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3화
“원래 이렇게 많이 움직여요?”
엽연채는 그의 신기해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요. 매일매일 아기와 노는걸요!”
주운환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지만, 이럴 때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주운환은 몸을 숙여 엽연채를 품에 안고 머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연채.”
“네.”
“우리 연채.”
주운환은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한 번 더 입을 맞췄고, 엽연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모든 게 끝나면, 우리 응성으로 가요.”
뜻밖의 제안이었으나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흔쾌히 응했다.
“좋아요.”
주운환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상을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엽연채는 시시각각 변하는 조정 상황이 싫었다. 양왕이 즉위하면 주운환은 응성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신도 그리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었다.
“셋째 나리.”
이때, 여양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서신입니다!”
주운환은 서신 속 짧은 글을 보고 흠칫 놀랐다. 양왕으로부터의 연락이었다.
* * *
관아. 포졸들이 갈란군주를 끌고 간 후 구경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갈란군주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사람들이 계속 떠들어 대는 바람에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온 도성 사람들이 갈란군주가 남편을 죽인 일을 알게 되었다.
갈란군주는 우선 관아의 옥에 갇혔고 정 부윤은 즉시 서신을 써 정선제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어서방.
정선제는 황리목 책상에 앉아 있었고 태자는 한편에 서서 나지막하게 봄철 수해에 대해 보고하고 있었다.
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 정선제가 붓을 들어 글 쓰는 것을 보고 있었다. 양쪽으로 내려뜨린 태자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정선제는 노쇠한 나이인 데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큰 병도 앓았었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혈기 왕성한 모습으로 앉아 정무를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태자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주씨 가문에 시집간 갈란군주는 주학해에게 독을 먹인 것으로도 모자라 엽연채에게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진씨와 엽연채 사이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나 사이가 틀어졌다.
하필이면 자신의 부인이 진씨의 친딸인 주묘서 아닌가. 주운환이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는 있으나 불만과 분노를 내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데려온 사람인데 말이다!
갈란군주 때문에 주운환과 내 사이까지 멀어지게 생겼다……! 생각하다 보니 태자의 얼굴이 또 어두워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갈란군주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낯짝도 두껍게 주씨 집안에 시집가겠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이런 아수라장이 벌어질 리 만무하잖은가! 자중하지 못하고 날뛰더니 얼마 전엔 의붓아들에게 독을 먹이고 지금은 또 오 부인에게 말려들어 관아까지 가서 소란을 피워 대!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바마마라는 사람은 또 당연히 그 뒤처리를 해 줄 테지.’
“폐하.”
이때, 황급히 들어온 채결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전하를 뵈옵니다.”
황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은 잘 처리했느냐?”
황제는 말을 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요즘 우리 손녀가 정말 다사다난한 나날을 보내고 있구나. 국고에 가서 적당한 것 몇 개 골라다가 마음을 좀 달래 주거라.”
역시… 또 갈란이 주씨 집안에서 난리를 치게 내버려 두는구나! 태자의 준수한 얼굴이 경직되었고 눈에는 살의가 넘실거렸다.
“하오나… 폐하…….”
한데 뜻밖에도 채결이 창백하게 질린 채 말을 좀처럼 잇지 못했다.
“군주, 군주께서…….”
황제는 그제야 고개를 들며 눈썹을 잔뜩 째푸렸다.
“뭐 하는 짓이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고하면 될 일이지 더듬더듬 뭐 하는 게야?”
채결의 안색이 변하더니 털썩 무릎 꿇고 엎드렸다.
“용서하시옵소서, 폐하. 소인이, 소인이 폐하께서 내리신 임무를 마치지 못했사옵니다……. 군주께서는… 죄를 선고받으셨습니다!”
황제와 태자 둘 다 순간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태자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채 공공, 그게 무슨 말인가?”
채결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떠듬떠듬 아뢰었다.
“이미, 구, 군주의 죄목이 판결되었습니다. 남편 살해입니다.”
“뭐라?”
태자와 정선제는 크게 놀랐다. 판결이 나다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들도 갈란군주가 남편을 살해했을 거라고 추측은 했지만 사실 여부가 무어 중요하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는 일국의 군주인 황제의 친손녀였다!
온 대제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뒤를 봐주고 있으니 궁중이든 조정이든 그녀를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버티고 섰던 사람인데, 이렇게 휙 쓰러지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
흥분한 태자가 채결에게 다가갔다.
“만심이라는 녀석의 재판이 아니었더냐? 왜 갈란까지 엮인 것이냐?”
“이야기하자면 깁니다.”
채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부자의 위엄 있는 눈빛에 압도된 채결은 황급히 모든 일을 빠짐없이 고했다. 당시 어떻게 만심이 지목됐는지, 왜 갈란군주도 엮였는지는 물론이고, 결국 사람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갈란군주를 하옥하게 된 것까지 낱낱이 아뢰었다.
정선제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낯빛이 창백해져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폐하!”
“아바마마!”
채결과 태자가 대경실색했다.
“어서 폐하를 부축해라!”
거의 울 것 같은 채결은 다급히 정선제를 부축했고 어린 환관이 들어왔다.
몇 사람이 힘을 모아 정선제를 침궁으로 옮겼다.
정선제가 화를 못 이기고 또 쓰러지자 태자는 내심 기뻤다. 죽지도 않는 늙은이가 또 쓰러졌구나! 갈란이야 자기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다. 그렇게 못돼 먹은 여자에게는 그런 결말이 어울리고말고!
* * *
갈란군주의 일로 온 도성이 떠들썩했다. 이튿날 술집이며 찻집이며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갈란군주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군주한테는 빨리 재혼하겠다고 남편을 죽인 악녀라고 욕을 퍼부었고, 진씨를 향해서는 실성이라도 한 건지 뭘 바라고 속임수까지 써 가며 살인자를 기어이 집에 들였는지 모르겠다고 수군거렸다.
개중 간이 큰 사람이 정곡을 찔렀다.
“바라긴 뭘 바라? 군주니까 그런 것 아니야! 전에 군주가 주씨 집안 세자 부인을 모함했을 때도 폐하께서 바로 사람을 시켜 ‘달래 줄’ 물건을 보내셨잖아. 그렇게 총애를 받으니 누군들 군주를 원하지 않겠어?”
그 말이 끝나자 분위기는 더 미묘해졌다.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군주의 조부는 황제다. 그리고 갈란군주는 사람을 죽인 대역죄인이다. 손녀를 사랑하는 조부는 이 죄까지 감싸 줄 것인가?
백성들은 서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구경하는 마음이었지만 누군가 은근히 황제는 무능하고 노망이 났다는 말을 흘렸다! 남편을 죽인 죄가 모두 밝혀졌는데 그래도 손녀를 감싸 준다면, 황궁 전체가 한통속으로 썩어 어디 하나 깨끗한 곳이 없다는 뜻이라고 돌려 말했다.
궁으로 몰려가 일을 벌일 배짱은 없지만 그래도 개탄을 금치 못한 학자들은 관아로 쫓아가 옥에 갇힌 죄수를 모두 풀어 주라고 외쳐 댔다. 이 땅에는 왕도도 없고 이 나라는 벌써 무너지고 있으니 죄인들이 풀려난다고 무어가 잘못되겠느냐고 탄식을 해 댔다.
“남편을 살해한 악녀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데 소를 훔친 자나 사람을 벤 자는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정 부윤은 화가 나서 관아 문을 굳게 걸어 잠갔으나 성토하는 소리는 담벼락을 넘어 날아들었다.
정선제가 깨어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가 어렵게 눈을 뜨자 채결이 황급히 다가왔다.
“폐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태의를 불러라!”
곧 나 의정이 들어와 정선제의 맥을 보고 한참 부산을 떨다 물러갔다.
정선제는 헉헉대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갈란의 일은… 어찌 됐나?”
정신을 잃기 전 이미 어떤 지경인지 파악했지마는 그는 털끝만큼도 이 일을 믿고 싶지 않아서 깨자마자 저도 모르게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이다. 채결이 대답하려는데 밖에서 갑자기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유 재상, 여 상서, 전 상서 등 대인들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정선제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물었다.
“그들이 왜?”
“재상 대인이 말하기를 갑작스레 폐하의 병세가 위중해져 몹시 걱정된다며 뵙기를 청한다고 하옵니다.”
어린 환관이 이리 대답하자 정선제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모두 돌아가라 해라. 짐은 괜찮다.”
“하오나…….”
어린 환관은 몹시 난처했으나 차마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어 망설였다. 그런데 그가 나가기도 전에 밖에서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이윽고 조정 대신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들이 허락도 받지 않고 침궁 밖에 모여 꿇어앉자 정선제는 분노가 치밀었으나 몸이 쇠약해진 터라 차마 큰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지금 뭘 하는 건가? 짐은 괜찮으니 어서 물러가게. 쿨럭쿨럭……!”
밖에 있던 유 재상이 울먹였다.
“황제 폐하, 지난번 병마를 떨쳐 내신 후로 이런 적이 없으셨기에 소신들은 몹시 망극罔極(부모나 군주에게 나쁜 일이 생겨 몹시 상심함)하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대신들이 기다렸단 듯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대들의 마음은 짐이 잘 알았다. 짐은 괜찮다.”
“황제 폐하, 한 가지 더 있사옵니다. 갈란군주의 일로 도성 백성들의 민심이 요동치고 떼로 몰려와 관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유 재상이 갈란군주 이야기를 꺼내자 정선제는 몹시 민망해 화를 냈다.
“백성들이 뭐 하러 관아를 둘러싸고 있단 말이냐?”
“백성들이 이제는 왕도도 없다 합니다. 갈란군주처럼 남편을 살해한 악녀도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데 옥에 갇힌 죄인들은 왜 벌을 받아야 하냐며 모두 죄인을 석방하라 외치고 있사옵니다.”
정선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고얀!”
“폐하……! 갈란군주의 죄를 벌해 주시옵소서!”
“폐하, 갈란군주의 죄를 벌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모여든 대신들은 도리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정선제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짐이 언제 그 아이를 벌하지 않겠다 하더냐?”
황제의 노쇠한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놈들, 어찌 다 같이 몰려와 감히 나를 압박한단 말이냐. 나는 황제다! 황제란 말이다!’
정선제는 목구멍으로 비릿한 것이 올라왔지만 겨우겨우 집어삼켰다.
한편, 바깥에 선 태자는 조용히 두 눈을 빛내며 진노한 정선제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를 들어 보니 피를 토할 정도로 화가 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