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04화 (704/858)

제704화

“대리시경!”

정선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장찬이 즉각 앞으로 나섰다.

“쿨럭, 쿨럭……!”

정선제는 못 견딜 정도로 기침이 났지만 대신들 앞에서 약해 보일 수 없어 꾹 참고 명령을 내렸다.

“가서 갈란의 일이 사실인지 제대로 조사하라.”

“정 부윤이 이미 사건의 증거와 증인을 모두 이관하여 왔사옵니다.”

장찬이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미 모든 도성 사람들 앞에 낱낱이 드러난 후인지라 이제는 해 봤자 보여 주기식의 조사가 될 뿐이었다.

정선제는 하마터면 정말로 피를 뿜어낼 뻔했다.

처음부터 만심에게 뒤집어씌우지만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대리시에서 직접 재판을 할 것이니 증거나 증인이 있더라도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다. 때가 되면 책임자를 불러 군주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갈란군주는 구태여 모든 죄를 만심에게 전가했고, 그 바람에 관아까지 가게 되면서 남편을 죽인 죄가 만천하에 알려져 버린 것이다. 이제는 돌이킬 수 있는 한 줌의 희망도 사라진 후였다.

정선제는 폭발할 것만 같은 분노를 겨우 누르고 쌀쌀맞게 말했다.

“모두 물러가라.”

“예.”

대신들이 일제히 물러나자 정선제는 털썩 침상에 몸을 뉘었다.

“폐하…….”

채결은 두 눈이 벌게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폐하, 어렵게 쾌차하셨는데 이 일로 고질병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폐하.”

그때 어린 환관이 들어와 창백한 얼굴로 꿇어앉았다.

“평왕비가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채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덜떨어진 놈!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느냐?”

어린 환관은 호통 소리에 눈물이 찔끔했다. 물론 자신도 이런 시국에 갈란군주 이야기를 꺼내서도, 그녀의 말을 전해서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갈란군주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 했다.

“나가라!”

채결이 소리쳤다.

“됐다, 됐어……. 짐은 아직 그 아이를 벌할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제가 먼저 난리로구나! 그리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도 궁금하구나.”

정선제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알현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린 환관은 안도하며 머리를 조아린 채 밖으로 나갔다.

이각 정도 지났을 무렵, 평왕비가 들어왔다.

평왕비는 잔잔한 무늬의 소박한 차림에 머리엔 장신구 하나 꽂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여기에 눈도 붉게 달아올라 몹시 초췌해 보이는 그녀는 정선제를 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외쳤다.

“아바마마.”

정선제는 그녀를 보자 너무 화가 나 말조차 할 수 없어 숨을 몰아쉬었다.

“왕비가 여기 오실 면목이 있으십니까! 군주가 벌인 일을 보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당신들을 믿은 게 잘못입니다! 왕비도 이 일에 함께하셨습니까?”

채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평왕비는 안색이 변했지만 감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정선제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이 아식兒息은 사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이 일의 전말을 정선제가 모조리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이대로 갈란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갈란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니까!

하니 자기 입으로 이 일을 황제에게 전해야 진상이 밝혀진 후 공로를 얼마간 인정받을 것이었다. 그리되면, 그래도 물론 갈란이 공개적으로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대신할 제물을 찾아 갈란을 놓아주게 사정할 수는 있다.

“진서후 주운환, 그자는 운하공주의 아들입니다.”

평왕비의 말에 정선제와 채결 모두 깜짝 놀랐다. 정선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 했느냐?”

“진서후 주운환이 운하공주의 아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선제는 평왕비의 이야기를 듣자 온몸이 굳어 버렸다.

“허튼소리 하지 말아라!”

“왕비는 군주의 복수를 위하여 진서후를 물어뜯겠다는 겁니까?”

채결은 흥분하여 평왕비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평왕비는 다만 입술을 꾹 깨물어 분노를 삼키고 말을 이어 갔다.

“아니, 아닙니다.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진서후의 생김새를 보십시오, 운하공주와 판박이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진서후 부인은 소 황후 마마의 물건인 구전영롱九轉玲瓏 팔찌를 끼고 있습니다. 소 황후 마마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그걸 남에게 내주었겠습니까? 분명 소 황후 마마가 운하공주에게 주셨고, 그것이 다시 며느리에게 간 것이 분명합니다.”

정선제는 흐릿한 두 눈을 부릅뜨고 고통스러운 숨을 쉬었다. 평왕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계속 나오는 운하공주와 소 황후, 모두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찢어 놓고 죄책감을 주는 이름들이었다. 정선제는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주운환이 운하공주의 아들이라고? 내 외손자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불가능한 일이다!

운하는 20여 년 전 벌써 세상을 떴고 당시 그의 두 눈으로 운하의 시신을 확인했다. 핏방울을 떨어뜨려 검사도 했는데 자신의 혈육이 확실했다. 시신으로 돌아온 이는 분명 자신의 딸이었다.

하나, 만에 하나 평왕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가 그때 죽지 않고 도성으로 돌아와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면?

만일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또 얼마나 많은 치욕을 견뎌 내야 했을지……. 이 모든 게 자신의 죄업 아닌가.

아니다, 그럴 리가 있는가! 그렇게 딸이 갖은 고생을 감내했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럴 리 없다, 절대로…….

그리고, 주운환이 정말 운하의 아들이면 곧 양왕의 외질外姪이란 소리 아닌가? 그토록 주운환을 믿었는데……. 주운환은 과연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애초에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양왕과 한패라면? 만약 그렇다면 절대로, 절대로 살려 둘 수 없었다!

생각은 이렇게 흘렀고, 정선제의 얼굴에는 때로는 고통이 때로는 살의가 스치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그 입 다무십시오!”

채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선제를 보자 크게 놀라 다급히 평왕비에게 소리쳤다.

“왕비는 요사스러운 말로 폐하를 현혹하지 마십시오!”

평왕비는 침착하게 채결을 바라보았지만 눈에 흥분이 스쳤다. 정선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인지라 한번 처단하기로 한 사람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정선제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으니 금린위는 더 많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이 주운환 모친의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것만 알아내면 된다. 거기에 주운환의 생김새와 엽연채의 그 팔찌만 있으면 정선제는 곧 주운환이 운하의 아들이라 확신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집안을 옭아맬 죄명은 찾지 못하더라도 조용히 사고로 꾸며 주운환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평왕비의 눈에 음흉한 기대가 가득했다. 때가 되면 엽연채도 험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주운환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주운환의 아이를 가진 엽연채도 당연히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아바마마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사람을 시켜 알아보면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평왕비는 이렇게 말하며 정선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정선제는 고통과 슬픔, 분노를 비롯한 갖가지 감정이 폭풍처럼 몰려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서후와 운하가 닮은 것을 네가 어찌 아느냐?”

순간 평왕비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채결이 대신 대답했다.

“폐하, 평왕비는 선황후 궁의 이등 궁녀였사옵니다.”

평왕비는 이 말이 창피해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가 궁녀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었다.

정선제는 멈칫했다가 그 일을 떠올렸다.

평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지막으로 시침한 궁녀가 회임한 사실을 알게 되어 비에 봉했고, 그때 아랫사람들이 그 궁녀의 상황을 보고했었다.

소씨 집안을 갓 복권시켜 소 황후를 그리워하고 죄책감을 많이 느낄 때여서 평왕비로 책봉하고 특별히 평왕부도 하사해 궁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게 한 것이다. 평왕비가 갈란군주를 출산한 후에도 사찰로 들어가 평왕을 위해 불공을 올리며 살게 하지 않았다.

정선제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주운환이 운하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지금 평왕비는 주인을 배신하고 있었다! 정선제는 평왕비가 너무나 역겹게 느껴져 그녀를 단박에 내쫓았다.

“당장 나가라!”

평왕비는 안색이 변했지만 도리가 없으니 그저 낭패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평왕비가 정선제의 침궁에서 나오자 그녀를 따르는 마마가 급히 다가왔다.

“왕비 마마, 폐하는 뭐라고 하십니까?”

평왕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안심하십시오. 폐하 성격에 분명 사람을 시켜 확실히 조사하실 겁니다.”

그건 평왕비도 알고 있지만 딸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이상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갈란은 어쩌고 있느냐?”

평왕비의 질문에 마마는 움칫하더니 눈치를 보았다.

“우선은…….”

“어떠한가?”

마마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자 조급해진 평왕비가 매섭게 다그쳤다. 평왕비는 어제 갈란군주의 죄가 밝혀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대로 쓰러졌고 오늘 아침에서야 깨어나 궁에 들어온 것이었다.

“어제 관아에 하옥되었고, 다시 대리시로 이관되었습니다. 소인이 사람을 시켜 대리시에 알아봤습니다만…….”

마마는 말끄트머리를 흘렸다. 평왕비는 갈란이 어떤 상태일지 대략 짐작이 갔기에 냉소를 금치 못했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구나.”

갈란군주가 총애를 받을 때는 누구도 모녀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심하세요. 군주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마마가 얼른 평왕비를 위로했다.

한편, 평왕비가 떠난 후 정선제의 침궁은 공기까지 얼어붙을 것처럼 냉랭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채결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채결, 평왕비 말이 사실이냐?”

정선제의 눈이 번쩍였다.

채결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정선제가 의심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큰일에는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인은 모르겠사옵니다.”

채결이 아무 의견도 내놓지 않자 정선제는 더욱 답답해져 눈을 부라렸다. 침상에 눕자 다시 어질어질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갑갑해졌다. 이 느낌… 또 시작이었다! 큰 병이 나려 할 때면 꼭 이렇게 힘이 빠지고 곳곳이 욱신거렸다.

“쿨럭……! 나 의정을 불러라.”

정선제는 마지막 생명줄을 붙잡듯이 맥없는 목소리로 명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채결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나 의정이 불려 와 침을 놓아 주니 정선제는 조금 나아진 기색이었다.

정선제가 깊은 한숨을 쉬자 나 의정이 말했다.

“폐하, 정양이 중요한 병이니 장기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군주의 일로 심란하신 것은 미천한 소신도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순리대로 흘러가게 두시고 걱정은 접어 두십시오.”

그의 따뜻한 충언에 마음이 다소나마 풀린 정선제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 아이 일뿐이면 좋을 텐데……. 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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