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06화 (706/858)

제706화

“촌장님.”

아이가 사탕을 우물대며 부르자 노인은 아이를 보고 알은체했다.

“뭘 먹고 있니? 어, 돈이 어디서 나서 사탕을 샀어? 아버지 돈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그러더니 찰싹, 아이의 엉덩이를 두어 대 때렸다.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저기 저 할아버지가 준 거예요.”

깜짝 놀란 아이가 황급히 변명하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낯선 노인이 서 있었는데, 비록 평범한 무명옷 차림이었으나 고아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주 선생은 미소를 띠며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하 장군.”

노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누구십니까?”

노인은 낯선 일행을 훑어보다 마지막으로 수려한 외모의 젊은 남자에게 시선이 닿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들은……!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노인의 형형한 시선이 양왕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양왕은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지만 그린 듯한 눈매에는 고결하고 냉혹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양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옛 기억이 해일처럼 밀려든 탓이었다.

마을의 촌장인 백발노인은 주 선생의 말대로 하씨 성의 장군이었다. 오래전, 소씨 집안 노장군을 따라 서북을 지켰던 장수였다.

소 황후가 열네댓 살 정도이던 소녀 시절, 서북 지방의 거친 남자들 틈에서 자란 그녀는 단장보다는 군장하기를 좋아했다. 그만치 활달한 장난꾸러기였다.

그러나 서북은 드넓고 지키는 사람은 적었다. 여기저기에서 적의 공격이 산발적으로 있곤 했다. 소 노장군은 어린 딸자식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그녀를 불러 호위병 백 명을 직접 고르게 했다. 그녀가 고른 사람 중에 하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갓 입대한 말단 병사에 불과했다.

하 장군을 비롯한 호위병이 본래 맡은 임무는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소저가 적군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게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백 명의 병사를 얻은 그녀는 겁도 없이 이들을 데리고 서노의 기마병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몇 차례의 작은 전투 후, 소 황후는 어린 나이임에도 군사를 이끄는 데 두각을 내보였다. 그녀에게 뽑힌 병사들도 깜짝 놀랐고 점점 더 그녀에게 복종했다. 게다가 그녀는 정말 유쾌한 사람인지라 함께 있으면 온몸에서 기운이 샘솟는 듯했다. 완고한 고집불통 노장군보다 훨씬 나았기에 노장군이 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해도 원하지 않았다.

소 노장군은 딸의 재능을 보자 그녀를 가둬 둘 수 없음을 깨닫고 아예 군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친위대도 백 명에서 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몇 차례의 큰 전투를 치렀고 그녀는 족족 대승을 거둬 대제의 전설이 되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여자는 대제의 장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황제는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장군에 봉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 중 하나가 하 장군이었다.

소 황후가 비록 정식으로 장군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서북의 반을 평정한 영웅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뜻밖에 아무도 모르는 황자와 혼인했다.

하나 아무리 아무도 모르는 황자여도 황자는 황자. 황제 집안의 며느리가 칼을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소 황후의 친위대는 해산되었다. 더 이상 그녀를 따를 수 없어 상심한 하 장군은 아예 퇴역하고 귀향했다. 당시 소 황후 휘하에 있던 군사 천 명 중에는 하 장군처럼 고향으로 돌아간 이가 꽤 되었다.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은 하 장군을 따라 터를 잡기도 했고, 그 외에는 서북으로 재배치받았다.

세월이 흘러 무명의 황자는 황제가 되었고 소씨 집안의 영웅은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소씨 집안이 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황후를 폐했고, 그녀를 도성 밖으로 귀양 보냈다.

소식을 들은 옛 부하들이 동주를 찾았을 때는 소씨 집안은 복권되어 있었지만 황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녀들을 황제가 다시 도성으로 데려간 후였다.

그 이후로는 조정의 일은 하 장군도 드문드문 바람결에 들을 뿐이었다. 듣자 하니 황제는 넷째 황자를 몹시도 총애하여 좋은 것은 모조리 그에게 주려고 하고, 혼례도 일찌감치 시켜 주었다고 했다.

하나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하 장군의 마음은 몹시도 복잡했다. 양왕이 내쳐지지 않고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면 하면서도 그가 모후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음을 쓰는 것은 이 정도까지만이었다. 하 장군을 비롯한 소 황후의 친위병들은 다시는 황가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양왕은 그녀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황제의 아들이기도 했으니까.

작년 십일월 양왕이 태자에게 독을 써서 결국 도성에서 도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 장군은 다시 사람을 풀어 사정을 알아봤다. 이후로는 양왕이 어쩌면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매력적으로 빛나는 얼굴은 소 황후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특히 저 눈에 품은 기개는 소 황후의 그것이었다.

양왕을 바라보는 하 장군의 눈에는, 그 시절 아름답고 우아했던 여인이 되돌아온 양 감동이 차올랐다. 다만 양왕의 눈빛은 소 황후에 비해 훨씬 냉혹하고 무정했다. 그러나 하 장군은 오히려 이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앞날을 도모하려면 인정 같은 것에 매이지 않아야 했다.

“당신이 바로…….”

하 장군의 눈가가 절로 붉어졌다.

그가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말로 떡하니 나타나니 하 장군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자신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양왕이 안다는 건, 그녀가 자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양왕은 황제의 아들이지만 그녀의 아들이기도 했다! 자신을 비롯한 여기 사람들은 소 황후의 친정 식구나 마찬가지였다. 외손자를 예뻐하지 않는 외가가 어디 있겠나.

“아버지! 아버지!”

그때 스무 살 정도 된 남자가 멀리서 뛰어왔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체격이 우람한 장정이었다.

“마을 밖에 낯선 이들이 있습니다. 이건…….”

남자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집 마당에 비범한 사람들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멍청한 놈,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냐. 어서 와 전하께 인사 올려라.”

하 장군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전하? 젊은이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양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양왕과 주 선생 일행이 그를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강이 제대로 잡혀 있는 걸 보아하니 소씨 집안 군대는 아직 쓸만할 성싶었다.

“하 장군과 하 공자, 그리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양왕이 이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배야, 둘째 삼촌이랑 사람들을 불러와라. 지하실에서 술도 몇 동 가져오고.”

“네.”

하배는 하 장군에게 대답하고 즉시 밖으로 나갔다. 하 장군은 손을 모으면서 양왕을 방으로 안내했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 앉으시지요. 누추한 곳이라 죄송합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하 장군.”

답례하는 양왕의 뒤를 따라 주 선생 등도 집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농가인 하 장군의 집은 정면에 세 칸짜리 본채가 있고, 양옆에 각각 두 칸짜리 곁방이 딸린 조그만 삼합원이었다.

하 장군이 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전하.”

“장군, 서 있지 말고 같이 앉으시지요.”

하 장군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고 양왕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예전에 들어 보긴 했으나 장군이 정말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 장군은 잠시 아래를 보며 조용해졌다가 이리 대꾸했다.

“어마마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모후는 진작에 돌아가셨습니다. 모두 누님이 제게 알려 주셨지요.”

양왕의 대답에 하 장군은 잠시 멈칫했다가 소 황후가 굉장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누님이 모후는 대단한 분이셨다고 하더군요. 휘하에 오성장五星將과 칠마제七魔蹄를 거느리셨다고요.”

양왕의 이 말에 하 장군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오성장 칠마제는 무슨요. 그냥 놀이 삼아 하셨을 뿐입니다. 여인을 어찌 장군에 봉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부관께는 휘하에 팔용장 십이준마가 있고 서노에도 신장神將이 열이나 있는데 그렇다면 저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라시며 저희 몇 명을 골라 오성장이라고 붙여 주신 겁니다. 그때는…….”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하 장군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고, 노인의 찬란한 삶이 모두 여기 있는 듯 두 눈 역시 초롱초롱 빛났다.

양왕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주운환에게 금 타는 법을 가르칠 때 말고는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던 적이 없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이용당했고, 정선제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여러 역겨운 짓을 일삼았기에 그에겐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소위 가족이라는 정선제와는 어떻게 해도 가까워질 수 없었고 마음속에는 언제나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누님을 향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렇게 자라면서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 되었음에도 하 장군은 꽤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소씨 집안 군사이자 소 황후의 친위대였으니까.

하 장군이 옛일을 들려주고 있을 때 연배가 있는 노인 세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들이 바로 그 오성장일 터였다. 한 사람이 비는데 세상을 떠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곳에 함께 머무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들어와 조용히 한쪽에 섰다. 그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하배였다.

“용음곡은 산세가 가장 험준한 곳인데, 당시 서노의 그 멍청한 놈이 그분 활에 맞아 눈이 뒤집혔었지요.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방향이 틀어지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 목숨은 벌써 없었을 건데, 주제도 모르고! 어디 그깟 놈에게 주씨 집안이 대패하는 일이 말이나 된답니까. 전하, 제가 말씀드리는 그 멍청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하 장군은 크게 웃으며 묻자 양왕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설마 후에 서노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진국 원사 금도 대장입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옛날에는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멍청이였습니다! 그날 바람만 불지 않았으면 그분께 죽었을 겁니다. 금도 대장은 무슨, 쳇!”

하 장군은 책상까지 치면서 껄껄댔다.

“금도 대장은 결국 주씨 손에 죽지 않았습니까.”

하 장군은 가볍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서후 말씀이시죠? 문무에 모두 급제한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소씨 집안사람들은 늘 주씨 집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주정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지만 않았어도!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주운환이 있다. 단지… 충심이 매우 깊어 망할 황제의 중용을 받고 있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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