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2화
주 백야가 할 말을 찾는 사이, 진씨가 말을 이어 갔다.
“군주는 원래 우리 며느리였어요. 우리 가문에 데려오지 못해 늘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랬는데 평왕비가 제게 얘기해 주더군요. 갈란군주가 남편이 죽은 후로 시댁에서 얼마나 불쌍하게 지내고 있는지 모른다고요. 늘 오씨 집안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하더군요.
게다가 갈란군주가 오씨 집안으로 시집간 후에 오 부인이 얼마나 잘난 척을 하던지. 몰락한 집안 며느리를 봤다고 나를 그렇게 비웃어서 울컥했었다고요. 흥,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않겠어요? 오일의의 상을 치르고 있는 갈란군주를 우리 가문으로 데려와 그 늙은 여자가 분통 터져 죽는 꼴을 보고 싶었어요. 그게 다라고요!”
진씨는 변명을 하느라 목에 핏줄까지 불거진 반면, 엽연채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볼 따름이었다.
주 백야가 말했다.
“그럼, 평왕비와 이야기 한 건 뭐요? 무슨 약속을 했소?”
진씨는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그 사람과 무슨 약속을 했겠어요? 평왕비에게 갈란군주를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한 것뿐입니다. 과부라고 괴롭히거나 섭섭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돈과 그런 약속을 하지 않는 어미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주 백야가 듣기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증오가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오 부인이 그렇게 미웠다 해도 적당히 하면 될 것이지, 오일의의 넋이 당신을 찾아와 괴롭힌다느니 하는 말은 뭐 하러 하오?”
주 백야가 또 망신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자 진씨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그 한심한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주 백야는 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정말 어리석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군! 지금 집안 돌아가는 꼴을 좀 보시오! 아직도 집에 부귀영화를 가져온다는 말을 할 거요? 가져온 거라고는 액운뿐이지 않소! 사방에 액운만 가득한 걸 보니 과부가 맞긴 맞군. 당신 머리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소!”
“뭐라고요? 나리, 정말……!”
주 백야는 살면서 이번처럼 성질이 나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진씨가 적반하장으로 더욱 화내는 것을 보자 순간 움찔하여 고개를 돌렸다.
“셋째야, 네 어미 좀 봐라…….”
주운환은 담담히 대답했다.
“아버지, 일이 해결되었으니 저와 연채는 진서후부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셋째야… 네 부인이 임신한 지 이제 곧 6개월인데 무슨 소리냐. 기왕 여기서 지내고 있으니 왔다 갔다 할 것 없이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얘기하자. 가족이 같이 지내야 무슨 일이 생겨도 서로 보살피기 좋지 않겠니.”
하지만 주운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농담이시죠, 아버지? 연채는 진서후부에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집에 온 이후에 계속 일이 생긴 거죠. 연채가 총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벌써 조카를 해한 죄인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주 백야도 엽연채가 벌인 일이라 굳게 믿었었기에 민망해서 낯빛이 달라졌다.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주운환이 엽연채를 부축하며 일상원을 나섰다. 부부는 나가는 길에 강심설을 마주쳤다.
“형님, 방금 왜 안 들어오셨어요?”
엽연채의 말에 강심설은 힘없이 웃었다.
“시끄럽기만 할 텐데 들어가서 뭘 해. 지금은 그런 일 신경 쓰고 싶지 않네.”
그러더니 엽연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간… 정말 고마웠네. 동서가 아니었으면 나와 학해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그런데 난 못난 사람이라 전에… 늘 동서를 질투했었네.”
“예전 일은 예전 일에 불과해요. 그리고 제가 뭘 했다고요.”
엽연채는 선명한 눈썹을 살짝 움직이며 웃었다.
“관아에서 다 들으셨잖아요. 모든 일은 큰아주버님께서 계획하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어찌 감히 학해같이 작은 아이를 미끼로 삼을 수 있겠어요. 아이 아버지가 지키고 있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요.”
강심설은 어리둥절해졌다. 주학해 일에서 반격을 가할 때, 갈란군주와 마찬가지로 엽연채가 주학해를 미끼 삼아 판 함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완벽한 역전극을 펼칠 수 있었던 건 맞지만 못내 엽연채를 원망했다. 주학해는 자신의 아들 아닌가. 하마터면 아들이 위험에 처할 뻔했으니, 이는 자신의 생살을 도려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모든 것을 주비양이 준비했을 줄이야.
“형님,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
엽연채가 말을 마치자 주운환은 엽연채의 손을 잡고 서과원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한층 복잡해진 강심설은 주학해를 보러 자신의 뜰로 향했다. 아들이 이미 자신의 침소로 돌아왔으니 얼른 만나서 안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걸음을 서두르던 강심설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놀라 멈춰 섰다.
주비양이 침상 곁에 앉아 주학해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순간 멈칫한 강심설은 무척 화가 나 차갑게 그를 불렀다.
“나와요.”
강심설이 밖으로 나가자 주비양은 약사발을 내려놓고 정원으로 따라 나갔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학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요!”
강심설의 말에 주비양이 돌아서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함정에 끌어들이겠소? 독사 같은 여자요. 그 여자가 공격해 올 건 알았지만,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면 그게 언제일지 예측조차 할 수 없으니 당신과 학해는 더 위험해질 뿐이었소.”
강심설은 움찔했다. 확실히 그랬다. 그런데… 주비양이 지금 학해뿐 아니라 이쪽의 안위까지 걱정했다고 하는 것인가?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강심설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래도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왜 저랑 미리 의논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많은 것들을 나에게 알려 주지도, 의논하지도 않잖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말하기 어려웠소.”
주비양은 강심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몰라서 자신의 생각대로 또 그 방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강심설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주비양은 몸을 돌려 강심설과 마주 보았다.
“당신이 시집온 후로 내가 당신에게 그리 못하지는 않지 않았소?”
강심설은 아련한 과거를 더듬었다. 주비양의 말대로 처음 시집왔을 때는 꽤 행복했다. 주비양이 조금 냉랭하기는 했지만 본디 그런 사람이라 여겨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까지는.
“나중엔 왜인지 당신이 나를 잘 봐 주지도 않고, 늘 일상원에만 앉아 있기 일쑤였소. 혼인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부부가, 고부가 어떤 사이여야 하는지 잘 몰랐기에 그냥 당신이 그런 걸 좋아하는 줄만 알았소.”
주비양이 자신의 속내를 처음으로 내비쳤다.
그의 말대로였다. 부부는 조금씩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 갔다. 강심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입술을 꼭 깨물었지만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 시집왔을 때 이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저도 인맥이 있으니 이런저런 자리에 가면, 갈란군주가 찾아와 저를 따로 불러냈어요. 저더러 당신이 본인을 잊지 못하고 계속 매달리고 있다고…….”
주비양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여자 말을 믿었단 말이요? 날 버린 여자를 내가 잊지 못한다고?”
“당신이 늘 멍하니 서 있길래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줄 알았어요.”
강심설의 말에 주비양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응성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소. 전사한 숙부님과 부하들 말이오.”
강심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강심설은 어딘가 서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주비양이 너무 미웠다. 여우 같은 갈란군주를 아직도 연모하고 있다고 그를 욕하기도 했다.
“제가 그 사람과 닮아서 아내로 맞은 것 아니었나요?”
이 열등감은 그녀가 늘 품고 있던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나 이 물음에 주비양은 놀라 그녀를 들여다보더니 짧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듣고 보니 조금 닮은 것도 같소.”
강심설의 눈이 커졌다.
“이제 알았어요?”
“혼담부터 모든 일은 어머니와 매파에게 맡겨 두었기에 첫날밤에야 처음 당신 얼굴을 보았소. 하지만 당신이 그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소이다.”
강심설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몹시 황망한 가운데서도 마음속 단단한 응어리가 녹아내리나 싶더니 그것은 이내 뜨거운 눈물에 더해졌다. 주비양은 그녀가 우는 것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그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당신은 고운 사람이오. 조금만 꾸미면 마치 우리가 혼례를 올리던 날 못지않을 거요.”
강심설은 일순 움찔했다가 얼굴을 붉혔다.
* * *
그 시각, 엽연채와 주운환은 천천히 궁명헌으로 가는 중이었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꽤 따뜻해지면서 꽃과 새가 가득 날아들었고, 그 덕분에 주씨 집안 풍경도 무척 아름다웠다. 엽연채는 산보 삼아 천천히 거니니 마음이 상쾌하고 편안했다.
“이야기를 잘하고 있나 모르겠어요.”
“그럴 겁니다.”
엽연채의 말에 주운환이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 둘은 대화가 너무 적어요.”
엽연채가 자미화 한 송이를 꺾었다.
“우리도 예전엔 그랬지 않습니까.”
주운환이 웃으며 대답하자 엽연채의 맑은 눈망울이 넘실댔다. 엽연채는 손가락으로 살짝 주운환의 가슴을 누르며 깔깔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당신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아요!”
주운환은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았다.
“나도 압니다. 우리 부인은 언제나 내 생각뿐이죠?”
“아니거든요!”
엽연채는 괜히 토라진 척했으나 곧 마음이 약해졌다.
“실은 맞아요.”
주운환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정말 솔직해.”
“안 돼요?”
“되죠. 전 좋기만 합니다.”
“흥.”
엽연채는 주운환의 팔뚝을 툭 때렸고 주운환은 그런 그녀를 더욱 꼭 그러안았다.
“아이.”
“왜 그래요?”
엽연채는 그의 품에 기대며 대꾸했다.
“이렇게 막 움직이면 아기가 싫어해요.”
“내 아내를 내가 안는데 우리 아기가 싫어한다니요?”
주운환은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부부는 몇 마디를 더 주고받다가 사이좋게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평상에 누웠는데 배 속의 아기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성싶었다. 안에서 뭘 하는지, 뱃가죽을 힘껏 밀었다가 쉴 새 없이 몸을 뒤척이기도 했다.
주운환은 그녀의 뱃가죽이 안쪽에서 삐죽 솟아오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녀석, 움직이면 안 돼.”
그러나 엽연채는 도리어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혼내지 마요. 그러다 아예 안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반나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무섭다고요. 아가야, 마음껏 움직이렴.”
그러고는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주운환은 못 말린다는 듯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경이로운 듯 엽연채의 배를 바라보다 이내 손으로 만져 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가락을 잡았어…….”
“네?”
엽연채도 놀랐다.
“정말요?”
“진짜요.”
주운환은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찰나긴 해도 배 속의 아기가 정말 자신의 손을 붙잡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