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0화
잠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후당의 좌우에서 두 줄로 서서 나왔다.
오른쪽에선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기세가 드높은 중년 남자와 청년 한 명이 사람들을 이끌고 나왔는데, 그들은 바로 오 노야와 오일봉이었다. 그리고 몇 명의 젊은 부인이 두 사람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기에 앉을 자리가 주어졌다.
“아! 저 여자야!”
이때, 백성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자 공당에 서 있던 오 부인은 고개를 홱 들어 올렸고 이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보니 주 백야와 진씨가 앞장서서 오고 갈란군주는 중간에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조금 창백해 보일 뿐 얼굴은 여전히 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갈란군주도 오 부인을 보자 저도 모르게 치민 화를 속으로 꾹 눌렀다. 그녀는 시어머니였던 오 부인을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고부 관계도 아주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봐도 오 부인이 험상궂고 밉상스럽게만 보였다.
갈란군주는 이를 악물고는 왼쪽으로 걸어가 착석했다. 엽연채와 주운환 등은 뒷줄에 앉았다.
정 부윤이 마른기침을 하고는 입을 떼려 하는데 갑자기 포졸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 그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대인, 채 공공이 오셨습니다.”
포졸은 그리 말하며 오른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정 부윤이 깜짝 놀라 포졸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니 정말 내실의 통로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채결이었다.
그리고 채결이 서 있는 곳은 좌우 양쪽에 자리한 오 노야와 갈란군주 등 참고인들만 볼 수 있는, 아래에 있는 포졸과 백성들은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채결은 정 부윤이 비위를 맞추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미소를 지어 보였고 계속 일을 하라는 의미로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 부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포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공께서 앉으시도록 의자를 가져오거라.”
“예.”
포졸은 대답을 하며 뛰어갔다.
한편, 갈란군주는 채결을 확인하고 나자 내심 득의양양하여 입술을 위로 끌어당겼다. 주 백야와 진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강심설은 낯빛이 하얘졌고 무릎 위에 놓인 손으로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슴이 쉴 새 없이 두방망이질했다. 순간 잊고 있었다. 이 여자가 황실의 군주이며 황제의 손녀라는 것을 말이다!
“크흠!”
정 부윤은 조금 동정하는 눈빛으로 오 부인을 쓱 쳐다보더니 경당목을 세게 휘둘렀다.
“군주, 아래에 있는 사람이 군주의 여종입니까?”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오씨 가문에 계셨을 때 저 여종에게서 수상한 점을 발견하셨나요?”
“발견하지 못했네.”
갈란군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정 부윤이 오씨 가문 사람들을 쳐다보자 오 노야가 알아서 입을 뗐다.
“저흰 모두 군주를 믿습니다. 군주께서 가르친 사람도 믿습니다.”
그러자 오 부인이 픽 냉소를 흘렸다.
“사람 보는 눈하고는. 당신이 믿는 사람이 바로 주씨 가문 어린 공자에게 독을 탄 악독한 여편네란 말이죠?”
공당 밖에서 떠들썩한 웃음이 터졌고, 오 노야와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했다. 진씨는 얼른 갈란군주를 위해 나섰다.
“이 일로 군주를 탓해서는 안 되죠. 그리고 강씨가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도 한몫했어요. 매일 군주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는 말을 해서 만심이가 한순간의 치기로 이런 어리석은 짓을 벌인 거예요.”
이 말이 나오자 밖에 있던 백성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손자가 독살당해 죽을 뻔했는데 어느 할머니가 범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주 부인은 뜻밖에도 범인을 증오하기는커녕 갈란군주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그때 구경하는 백성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친할머니가 손자 편에 서지 않는 걸 보니 어쩌면 손자의 행동이 정말 지나쳤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사람도 있네? 친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말이야. 하긴 이 기회를 이용해 자기 손자를 잘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뭐.”
사람들은 이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심설은 밖에 있는 백성들이 비난을 하지 않고 심지어 누군가는 맞장구까지 치자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학해가 언제 군주를 업신여기고 욕을 했습니까? 그리고 군주가 저희 가문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습니까? 보름도 안 됐는데 대여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독을 씁니까!”
“강씨 너!”
진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강심설을 노려봤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네가 화를 다스리지 못해 화병이 난 건데, 학해는 그걸 군주 탓으로 돌리면서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는지 모른다.”
조용히 있던 주비양이 고개를 돌려 강심설을 쳐다보며 말렸다.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강심설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주비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앤 당신 아들이에요!”
“강씨 너!”
진씨의 이마에 핏대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이 이상 허튼소리를 지껄일 거면 썩 밖으로 나가거라!”
보다 못한 정 부윤이 경당목을 거듭 내리쳤다.
“정숙하시오!”
정 부윤은 마른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경고했다.
“이곳은 공당이니 소란 피우지 마시오.”
한편, 갈란군주는 주비양이 자신을 도와주자 속으로 우쭐했지만 눈물을 닦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 형님이 제게 오해가 많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말다툼을 할 때가 아닙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 돌아가서 얘기해요.”
강심설은 정 부윤마저 갈란군주의 편을 들자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엽연채가 불쑥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얹었다. 강심설은 조금 놀랐지만, 덕분에 마음을 얼마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정 부윤은 다시금 헛기침을 하곤 원래 하던 얘기를 이어 갔다.
“군주와 오 노야는 정말로 만심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셨습니까?”
“그렇네.”
갈란군주가 먼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 노야도 힘껏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아래에 있는 오 부인이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일의가 부상을 입고 도성으로 돌아온 후로 줄곧 네가 약을 달였다. 태의가 몸조리만 잘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지만, 일의는 약을 먹을수록 병세가 더욱 악화됐고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는 일의가 버티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주학해 일을 듣고 나니… 네가 한 짓이 분명하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분노와 원망이 섞인 눈빛으로 갈란군주를 노려봤다.
그러자 정 부윤이 말했다.
“검시관을 들이거라.”
어제저녁에 오 부인이 오일의의 주검을 의장義庄에 보냈고, 정 부윤은 사람을 시켜 검시를 진행했다. 어쨌든 거쳐야 할 과정은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칠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남회색 차림의 영감이 앞으로 나왔다.
“대인을 뵈옵니다.”
“검시 결과는 어떠한가?”
“대인. 생전에 독에 중독되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이 든 검시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 부윤에게 답하자 오 부인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 독약은 연지묵이라고 하는데 의정조차도 진단해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의정이 말하길 연지묵은 흔적도 남지 않고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설령 독살을 당했다고 해도 시신에서는 전혀 이상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중독되었을 당시 뒤통수에 연지색 작은 반점이 생기는 게 전부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어제 이 독에 관해 이미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오 부인이 직접 이 독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걸 듣자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런 독약이 있다니, 정말 무섭군.”
“그러니까 말이야. 난 그런 이상한 독약은 전설이나 책에서만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그러게.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네!”
“정말 음흉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군!”
갈란군주는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흠.”
그리고 정 부윤은 얼른 갈란군주를 도와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검시에서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지묵이란 독이 정말 독에 중독된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증상이 나타난다면, 오 부인은 어떻게 오일의가 만심에게 독살당했다고 증명하실 겁니까?”
그러자 오 부인은 ‘허허’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틀 전에 주씨 가문 어린 공자가 독에 중독된 걸 증명했던 방법으로 지금 제 아들이 중독됐는지 아닌지를 증명하면 됩니다.”
정 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本官도 동의합니다. 연지묵은 보조 약재인 신선한 계내금과 흑양갑이 필요합니다. 주씨 가문에서 도성 북쪽의 닭과 양을 파는 상인들을 전부 집으로 불러 범인을 지목하게 했었죠.”
그는 아래에 있는 포졸 한 명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명했다.
“다섯 명을 데리고 나가 도성 내에서 닭과 양을 파는 상인을 모두 불러오거라.”
“예.”
그 포졸은 즉시 답하고 그곳을 떠났다.
일반적으로 포졸이 증인을 부르러 나가면 그사이에 부윤은 용의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진실을 말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오늘은 채결이 이곳에 있다. 어젯밤 채결이 말로는 제대로 심리하라고 했지만, 황제가 갈란군주의 편이라는 건 어린아이라도 알 사실이었다.
따라서 정 부윤 역시 표면적으로만 공평하고 공정했다. 속으론 이미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뭣 하러 만심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문제를 일으키겠는가.
하지만 정 부윤이 조용히 있는다고 하좌에 서 있던 오 부인까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갈란군주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란아, 네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온 후로 난 널 박하게 대한 적이 없다. 일의가 공무로 타지에 있어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짧고 떨어져 있는 시간은 길며 언이는 병치레가 잦았지.
다른 집 시어머니였다면 널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네가 군주라서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든지. 하지만 난 한 번도 널 그리 대한 적이 없고 언이를 미워한 적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네가 일의를 독살하고 바로 옛 정인에게 재가할 줄이야.”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게다가 만심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 부인께서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절 원망하시는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부인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부인이 제게 그렇게 잘해 주셨는데 제가 어찌 그런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했겠습니까? 당연히 제 여종도 그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