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5화
정선제가 한숨을 쉬었다. 나 의정은 자신과 십 년이 넘게 함께해 온 자였다. 특히 지난번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던 자신을 염라대왕의 손아귀에서 구한 이도 바로 나 의정이었다. 정선제는 나 의정을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무한히 신뢰했다.
“군주의 일이 아닙니까? 또 뭐가 있습니까? 아… 실언했사옵니다! 소신의 궁금증이 과했습니다.”
나 의정은 말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다.”
정선제가 손을 흔들었다.
“짐과 자네는 이미 생사를 함께 나눈 사이인데 못 할 말이 뭐가 있겠나. 진서후 일이네…….”
“진서후 말입니까?”
정선제는 평왕비의 말을 나 의정에게 그대로 전했고, 당황한 나 의정은 낮게 한숨 지었다.
“폐하, 소신은 늘 태의원에만 있어 이제껏 조정의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소신의 미견迷見으론 평왕비는 진서후를 구렁텅이로 끌어내리시려는 것뿐입니다. 지난번 군주께서 주씨 집안 어린 공자에게 독을 먹였을 때 엽연채가 대처하지 않았으면 지금 군주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평왕비께서 얼마나 진서후 부인을 미워하실지야 말해 무엇 하겠사옵니까.”
정선제는 나 의정의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운하공주 마마와 진서후의 생김새가 닮았단 점을 트집 잡으신 것 같은데, 그게 바로 모함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지난번 비적 떼 때도 같은 식으로 진서후를 음해하지 않았습니까.”
정선제는 나 의정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한차례 주운환을 오해했던 것을 생각하니 낯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나 의정은 말을 이었다.
“지금 진서후는 자리도 그렇고, 나이도 젊은데 문무에 모두 통달하였으니 질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나무가 크면 바람도 세고,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라지 않사옵니까.”
정선제가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왕비의 말이 옳단 생각을 했지만, 나 의정 말을 듣고 나니 모두 명확해졌다. 전부 다 주운환이 뛰어난 탓이었다! 모두들 주운환을 주시하지 않으면 또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아무튼 사람이든 귀신이든 곧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나 의정의 말에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의정은 그만 가 보게.”
“네.”
나 의정이 물러나자 정선제는 채결이 들고 온 탕약을 마신 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린위에 서두르라고 전해라.”
정선제는 주운환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평왕비의 말로 인해 마음에 생긴 가시를 빼내고 싶기도 했다.
물론 그는 몹시도 주운환을 믿고 싶었다. 그는 오랫동안 운하의 환생이 주운환이라고 생각했고, 소 황후를 대신해 저를 용서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주운환이 운하의 아들이라면 운하가…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했으니 소 황후는 저를 끝끝내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정선제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러니 절대 사실이 아닐 것이다!
* * *
채결은 정선제의 침궁을 나서서 바로 금린위에 서신을 보냈다.
해동청은 서신을 가지고 높은 창공을 가로질러 사흘을 날아가 한 무리의 기마부대를 내려다보다가 호리호리한 장수의 팔에 내려앉았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장수는 바로 금린위 통령 용효였다.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도성을 떠나 주운환의 내력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용효는 해동청 다리의 통을 풀어 서신을 빠르게 읽더니 부하를 불렀다.
“종이와 붓을 가져와라.”
“네.”
뒤편의 장수가 다가와 품속의 종이와 붓을 건네자 용효는 말 등에 엎드려 몇 자 적어 서신통에 넣고 해동청을 다시 날려 보냈다.
“사주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닷새는 더 가야 합니다.”
뒤에 있던 병사가 용효에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서두르라 하시니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사주로 바로 간다. 사흘 내에 도착해야 한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세차게 채찍을 휘둘렀고, 부하들이 그를 바짝 쫓았다.
군대는 빠르게 이동해 곧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바람이 따뜻하니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마을은 조용하면서도 번화했다. 거리를 가득 채운 상인들은 큰소리로 호객을 하고 사람들은 물건을 구경하는 등 왁자지껄 생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때,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금린위 기마대가 질풍처럼 지나갔고, 놀란 사람들은 황급히 숨거나 피했다. 기마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먼지만 자욱했다.
“콜록콜록……!”
“뭐야, 큰길에서 저렇게 말을 달리다니.”
사람들이 저마다 투덜댔다.
하나 장신구 좌판 앞에 서 있던 늘씬한 남자만은 말없이 돌아섰다. 그는 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군대의 뒷모습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언동이 다가와 그런 그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하, 금린위입니다.”
양왕은 그저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우리도 출발하자꾸나.”
두 사람이 걸음을 내디디려는데, 좌판을 펼친 아낙이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둘이서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더니 하나 사지를 않네.”
언동의 얼굴이 굳어졌다. 냉랭한 표정의 양왕은 잡히는 대로 토끼 목잠木簪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하지.”
“5문입니다.”
아낙은 그제야 얼굴을 폈고 언동은 동전 몇 개를 던지고 양왕을 따라갔다.
떠들썩한 큰길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잿빛 무명옷을 입은 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한 탓에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목이 드러나 보였다.
양왕이 싸늘한 모습으로 다가가 보니 조앵기가 눈을 반짝이며 자기 앞의 작은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양왕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몸을 낮추더니 혀를 찼다.
“쯧쯧, 너와 정말 닮았구나!”
조앵기는 깜짝 놀랐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작은 고양이는 웬 구정물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꼬질꼬질하고 비쩍 말라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에게 버려져 갈 곳 없는 불쌍한 작은 고양이. 바들바들 떨며 길가에 선 고양이는 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야옹거렸다.
조앵기는 새침한 얼굴로 삐죽거렸다.
“저랑 하나도 안 닮았어요.”
“안 닮기는, 하. 완전히 판박이인걸.”
코웃음을 친 양왕이 몸을 일으키며 싸늘하게 일렀다.
“가자!”
조앵기는 큰 눈이 촉촉해지더니 그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그 더러운 고양이를 안고 있자 양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키울 수 없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였지만 고양이를 안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버려!”
양왕의 노성에 조앵기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큰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름답지만 그 못지않게 차가운 양왕의 눈.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니 조앵기는 절로 몸이 떨려왔지만 고집스럽게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버릴 수 없어요…….”
조앵기는 잠시 생각하다 주변을 둘러봤다. 한 늙수그레한 여자가 집 앞에 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다. 조앵기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다가가 고양이를 건넸다.
“너무 불쌍한 아기 고양이에요. 키워 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는 멈칫했지만 뚱한 얼굴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앵기는 여자의 뚱한 얼굴과 저를 재촉하는 양왕을 번갈아 보다 서둘러 머리 위의 은잠银簪을 뽑아 여자에게 건넸다.
“이걸로 고양이를 키워 주세요, 네?”
“네, 네. 그럴게요.”
여자는 진주가 박힌 머리장식을 보자 좋아라 손을 내밀더니 새끼 고양이도 받아 안았다.
조앵기는 여자에게 새끼 고양이를 넘겨주고서야 안도하며 웃었다.
“빨리 안 와!”
양왕이 돌아서며 조앵기를 흘겨보자 그녀는 다급하게 그에게로 뛰어갔다.
조앵기가 곁에 오자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낚아채 끌고 갔다. 조앵기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계속해서 힐끔힐끔 고양이를 돌아봤다. 여자는 사근사근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양왕이 조앵기에게 조롱하듯 경고했다.
“또 돌아보면 버리고 가겠다.”
조앵기는 굳은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안 그럴게요.”
“매번 쓸데없는 짓이나 해 대고!”
양왕은 냉소하며 조앵기를 잡아당겼는데, 보니 그녀의 머리가 너무 휑했다. 그는 아무 장신구도 없는 조앵기의 쪽머리에 방금 산 토끼 목잠을 꽂았다.
조앵기가 멈칫하며 목잠을 만져 보려 했지만 양왕이 그 손을 잡아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그들이 어느 집의 작은 뜰에 도착하니 언서와 주 선생은 이미 채비를 마친 후였다.
“그 사람들은 십 리가량 떨어진 명석촌에 있습니다.”
주 선생이 말한 ‘그 사람들’이란 소 황후가 남긴 소 황후에게 충성하는 소씨 집안 군대였다. 천 명밖에 안 되지만 정예군이란 강점이 있었다.
추격대가 계속해서 양왕을 찾고 있으니, 도성으로 돌아가려면 호위해 줄 군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양왕은 말에 올라타고 조앵기를 들어 올려 앞에 태웠다.
“가자!”
일행은 빠르게 말을 몰아 머물렀던 마을에서 벗어났다.
한 시진 정도 달렸을까. 멀리 작은 마을이 하나 보였다. 산 좋고 물 맑은 그곳에서 괭이를 메고 나오는 사람도 보였다. 한눈에도 상당히 소박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양왕은 주 선생과 눈을 맞추고 말에서 내려서 언서, 언동, 수영, 수풍, 수시 등 자기 곁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양왕이 수풍을 가리키며 명했다.
“우리는 곧바로 사주砂州로 갈 테니 너는 따로 사주沙州로 가는 길을 알아봐라. 잠시 후, 저기 호양나무가 있는 언덕으로 오거라.”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수풍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사라졌다.
“주 선생, 언서 그리고 수영은 본왕과 함께 가고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린다.”
양왕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앵기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언동과 수시가 그녀와 함께 남았다. 양왕은 수영과 언서도 남겨 두고 싶었지만 모양새가 정말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혼자서 갈 수는 없었다.
양왕은 세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겁이 난 조앵기는 큰 돌에 앉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편, 마을 어귀에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었다. 낯선 이들이 여러 명이나 마을에 들어오자 아이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러잖아도 주 선생은 인상이 부드러운데 인자한 웃음을 머금으니 어떻게 보아도 호인 같았다. 아이들이 경계를 얼마간 거두어들이자 그는 가까이 다가가 계화사탕을 꺼냈다. 아이들은 벌떼같이 달려들더니 저마다 사탕을 낚아채어 입속에 욱여넣었다.
주 선생은 먹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에게 말을 붙였다.
“얘들아, 너희 촌장은 어디에 사니?”
예닐곱 살쯤 됐을까, 한 토실토실한 아이가 사탕을 씹으며 그리 멀지 않은 농가를 가리켰다.
“우리 촌장님은 저기 사세요.”
말을 마친 아이는 자기를 따라오라는 양 껑충껑충 그쪽으로 향했다. 주 선생과 양왕은 잠시 서로 마주 보다 아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백발노인이 문 앞 돌에 앉아 물담배를 피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