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6화
정 부윤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또다시 죄 없는 경당목만 휘둘러 댔다.
“정숙하시오! 정숙!”
그에 소란은 그쳤지만 수많은 눈이 형형한 빛을 쏴 대며 그를 쳐다봤다. 정 부윤은 새파란 얼굴로 아래에 있는 만심을 향해 겨우 입을 열었다.
“죄인 만심은 듣거라. 네가 오일의를 독살했느냐?”
만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해일처럼 덮쳐 오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순간, 만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갈란군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는데 갈란군주는 그녀의 생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예…….”
만심은 목소리를 떨었다. 그럼에도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여야겠지만, 수긍하려는 순간 그녀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오 노야 부자와 진씨, 주 백야는 모두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섰고 진씨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그녀가 휘청이자 뒤에 있던 녹엽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세상에……!”
공당의 상인들과 밖에 있는 백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같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모두들 지금껏 지켜봤고 이리저리 생각도 한 터라 이미 만심이 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만심이 자기 입으로 인정을 하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 부윤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언제나처럼 판결을 내릴 수밖에는!
정 부윤은 손을 내린 후 눈을 번쩍이고는 만심을 쳐다봤다.
“왜 그런 짓을 한 것이냐!”
만심은 몸을 살짝 떨었고 갈란군주와 진씨 등은 모두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그러나 암만 자신은 몰랐던 척하려 해도 갈란군주의 머릿속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자신은 군주이며 황실의 자손이다! 정선제의 외손녀다! 그런데 누가 감히 자신을 판결하며 누가 감히 황실에 모욕을 주겠는가?
온 조정과 모든 권세가가 그녀의 편이었다. 이 일은 대강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만심과 진상이 폭로된 이후의 일은 전혀 상의하지 않았음은 두말하면 입만 아팠다.
정 부윤은 또 ‘쾅’ 소리를 내며 경당목을 내리쳤다.
“본관이 지금 네게 묻고 있지 않느냐!”
오 부인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만심을 쳐다보며 연신 냉소를 지었다. 만심은 두 눈을 꽉 감더니 이렇게 말했다.
“소인, 소인은…….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다 군주를 위해…….”
밖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고 더욱이 갈란군주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만심이 저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만심아… 너, 너…….”
“말을 분명히 하거라.”
정 부윤이 말했다.
“오일의는 불구가 되었는데 어떻게 군주에게 어울리는 짝이겠습니까?”
만심은 시선을 아래로 하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소인이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오일의에게 독을 썼습니다.”
그러자 밖에 있던 백성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쯧쯧. 진짜 악독하네. 지난번엔 주씨 가문 어린 공자가 군주를 모욕했다 하더니 이번엔 불구가 된 오일의가 군주의 행복을 방해했다고 하네.”
정 부윤이 말했다.
“독약은 어디서 구했느냐?”
만심은 새파란 얼굴을 살짝 아래로 숙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에 밖에서 한 행상꾼을 만났는데 그가 연지묵 얘기를 하며 자신이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나중에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 얼마간 샀습니다.”
정 부윤은 빨리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라 얼른 이렇게 말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악독한 여종이 있다니! 여봐라. 저 여종을 끌고 나가 당장 참수형에 처하거라!”
그러자 바로 포졸 둘이 다가와 만심을 끌고 가려고 했다.
채결은 정색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으로선 갈란군주가 여종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평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채결이 뒷짐을 진 채 이곳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오 부인이 달려오더니 두 포졸을 가로막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닙니다! 저 여종이 아니에요! 범인은 갈란군주입니다! 군주예요!”
오 부인이 갈란군주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 악독한 것. 네가 한 짓이잖아! 범인은 너야!”
갈란군주는 창백한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 부인. 말을 어찌 그리 함부로 하십니까. 지금… 만심이 벌인 짓이라고 증명되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만심인데 왜 저를 끌어들이는 겁니까?”
만심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마치 얼음물 한 통이 머리 위에서 쏟아부어진 것처럼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쯧쯧. 아직도 자기는 아니라고 하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갈란군주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몸을 파르르 떨더니 달려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만심의 뺨을 두 대 후려쳤다.
“이 빌어먹을 것! 정말… 네가, 네가 그 사람을 독살한 것이냐! 난 네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내가 널 잘못 믿었구나.”
갈란군주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고 원망으로 가득 찬,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뺨을 맞고 쓰러진 만심은 입가의 핏자국을 가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군주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썼는데 군주는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다.
“방금 전까진 주종 간의 깊은 정을 보여 줬으면서 이젠 뺨을 올려붙이네.”
백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방금 전까지는 공을 세워 속죄했다는 말도 하며 퍽 다정해 보이더만. 쯧쯧. 알고 보니 연극을 한 거였네. 연기 한번 끝내주는군.”
“하지만 이것도 만심이 군주를 너무 실망시켜서 그런 거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군주는 정말 무고해!”
누군가 갈란군주를 비호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퉤. 무고하기는 무슨.”
“내가 볼 땐 군주가 저 여종에게 시킨 일이 분명해.”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일부는 아까 전 갈란군주가 했던 말을 기억하며 그녀를 감쌌다. 그만치 그녀의 고통을 깊이 느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일부에 불과했다.
“군주가 시킨 일이 아니라고 해도 역겨운 건 마찬가지야.”
“그러게 말이야. 오일의는 독살당했으니 원통한 마음일 텐데 어째서 현몽하여 군주에게 재가하라고 했을까?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그때 주 부인과 오씨 가문 사람들이 주변이 떠나가게 목놓아 울었는데 이제 보니 진심이었을까 싶어.”
“하하하……!”
오 부인은 크게 냉소를 터트리며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그래, 전에 네가 말했지. 꿈에서 본 내 아들이 상중인 너보고 재가하라고 했다고.”
갈란군주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띤 오 부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에 부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백성들도 갈란군주를 실컷 조롱했다. 상중에 재가를 한 게 죽은 남편을 위해서였다고? 실은 사내가 그리웠던 건 아니고?
너털웃음을 짓던 오 부인이 고개를 휙 돌려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 당신은 향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우리 집으로 달려와 내 아들이 당신 꿈에 나타났다고 말하며 기어이 이 악랄한 것을 당신 집으로 들여야 한다고 했지?”
진씨는 낯빛이 창백했다. 자신이 오씨 가문으로 달려가 갈란군주를 주씨 가문으로 들여야 한다고 소란을 피웠던 일이 떠오르자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백성들은 경멸로 가득한 눈으로 진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과부를 모셔와 집안으로 들였으니, 분명 목적이 따로 있을 터였다!
“하하하!”
대놓고 야유하던 오 부인의 시선이 곧바로 오 노야에게 향했다.
“갈란군주가 출가할 때 죽어도 가마에 오르지 않겠다고 능청을 떨자 당신들은 군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일의가 현몽했다고 말했지요. 반드시 군주를 시집보내야 한다면서 군주에게 가마에 오르라고 부탁까지 했지요?”
오일의와 오일봉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였다.
백성들은 오씨 부자의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황제가 관직을 높여 줬다고 죽은 가족을 냉큼 팔아 버린 망종들 같으니라고!
“그, 그런 게 아니에요. 흑흑…….”
갈란군주가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해 만소가 잡아 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전 사람들을 속이지 않았어요……. 정말로 그 사람을 꿈에서 봤고… 그 사람이 정말로 제게 재가하라고 했어요……. 꿈속에서 그 사람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지하의 저승사자가 그 사람이 많은 얘기를 하지 못하게 단속했겠지요. 너무 많은 걸 누설해서는 안 될 테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은 저에게 재가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던 거죠…….”
“맞아요!”
오 노야와 오일봉은 영리한 사람들이라 갈란군주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오 노야는 그 즉시 거짓 울음과 거짓말을 잘도 지어냈다.
“저희도 꿈에서 일의를 봤는데, 그 애가 군주를 시집보내라고 했습니다. 당시엔 저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누군가가 군주를 잘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해도 굳이 이런 시기에 출가를 시켜 군주의 평판을 망가뜨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일의는 꿈속에서 거듭 부탁을 했고 갈란군주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자신이 지하에서 모진 고통을 겪게 될 거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결국 시집을 가게 됐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보세요. 보름도 안 됐는데 범인이 만심이었음을 잡아냈습니다. 그러니 일의의 목적은 사실 범인을 잡아내는 것이었겠지요!”
“흑…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이러려고……. 알다시피 그동안 전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동안 단 하루도 진심으로 웃어 본 적이 없어요.”
갈란군주는 가슴이 미어진단 듯이 눈물을 쏟아 냈다.
“이제… 마침내 진범을 찾아냈으니 그 사람도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비애와 고통이 뚝뚝 묻어났다. 언제든 오일의를 따라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을 보니 부부의 깊은 정과 그녀의 굳은 절개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의. 당신은 왜 날 버리고 갔나요! 어째서 나를 데려가지 않았나요……!”
갈란군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그녀가 바닥으로 쓰러지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의 팔뚝을 꽉 붙잡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무릎을 반쯤 꿇은 어정쩡한 자세로 매달리게 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주비양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주비양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오일의를 그만큼 사랑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