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9화
‘저것이 기어코…….’
갈란군주가 악녀라는 것은 주학해에게 약을 먹였을 때 벌써 알았다. 진씨도 당연히 꺼림칙했지만, 그땐 갈란군주가 주비양을 위해 다 차지하려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 부인이 만심을 관아에 고발하자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도 모르게 주학해에게 독을 먹였으니, 오일의를 독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하지만 범인은 만심이 아니라…….’
진씨는 머리털이 삐쭉 섰다. 자기 남편을 살해하다니!
진씨는 그 이상은 생각하기조차 겁이 났지만 지금 눈앞에서 진상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었다. 정말 갈란군주가 그런 것이었다!
진씨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까닭이 화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수치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설, 설마…….”
창백해진 오 노야와 오일봉은 벌떡 일어났지만 다시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댔다. 겨우 몸을 가눌 뿐, 한마디도 못 하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조소를 샀다.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한편, 채결은 그대로 굳어 버렸고 정 부윤은 사지에 힘이 풀렸다. 모든 죄가 갈란을 지목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종이로는 불을 감출 수 없는 법, 이미 덮을 수 없는 일임은 뻔했다. 정말 갈란군주를 정죄해야 하는 걸까?
저 앞에 있는 이는 황제의 친손녀, 황실의 얼굴이었다. 이제 그 얼굴에 똥칠을 하게 생긴 판인 데다가, 심지어 그걸 이 두 손으로 하게 생겼으니! 정 부윤은 의식이 다 아득해졌다.
“남편을 살해해? 남편을 죽였대요, 세상에!”
주위를 둘러싼 경멸의 눈빛이 모두 갈란군주에게 향했다.
“이런 일이 얼마 만에 일어난 건지 모르겠네.”
‘남편 살해’. 네 글자가 귀에 쏙쏙 들어와 박혔다. 갈란군주는 부들부들 떨며 죽어라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니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정말 내가 아니야! 누명이다. 이 천한 것들이 나를 모함하는 것이다! 당신이지! 그래, 당신이 배후로구나!”
갈란군주는 오 부인을 가리켰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더니 기어코 사지로 나를 밀어 넣는구나! 분명 저들과 짜고 나를 모함하는 게 분명해! 다들 내가 죽기만 바라고 있다니……! 엉엉…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런 시선, 이런 결과, 수치와 분노를 갈란군주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로!
반면, 오 부인은 갈란군주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 더할 나위 없이 통쾌했다.
“증인도 증거도 모두 나왔는데 아직도 잡아뗄 작정이냐! 이 지경에서도 인정하지 않다니! 입만 열면 누명을 썼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정말 누명 쓴 게 된단 말이냐?
그렇다면 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도 너처럼 소리만 지르면 된단 말이냐? 증인과 증거는 모두 꾸며 낸 것이고 모함당한 거라고? 죄인들 전부 다 무고하다는 것이냐! 그러면 갇힌 사람들을 전부 풀어 줘야 하겠네, 안 그런가?”
바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오 부인에게 동조했다.
“맞네! 누명이라고 우겨서 다 누명이 된다면, 감옥 안의 죄수들 모두가 누명을 쓴 게지.”
“다 풀어 줘라, 풀어 줘!”
그때, 갑자기 쉰 정도 되어 보이는 아낙이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 울면서 외쳤다.
“군주는 누명을 쓰신 겁니다! 모함이라고요! 이 염치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모두 한통속으로 짜고 군주를 모해하다니, 당신들은 천벌이 무섭지도 않소!”
갈란군주와 만소는 놀랐지만 이내 감동한 듯 눈물이 차올랐다.
“분명히 군주는 누명을 쓴 겁니다!”
아낙은 급기야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내 아들도 군주처럼 누명을 썼으니 어서 풀어 줘요, 어서!”
“에라이!”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동정하기는커녕 그녀에게 침을 뱉고 욕하기 바빴다.
“아들이 누명을 썼다니 낯짝도 두껍지! 당신네 아들이 증 노야 댁 소를 훔치는 걸 사람들이 다 봤소. 당신네 마당에 그 소를 묶어 두고는 팔겠답시고 그 녀석이 칼을 갈고 있었잖소. 현장에서 잡혀 놓고 염치도 없이 누명이라니!”
“뻔뻔하기도 해라! 정신없는 틈을 타 이득을 보려고!”
욕설이 마구 날아들자 그 아낙이 실실 웃으며 얘기했다.
“다들 진정해요. 맞아요, 맞아. 모두 누명이지 뭐야. 저기 군주도 누명이라 하잖소? 군주는 누명이라 우겨서 죄를 벗을 수 있다는데, 소를 훔쳤다고 갇힌 소도둑이라고 왜 안 되겠소? 다 풀어 줘요, 다들 누명을 쓴 건데!”
모두들 뒤집어지게 웃었으나 갈란군주는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 자리에 모인 전원이 자신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기라도 한 양,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 없고 공격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들 감히……!”
군주는 곧 정신을 놓아 버릴 듯,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군주다! 내가 황제 폐하의 친손녀란 말이다!”
“저런…….”
그 발광 직전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과 상인들은 하나같이 탄식했다.
“입 다무십시오!”
채결은 너무나 놀라고 화가 나 눈앞이 아득하고 어지러웠다.
“하, 그래요! 당신은 군주이고, 황제 폐하의 친손녀입니다. 그래서 특권이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사람을 죽였다 해도, 남편을 죽이고 의붓아들에게 독을 먹여도,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해도 된다 이 말입니까?”
이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특히 밖에 있던 백성들은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인가 싶어 수군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폐하가 그런 분이셨어?”
쑥덕거리는 소리에 채결은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차갑게 호통쳤다.
“모두 조용히 하거라! 황제 폐하는 영명하고 무용이 뛰어나신 분이시다. 어찌 남편을 살해한 손녀를 그냥 두고 보시겠느냐.”
그 말에 오 부인이 씩 웃었다.
“그럼요. 황제는 영명하고 무용이 뛰어난 분이신데 어찌 그리 몹쓸 짓을 하시겠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죠. 일전에 황제께서도 황자가 법을 어기면 백성과 동등하게 다스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 부윤 대인, 뭘 기다리십니까? 어서 죄인을 옥에 가두셔야지요! 사람들이 황제 폐하의 뜻을 오해하겠습니다.”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정 부윤은 바들바들 떨며 말까지 더듬댔다.
“이, 이 일은… 본관의 소관이 아니다.”
그 순간, 정 부윤의 눈이 반짝거리더니 다급히 말을 이었다.
“군주는 황가 종실의 사람이니, 이 일은 대리시에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군주를 대리시로 보내라.”
왈칵 말을 쏟아 낸 정 부윤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기지를 발휘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자신이 군주를 베는 칼이 될 뻔하지 않았는가! 그랬다가 나중에 무슨 꼴이 나려고!
“예, 대리시에 넘기시지요.”
정 부윤에게 동의하는 채결의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돌이킬 여지조차 없는 지경이니, 더 있다가는 망신만 더 당할 터. 그는 세차게 옷자락을 털더니 돌아섰다.
“채 공공! 나를 두고 가지 말게!”
갈란군주는 채결이 나가려는 것을 보자 기함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채 공공… 나를 어릴 적부터 많이 예뻐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어떻게 나를 버리려고 하는가? 할바마마께서 재판에 채 공공을 보낸 건 분명 나를 도우라는 뜻이요. 이게 지금 무슨……!”
채결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특히 황제가 그녀를 도우라고 보낸 거라는 말에 가슴이 다 서늘해졌다. 이 말은 황제가 군주의 악행을 알면서도 계속 감싸 주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더욱이 군주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채결은 이 소란에 더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흥!”
채결은 홱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급히 자리를 떠났다.
“안 돼……!”
갈란군주는 바닥에 엎드려 떨면서도 연신 소리를 질러 댔다.
“안 돼! 아니야,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나는 군주란 말이다, 군주!”
그러나 그녀의 울부짖음은 ‘철썩’ 소리와 함께 끊어지고 말았다. 오 부인이 다가가 군주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군주면 또 뭐? 부윤 대인, 뭘 기다리십니까? 우선 옥에 가두셔야지요!”
오 부인은 더없이 써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한편, 채결이 이 난장판을 자신에게 몽땅 떠넘기고 가 버리자 정 부윤은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하나 이 혼란을 더 내버려 두었다가는 황실의 체면만 더 깎일 뿐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붙이는 오 부인이 원망스러웠으나, 그나마 숨통이 트인 상황이라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건 원래부터 내 일이 아니라, 대리시가 할 일이었다! 이런 난장을 누구한테 떠넘기려고!’
정 부윤은 이를 갈며 경당목을 세차게 내려쳤다.
“끌어내라!”
명을 내리기 무섭게 정 부윤은 나 몰라라 경당목을 내던지고 나가 버렸고, 이제 이 소동은 포졸들의 몫이 되었다. 포졸들은 서로 쳐다보다 결국 두 명이 나서 갈란군주를 끌어냈다.
“뭐 하는 짓이냐?”
갈란군주는 아연실색하며 고함을 쳤다.
“방자한 것! 나는 천금의 몸, 군주이다! 감히 내게 손을 대다니!”
“군주를 잡지 마라!”
만소는 대성통곡하면서도 갈란군주의 몸을 덮으며 필사적으로 막았다.
“군주는 황제께서 제일 아끼시는 친손녀시다. 예를 지켜라!”
두 포졸은 눈빛을 나누다 만소를 밀어내고 갈란군주를 힘껏 끌어당겼다.
“아아, 군주……!”
주인에게서 강제로 떨어뜨려진 만소는 울부짖다 말고 고개를 돌려 만심을 보았다.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는 만심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만소는 만심에게 와락 달려들더니, 그녀의 마구 뺨을 때렸다.
“무슨 짓이냐? 군주, 군주께서……!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넌 네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충성스럽게 주인을 지키지도 않았고, 주인의 근심을 나눠 지지도 않았어! 마마께서 잡혀가시는데 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냐!”
만소는 미친 듯이 손을 휘둘렀고 결국 만심은 바닥에 쓰러졌다. 오랫동안 자매처럼 지냈던 만소에게서 심한 책망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한때 주인이었던 자, 갈란군주의 죄가 밝혀졌다. 이제 곧 법의 심판을 받게 될 터였다.
만소의 말마따나 자신은 충복으로서 주인에게 충성해야 했다. 그리고 예전엔 늘 그래 왔다. 언제나 스스로를 충성스러운 하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 겪은 억울함과 절망에 만심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 순간 외려 해탈한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은 그렇게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