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701화 (701/858)

제701화

“군주, 예전엔 정말 당신을 사랑했소. 하나 당신은 나를 헌신짝처럼 버렸지!”

주비양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원망도 잠시, 나는 다 내려놓았소. 그건 당신의 선택이요. 당신이 원하는 게 사랑이든, 부귀영화든 모두 당신이 선택한 거요.

하나 당신 인생을 선택해 놓고 내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거였고, 다시 가치가 생기니 찾아와서는 더더욱 안 되는 거요! 이제 와 당신이 품에 안긴다고 내가 감동에 겨워 당신을 받아들여야 하오?”

“당신, 당신이 감히! 어떻게 감히!”

갈란군주는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사랑하는 척을 했다니, 잊지 못한 척을 했다니! 이건 여인의 존엄이 걸린 일이었다!

“가자!”

주비양이 말을 마치자 포졸 둘이 마저 그녀를 끌어내려 했다.

“놔라! 그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라!”

갈란군주는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발버둥 쳤지만 조그만 여인이 어떻게 장정 둘을 당해 내겠나. 갈란군주는 결국 끌려가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비양을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일그러진 입매가 내뱉는 저주스러운 소리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두고 봐라. 너희 모두 대가를 치를 것이다……!”

지금껏 지켜보던 엽연채의 짙은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래요, 기다릴게요! 하지만 지금 군주가 망신을 당했다고 우리 탓을 하지는 말아요. 애초에 학해의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인정했으면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기어코 만심에게 떠넘기는 바람에 결국 관아까지 나오게 된 거잖아요.

그건 그렇고, 정말 감사해요. 군주 덕분에 온 도성 사람들이 좋은 구경 했네요.”

“너……!”

갈란군주는 피를 뿜을 뻔했다. 엽연채를 노려보는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네놈들 모두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전부 다!”

갈란군주가 끌려가자 관아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오씨 집안 사람들은 수치스러워 차마 더 앉아 있지 못하고 부랴부랴 관아를 떠나갔다.

진씨는 가슴이 두근대고 얼굴이 파리해졌다. 무섭고도 두려웠다. 그리고 증오스러웠다. 지금 제일 미운 사람은 엽연채, 주운환, 갈란군주도 아닌, 주비양이었다.

이 불효막심한 놈.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다니! 갈란군주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주씨 집안도 망신을 당했으니 주묘서에게까지 영향을 줄 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주비양의 계획이라니!

“비양아, 네가……!”

진씨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설마 군주의 음모를 밝혔다고 저를 원망하시는 건 아니겠죠? 망신을 당하셨다고요? 저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제가 알리는 것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습니까?”

주비양은 차갑게 진씨를 쳐다보았다. 진씨는 머리가 핑핑 돌아 땅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게 아들인가? 그것도 친아들? 어떻게 어미를 이리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얼른 일어나시오!”

주 백야는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일 듯 진씨를 매섭게 노려보며 채근했다. 평생 이렇게 망신스러운 적이 없었던 주 백야는 소매를 힘껏 휘두르며 공당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주위 백성들이 비웃는 소리가 계속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새파랗게 질린 진씨는 급히 주 백야 뒤를 쫓아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운환이 엽연채를 부축해 일으켰다.

“부인, 우리도 집에 가요. 재미있는 구경이었죠?”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심설은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비양을 보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아까 그의 말을 들은 뒤로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 * *

관아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던 그때, 주씨 집안은 고요했다.

일상원.

정 마마가 조용히 수를 놓고 있는데 여종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주인나리와 마님께서 돌아오셨어요! 수화문에 내리시는 걸 보고 알려 드리려고 달려왔어요.”

정 마마가 자수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드디어 오셨구나.”

정 마마는 진씨의 심복이니만큼 오늘 그녀를 따라 관아에 함께 갔어야 했지만, 날씨가 추워 그런지 오랜 관절병이 도지는 바람에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일이 혹여나 잘못되었을까, 걱정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늘 일은 하나도 신경 쓸 게 없었다. 부윤이든 관부官府든, 모두 엎드려 갈란군주를 감싸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우리 주씨 집안이 안목이 높아 황제가 아끼는 친손녀를 집안으로 들였다고, 오씨에게 본때를 보여 줬을 텐데. 정 마마는 그 자리에 가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정 마마는 방 밖으로 나가면서 여종들에게 일렀다.

“벌써 오시午時구나. 어서 식사를 준비하고 화로를 문 앞에 가져다 놓아라.”

어쨌든 관아도 다녀왔고 사람 목숨이 걸린 대사를 치렀으니, 화로를 넘는 것으로 액막이를 해야 했다.

“네, 마마.”

한 여종이 웃으면서 나가더니 갑자기 놀라 외쳤다.

“늦었어요, 마마! 나리와 마님이 이미 돌아오셨어요.”

“뭐?”

정 마마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니, 과연 주 백야와 진씨가 앞뒤로 나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마님, 왜 벌써 들어오십니까?”

진씨 본인이 분명 나가기 전, 귀가해 액막이를 할 수 있게 수화문 앞에 화로를 준비해 두라고 분부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평소에는 진씨가 가장 앞장서서 걷고 유약한 성격의 주 백야는 진씨 뒤를 따르는데, 오늘은 주 백야가 앞서 들어오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었단 직감이 들이닥쳤다.

정 마마가 가만 보니 주 백야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숨길 수 없는 노기가 가득했다. 진씨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대며 주 백야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녹엽이 부축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

이게 대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정 마마는 급히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저… 마님… 무슨 일인가요? 관아에 가신 게 아니었나요? 어찌…….”

“마마, 조용히 계세요!”

녹엽이 황급히 소리치며 말을 막자 정 마마의 안색이 변했다. 녹엽이 자신에게 큰소리를 내서 언짢아진 게 아니라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진 것이었다.

녹엽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혼내며 가르친 아이로, 언제나 온순하고 성실한 아이라서 매를 쳐도 꾀도 못 부렸다. 그런데 자신에게 가만있으라고 소리를 치다니 무슨 큰 충격을 받았든지, 아니면 정말 큰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다.

정 마마는 안절부절못하며 진씨를 안으로 모셨다. 뒤를 돌아보니 주운환이 엽연채를 부축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째 뭔가 모자란데? 정 마마는 좀 이상했지만 그게 뭔지 단박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다 잡기도 전에 주 백야가 호통을 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설명하시오! 나한테 갈란군주를 들이면 뭐가 좋고 뭐가 좋고, 우리 가문에 영화를 가져올 거라 하지 않았소? 지금 이 꼴을 보시오. 세상에, 제 손으로 지아비를 죽인 저런 독한 것을 우리 가문에 들이다니! 영화는커녕 이런 치욕이 없소! 어찌 조상님들을 뵙는단 말이오!”

주 백야는 화가 나서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뭐? 남편을 죽여?”

정 마마는 놀라 휘청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정 마마는 그제야 왜 방금 느낌이 이상했는지 알았다. 효성스레 늘 진씨 곁을 지키던 갈란군주가 없었다!

그 군주가… 정말 제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다!

만심이 고발당한 후 정 마마도 그런 짐작을 하긴 했지만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 그런 짓을……!

“나리,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저는 그냥…….”

잡아뗄수록 진씨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냥 뭐요!”

주 백야는 뒷짐을 지고 두어 걸음 다가가 진씨를 내려다보았다.

“내 처음부터 말했지 않소, 군주를 들이지 말라고! 과부인 데다 하물며 상중인 여자를! 당신이 기어이 집에 들이더니, 아직도 억지를 부리는 게요! 오일의의 혼이 찾아오기는 무슨! 군주를 데려오지 않으면 당신을 죽인다고? 허 참! 귀신이 당신을 잡으러 와?

그래, 귀신이 정말 쫓아오겠소! 자기를 죽인 살인자를 집에 들였으니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누굴 죽인단 말이오! 그렇게 내 탓을 하면서 찍소리도 못하게 하더니 허 참, 아주 우습구만, 하!”

진씨는 비할 데 없이 부끄럽고 양심에 찔려 악에 받쳤다.

“나리, 저도 피해자예요!”

“당신이 피해자? 기를 쓰고 사람을 들인 것은 당신이오. 그래, 왜 꼭 그 아이를 며느리로 데려와야 했는지 말 좀 해 보시오. 평왕비랑 무슨 얘기를 한 거요? 뭘 약속받았소?”

냉랭한 주 백야의 말에 진씨의 표정이 변했고, 자기도 모르게 엽연채와 주운환을 살폈다.

주운환과 엽연채는 차를 따라 주네 받네 하면서 여유롭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의 집 불구경이냐?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고 있을꼬. 진씨는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기운이 부족해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어딜 보는 거요! 내 지금 당신한테 묻지 않소!”

노한 주 백야가 소리쳤다.

무슨 약속이겠어? 당연히 갈란군주만 받아 주면 주운환의 모든 것을 손에 넣게 해 주겠단 약속이지! 당신도 머리가 있으면 알 것 아냐! 진씨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방금만 해도 갈란군주가 자신까지 끌어들여 약속을 까발릴까 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른다. 군주가 마지막까지 그 일을 끄집어내지 않아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자신들 모녀도 끝장났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진씨는 한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주묘서는 아직 태자의 측비일 뿐. 일이 이렇게 어그러졌으니, 전처럼 주운환의 도움이 있어야만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진씨는 좌절이 너무나도 큰 탓에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이 판국에 주 백야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연신 호통을 쳐 대자 진씨는 이성을 잃고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호통은 왜 쳐요? 내가 알고 그랬어요? 그 아이를 집에 들이려고 한 건… 당연히 그 아이가 좋으니 그랬죠! 그 아이가 내 며느리이면 했어요. 달리 뭐가 있겠어요? 늘 저 불길한 아이보다 갈란군주가 더 좋았어요. 이건 나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주 백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랬다. 예전엔 자신도 장래 며느리로 맞이할 갈란군주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주비양은 강심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강심설은 외모나 신분 모두 갈란군주에 비할 수조차 없었기에 자신도 갈란군주를 놓친 것을 아쉬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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