응성을 지키는 풍씨 집안을 하사했으니까요. 전하께 마을을 하사하면 태자에게는 오성병마사를 줬습니다.
태자가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해도 망할 황제는 언제나 태자를 감쌌습니다. 작년 동짓달엔 태자의 장애물을 없앤다며 전하께 태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를 씌웠습니다. 전하가 이 일을 미리 알고 도성을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손 쓸 틈도 없이 동주 황릉에 연금되셨을 겁니다.”
“뭐라고요?”
하 장군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이곳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촌이었다. 하 장군을 비롯한 이들은 자연히 도성의 상황을 상세히 알지 못했다.
게다가 소 황후가 정선제 같은 사람과 혼인을 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것도 양왕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양왕이 도성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는 것을 대략 알고 있음에도 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정선제가 감히 죄까지 뒤집어씌우다니! 다행히 양왕의 생명을 건드리지 못했으니 아직 정의가 조금은 남아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지금 황후가 정씨라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양왕이 하 장군에게 대답했다.
“흥!”
하 장군은 격노해 하얗게 센 눈썹이 살짝 떨렸다.
“아첨꾼 정가 놈들. 그때는 이름도 못 내밀었습니다. 별짓을 다 해서 우주禹州 같은 노른자 땅을 얻은 것이죠!”
우주는 북연과 인접한 국경 지역이라지만, 북연은 늘 가난한 데다 전쟁을 벌일 배짱도 없는 나라라 실상 우주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한가한 곳이었다. 정씨 집안은 그런 곳을 지키면서 나라를 보위한다는 명성까지 얻은 것이다.
“소씨 집안이 흥성할 때는 매년 우리 소저가 대군과 함께 조정에 들어갔었습니다. 여장군인 우리 소저를 초청하는 연회가 끝도 없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 가면 정씨 집안 이소저가 자신도 국경을 지키는 장군의 딸이라며 친한 척을 해 대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요!
게다가 걸핏하면 여자들끼리의 연회를 열어 우리 소저를 초대했었습니다. 도성 사람들 중에는 우리 소저가 남자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여장부라 칭찬하는 이도 있었지만, 소저가 여인의 도리도 하지 않고 남자들 밥도 안 차려 준다고 흉보는 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소저와 정씨 집안 이소저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 다 장군의 딸이니까, 소저가 좀 잘생겼고 싸움을 할 줄 안다는 것을 빼면 나머지는 죄다 정씨 집안 이소저만 못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 소저는 대범해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으셨지요. 장군이 문인이나 학자와 문장을 겨루지 않는 것처럼, 소저도 정씨 집안 소저와 여성미를 겨루지 않으셨습니다!
소저 생각대로지요. 남들이 정씨 집안 이소저를 더 높이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두 사람은 가는 길이 판이한걸요. 어떻게 해도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양왕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지 주먹을 꼭 쥐었다. 정씨 집안 이소저는 지금의 정 황후였다.
결국 모후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마음이 잘 맞는 황자와 혼인했다. 황자가 황제에 즉위한 후 여장군은 그를 위해 갑옷을 내려놓고 탕을 끓여 주었는데 그는 또다시 세상이 칭송하는 정씨 집안 여식을 맞이했다!
‘정 황후……. 끝내 황후 자리를 쟁취해 내다니, 그 점만은 높이 사야겠지.’
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것은 아무도 모르던 그 황자이다! 양왕의 차가운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도성의 일은 이미 적당히 처리해 두었습니다. 다만 도성으로 돌아가기엔 위험이 크고 사람도 부족하여 장군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이리 찾아왔습니다.”
하 장군은 양왕이 자신들을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도울 계획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대해 알려 주었다.
“저희 노인네들은 이제 움직일 수도 없지만 마을에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수는 적지만 모두 믿을 만합니다. 제 자랑 같지만 결코 정규군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정말 잘됐군요.”
주 선생의 눈빛이 조금은 격해졌다.
과연, 충심이 강한 부하들은 자신의 그 충심을 후세에 계승하기 마련이었다.
주운환을 따르는 여한 형제도 원래는 주씨 집안을 따르는 장군의 아들이었다. 주씨 집안이 몰락한 이후 가문을 따르던 이들은 대부분 흩어졌으나 충심 강한 부하들 일부가 곁에 남은 것이다. 그러나 주 백야는 일이 커지는 것이 걱정되어 기어이 그들도 내보냈다.
그런데도 양 장군은 죽으나 사나 자리를 지켰다. 진씨는 몹시 곤란해하면서 주씨 집안은 노비가 아닌 바에야 쓸데없는 사람을 거두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노비는 이미 충분하고 더 이상 사람을 살 돈도 없다면서 몸값도 월급도 받지 않고 먹여 주기만 하면 되는 노비가 아니면 필요 없다고 했다.
양 장군은 워낙 고지식한 사람인지라 두 아들을 주씨 집안에 팔아 자식들을 모시게 한 것이었다. 주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면 주씨 집안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당부하면서.
여한 형제는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지만, 누구를 모셔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주비양은 틀렸고 주종과는 난봉꾼이었다. 그에 셋째 도련님인 주운환에게 눈을 돌렸는데, 신분은 가장 떨어졌지만 한눈에 봐도 그가 제일 정상적이었고 외양도 수려했다. 그래서 주운환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는데, 이들이 아니면 주운환은 시종도 없을 뻔했다.
하 장군 역시 자식들에게 이러한 충성심을 물려준 것이다.
하 장군은 소 황후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슬프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 기억되기를 원했다. 자기 대에서 안 되면, 다음 대에서라도! 언젠가는 자신을 떠올릴 날이 있을 것이다!
“하 장군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양왕은 손을 모아 공수했다.
“전하, 예의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눈이 조금 붉어진 하 장군은 급히 양왕을 부축하더니 하배를 불렀다.
“하배, 형제들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하배가 나가려다 말고 갑자기 발을 멈췄다.
“그런데…….”
“편히 말씀하시게, 하 소장군.”
주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자 하배가 대답했다.
“저희 형제들은 몇 년이나 힘들게 수련했으니 이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저희는 오늘 이런 기회가 오길 손꼽아 기다렸습니다만, 양왕 전하께서 준비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이다.”
양왕이 확답을 돌려줬는데도 하배는 말을 이었다.
“소인은 양왕비가 정 황후가 들인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양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슨 소리냐?”
양왕의 말투가 날카로워지자 주 선생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때 전하께서는 연소하고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상까지 입으셨으니, 원하지 않아도 아내를 맞이하셔야 했었습니다.”
“그건 저희도 이해합니다. 대의를 위해 치욕을 참아 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도성을 떠나실 때도 양왕비를 데리고 나오셨다 들었습니다. 소인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배의 말이 끝나자 하 장군 일행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 선생은 그들의 반응에 흠칫했으나 곧 심중을 이해했다. 이들은 소 황후에게 충성했던 사람들. 한때 소 황후와 웃으며 정을 나누었으나 결국에는 소 황후의 남편을 빼앗은 사람, 나중에는 등에 칼까지 꽂은 여인을 누구보다 증오할 터였다.
주 선생의 추측대로였다. 하 장군을 비롯한 모두는 한마음이었다. 정 황후가 내린 사람은 당연히 곁에 둘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수가 밀어 넣은 왕비가 양왕에게 도움이 될 부류겠는가? 외려 악의를 품고 있을 것이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남겨 둬서는 안 될 여인이었다.
“방금 집에 오는 길에 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 낯선 이들이 여럿 있는데 도통 뭘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그 사이에 하얗고 여리여리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손님을 맞이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계속해서 양왕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여인이 바로 소문이 무성한 양왕비지 않겠습니까?”
하배의 냉랭한 말에 하 장군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양왕이 양왕비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일을 듣기야 했지만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양왕이 아무리 우둔해도 그 지경은 아닐 것이다! 그 여인, 감히 그 여인을 여기까지 데리고 올 줄이야!
하 장군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전하, 제 우식의 말이 맞습니까?”
주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시나, 지난번 양왕비가 병이 났을 때 그녀를 그 마을에 버리고 왔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왕비와 동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양왕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아직 준비가 안 되신 것 같습니다.”
하배의 낯에도 냉락한 기운이 감돌았다.
흥분해서 일어난 하 장군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미간의 핏줄이 울툭불툭 뛰었다. 한참 있다가 그는 겨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노신은 전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전하, 여인의 미색에 현혹된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 여인을 남겨 둬서는 안 됩니다!”
다른 노장군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 마디씩 충언을 했다. 양왕의 수려한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장군들의 생각이 지나치십니다. 본왕이 어찌 그 아둔한 여인을 좋아하겠습니까!”
자신이 부탁을 하러 오긴 했지만 이건 그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전하께서 친밀하게 부르시는 것이 굉장히 가까운 듯하군요.”
물담배를 피우는 노인은 화가 치미는지 일어나서 눈을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