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2화
그는 매서운 눈으로 아래에 있는 상인들을 살펴봤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갈란군주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고 가녀린 어깨와 목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있었느냐 물었다.”
정 부윤이 다시 묻자 꽤 많은 상인들이 잇달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도 그런 건 판매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 가게에선 흑양을 판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양의 발굽 같은 건 버리는 부위입니다. 동원銅圓 두 개와 바꿀 수 있었다면 제가 분명 기억했을 겁니다. 그리고 계내금은 전부 햇볕에 말려 약방에 팝니다.”
상인들이 한마디씩 대답을 마치고 나니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아무도 만심을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아무도 신선한 계내금을 따로 판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자 밖을 둘러싸고 있던 백성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럼 오일의가 정말 독살된 게 아닌 거야?”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아무리 독해도 오랫동안 한 이불 덮고 자던 남편을 독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이야. 두 사람에겐 아들도 있고, 방금 전에 오 부인과 군주도 고부 관계가 좋았다고 했잖아. 그러니 어디 이런 사람으로서는 못 할 짓을 했겠어.”
“아무리 주학해 일이 있었어도 함부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서는 안 되지. 지금 이건 근거 없는 소리에 불과해. 주 공자가 독에 당한 걸 보고는 괜한 의심을 하는 거지.”
안에 앉아 있는 채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살며시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긴장이 풀리자 뼈마디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포졸이 가져다준 의자는 너무 딱딱해서 나이 든 몸으로 오래 앉아 있기가 영 불편했다.
“공공. 피곤하십니까?”
뒤에 있던 어린 환관이 그의 환심을 사려고 말했다.
“이제 일이 해결되었으니 공공께서는 어서 궁으로 돌아가 보고를 올리시지요. 소인이 공공을 대신해 마무리하겠습니다.”
채결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봤다.
“요 능글맞은 것. 알랑방귀를 뀌느라 아주 애를 쓰는구나.”
어린 환관은 헤헤 웃으며 그렇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공공께 잘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채결은 하하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어린 환관이 얼른 그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흥!”
그때, 오 노야가 콧방귀를 뀌더니 의기양양해하며 오 부인을 쏘아봤다.
“진작에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없는 사실을 꾸며 내고 군주의 명예도 더럽혔다고 말이오!”
“드디어 저희의 결백이 밝혀졌습니다…….”
갈란군주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려 진씨와 주 백야를 쳐다봤다.
“아버님, 어머님… 부군…….”
“나리. 제가 진작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란이가 어떻게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렀겠어요?”
진씨도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에휴!”
주 백야는 갈란군주를 바라보자 방금 전 그녀가 얘기했던 전투에서 패배한 고통이 다시 떠오르면서 감정이 북받쳤다.
“그래, 넌 좋은 아이다.”
그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려 주비양을 쳐다봤다.
“비양아, 군주에게 잘해 줘야 한다. 이 아이도 쉽지 않을 게다.”
하나 주비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흑흑, 마침내 저희의 결백이 밝혀졌군요…….”
무릎을 꿇고 있던 만심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절을 했다.
“만심아, 고맙다.”
갈란군주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군주, 그런 말씀 마세요.”
만심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고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난 네게 감사해야 한다. 네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우린 당연히 널 처벌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넌 앙심을 품지 않았고 우리에게 보복할 생각도 안 했다. 네가 나쁜 마음을 품어 이 죄를 거짓으로 인정했다면 우릴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을 게다.”
갈란군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바깥의 백성들은 이 광경에 탄식을 금치 못했고 개중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쳤다.
“오해가 있었던 게지. 보아하니 이 처자는 정직한 사람이네.”
“사람치고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러자 또 동조하는 목소리가 인파 사이에서 났다. 만심은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듣더니 감정이 격양되어 갈란군주와 진씨를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군주, 나리, 마님.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흑흑… 소인이…….”
“이런…….”
주 백야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든 게 바로 여인의 눈물이었고 게다가 만심은 일편단심 상전을 보호한 사람이었다.
진씨는 조금 탐탁지 않았지만 이제 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만심은 갈란군주의 사람이기도 하니 그녀는 계단을 내려오며 이렇게 말했다.
“공을 세워 속죄한 셈이니 죽음은 면하게 해 주마!”
하인인 만심이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외부로 위험이 미치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저 집안일인 셈이니 주인이 너그러이 용서하고자 한다면 그녀는 죽음으로써 속죄하지 않아도 되었다.
강심설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이 상황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설마 정말 이렇게 끝이란 말이야……?
공당 밖의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전에게 독을 쓴 여종인데,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다고 그 죄를 면해 준다는 말인가? 이거 참, 정말 행복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꺼림칙하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이들은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상석의 정 부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경당목을 들고 탁자를 내리쳤다. 그렇게 그가 진부한 말을 뱉으며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찰나.
“잠시만요!”
이때, 떨림이 묻어나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몰려든 사람들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봤다. 보니 상인들 사이로 잿빛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리를 뜨려던 채결은 그 영감을 보더니 낯빛이 싹 변했고 하마터면 머금은 차를 잘못 삼켜 사레가 들 뻔했다.
“저자는……!”
뒤에 있던 어린 환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바로 어젯밤에 본 자를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잿빛 의복을 입은 영감은 바로 어젯밤에 자신들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은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냐?”
정 부윤도 무언가를 직감하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만심은 고개를 돌리더니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순간 얼굴의 핏기가 몽땅 가셨다.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그는 바로 도성 동쪽에서 양을 파는 사람이었다. 흑양을 취급하는 그의 가게에서 한 달이 넘게 흑양갑을 구매했었다……!
만심은 멍하니 그 자리에 있었다. 방금 전 진씨가 자신의 죄를 면해 줬으니 어쩌면 다시 군주 곁으로 돌아가 군주를 보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이래선 안 돼.’
만심은 창백한 얼굴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냐, 아냐. 침착해야 돼! 침착! 저 영감은 진상을 폭로하려는 게 아닐지도 몰라. 괜히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지도 몰라.’
“부윤 대인…….”
잿빛 옷의 영감은 바닥에 엎드리더니 정 부윤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인은 도성 동쪽에서 양을 파는 상인입니다. 전에, 전에 누군가가 소인의 노점에 와서 날마다 흑양갑을 구매했습니다.”
이 말에 공당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침묵은 금세 소란스러운 말소리로 채워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방금 전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잖아?”
“응, 분명 그랬지. 왜 또 흑양갑을 사 간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야?”
정 부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미 다 준비된 거 아니었어? 왜 저런 게 불쑥 튀어나오는 거야?’
정 부윤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쳐다봤다. 채결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지만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얼굴을 내밀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정 대인?”
누군가의 비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부윤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웅성거리는 백성들, 그리고 냉소를 지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오 부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흑양갑을 팔았다고 하는데 대인은 어째서 심문을 이어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정 부윤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헛기침을 하고는 경당목으로 땅땅 책상을 두드렸다.
“정숙하시오! 정숙!”
백성들은 그제야 말을 멈췄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영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머!”
심상찮은 침묵 속에서 누군가가 또 작게 소리치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상인들 틈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온 것이다. 한 사람은 퉁퉁한 사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마른 사내였다. 두 사람은 ‘쿵쿵’ 소리를 내며 잿빛 옷을 입은 영감의 좌우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인, 살려… 제발 살려 주십시오…….”
퉁퉁한 남자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대인께서 신선한 계내금을 판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소인은 일부러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일부러 숨긴 것이 아닙니다. 소인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이옵니다. 하지만…….”
“감히!”
정 부윤은 낯빛이 확 변했다. 그는 퉁퉁한 남자의 말에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댈 지경이었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입을 콱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세 사람이… 갈란군주와 여종에게 흑양갑과 신선한 계내금을 판 사람들이란 말인가? 이들은 지금 뭘 하려는 걸까? 아니, 이들이 뭘 하려는지야 이미 빤하지 않은가!
일촉즉발의 위기를 느끼기는 갈란군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누가 너희에게 사주했느냐? 감히 허튼소리를 지껄이다니!”
“맞습니다. 허튼소리를 지껄이는군요.”
오 노야도 당장 갈란군주를 비호했고, 조금 전까지 부친과 함께 의기양양했던 오일봉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뒤집으려 했다. 이 부자의 금수만도 못한 행태에 오 부인은 조롱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군요. 군주 그리고 당신들. 참 대단하네. 저들이 뭘 말하기도 전에 그렇게 격한 반응이라니. 하나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들이 허튼소리를 한다고 하는데,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