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9화
“다른 사람이 나만큼 중 역할을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소이까? 게다가 내 신분을 이용해 그것들을 겁주지 않았소.”
노승이 그래도 따지고 들자 여양은 그를 노려보며 면박을 주었다.
“그럼 그것들이 네 본모습을 알아봤느냐?”
그러자 노승은 표정이 굳어졌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은병 열 개는 아니지.”
“열 개는 안 된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사발로 손을 뻗더니 뜻밖에도 은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노승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
그러자 주운환은 또 그의 사발로 손을 뻗었다.
노승은 화가 잔뜩 나 그의 손을 탁 치며 말했다.
“아홉 개면 됐소! 더 이상 가져가지 마시오! 이 고얀! 노승조차도 업신여기니 천벌을 받을 것이오.”
그는 그리 말하며 두 손으로 그 깨진 사발을 꽉 움켜잡았고 몸을 돌리더니 주운환의 몸으로 뭔가를 집어 던졌다.
주운환이 그 물건을 받아 손을 펼쳐 보니 어렴풋이 옥패의 모습이 보였다.
“저 빌어먹을 놈.”
여양은 화가 나 그의 뒤를 쫓으려고 했다.
“됐어. 어쨌든 고승이잖아!”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왔는데 그는 다름 아닌 여한이었다. 그리고 그 노승은 법화사의 전 주지 스님인 요공대사였다.
여양은 순간 어이가 없어 침을 또 한 번 갈겼다.
“저러고도 고승이라고? 퉤. 온종일 하는 거라곤 남의 돈을 뜯어내거나 어린아이의 탕후루糖胡蘆를 빼앗는 게 다야. 좋은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들어 보니 마님의 운명도 점쳤다고 하던데.”
그때 여한이 뭔가를 떠올리며 툭 뱉었다.
“어떻게 점쳤는데?”
“아무것도 점치지 못했다고 하더라.”
“에잇 퉤!”
* * *
주운환이 궁명헌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인시寅時(새벽 3시~5시)였다.
그가 씻고 나서 침상에 눕자 작고 따스한 몸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얼른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입맞춤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이렇게 늦게 자는 겁니까?”
엽연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아니요. 하지만 오늘은 부군이 돌아왔는데 얼굴도 안 보고 자려 하니 도저히 잠이 안 왔어요.”
그 말에 주운환은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어서 자요. 푹 쉬어야죠. 우린 내일도 바쁠 것 아닙니까.”
“알겠어요.”
엽연채는 그의 품에 파고들자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주운환은 일찍 일어나 씻고 단장을 하려고 했다. 그는 엽연채를 깨우지 않으려고 주의했지만 엽연채는 즉시 잠에서 깨어났다. 주운환은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어루만지며 도로 재우려 했다.
“더 자요.”
엽연채는 게슴츠레한 두 눈을 뜨더니 반짝거리는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거절했다.
“잠이 안 와요. 그리고 평소에도 이 시간이면 일어나는걸요.”
그녀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고 주운환은 사랑스러운 그녀의 나른해 보이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없이 녹아내렸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한참 동안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그녀를 침상 아래로 내려 줬다.
두 사람이 씻고 나오자 청유는 엽연채를 화장대 앞에 앉혔고 주운환은 그녀 뒤에서 옷을 입었다.
엽연채는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말했다.
“부군. 어젯밤에 재미있었는지 아직 말해 주지 않았어요.”
주운환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아. 저도 부군과 함께 놀고 싶었는데.”
엽연채는 아쉬운지 조그만 입을 실쭉거렸다. 그 모습을 본 주운환은 허리띠를 채우고 돌아서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가볍게 입맞춤했다.
“다음번엔 꼭 데려갈게요.”
엽연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고개를 숙이고 자연스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아기만 태어나면, 지금처럼 매 순간 조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때, 백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복이가 왔는데 백야와 마님께서 준비가 다 되셨냐고 물으셨답니다. 함께 일상원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관아로 가시자고요.”
“가서 대복이에게 전하거라. 부인은 지금 입맛이 좀 까다로우니 우리가 가면 또다시 식사를 준비해야 할 거다. 그러니 따로 먹고 잠시 후에 동쪽 측문에서 만나자고 전하거라!”
“예.”
주운환의 말이 떨어지자 백수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쪽머리를 만지더니 구름 모양 장식과 구슬 장식이 드리워진 해당화 보요를 위에 살며시 꽂고는 단장을 마무리했다. 주운환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우리 아침 식사 하러 가요.”
부부는 작은 반청으로 갔고 혜연과 청유는 신경 써서 준비한 요리를 하나하나 상 위에 차렸다.
부부는 식사를 마친 후 동쪽 측문으로 향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허리를 받치며 한 걸음씩 내디뎠고, 얼마를 걸어가니 저 멀리 진씨와 주 백야가 동쪽 측문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비양도 무표정한 얼굴로 주 백야 뒤에 서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부부는 예를 올렸다.
진씨는 콧방귀를 뀌더니 이렇게 말했다.
“셋째, 넌 몸이 많이 무거운가 본데 거동이 불편하면 따라오지 말거라.”
엽연채는 가볍게 웃더니 딱 잘라 사양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하지만 태의가 지금 개월 수는 많이 움직여야 하는 시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마님!”
진씨가 분해하면서도 반박하진 못하고 있는데, 녹엽이 갑자기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정말 강심설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옅은 노란색 의복을 입고 있었고 여윈 얼굴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주 백야와 진씨를 향해 예를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아… 왔구나.”
주 백야는 마음이 복잡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씨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지금 엽연채보다 강심설이 더 싫었고, 최근에 일어난 일은 마치 가시처럼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저 변변치 않은 게 뭐 하러 온 거지?’
진씨는 선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막 병이 나았는데 뭐 하러 나온 것이냐?”
강심설은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머님이 오신 이유와 같습니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뿐이에요.”
그러자 진씨의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강심설 이것이 웃음거리가 된 갈란군주를 보기 위해 나온 것이 분명했다! 정말이지 사람 죽여 놓고 초상 치러 주는 격이 아닌가!
진씨는 조롱기 가득한 눈으로 강심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갈란군주가 그저께 제대로 고꾸라졌다고 오늘도 그날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생각하는 것도 덜 된 물건답구나.’
진씨가 한마디 하려고 하는데 주 백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알겠다, 알겠어. 너와 부인은 말을 아끼는 게 낫겠다! 에휴. 군주도 왔구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갈란군주가 만심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갈란군주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해 아주 가냘프고 아련해 보였다.
주 백야는 그녀에게 상당히 불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의 안쓰럽고 처량한 모습을 보자 노여움이 가라앉았다. 오히려 멀찍이 서서 갈란군주를 본체만체하는 주비양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동정심이 생겨 옅은 한숨을 쉬었다.
“부군…….”
갈란군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주비양은 다만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주비양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얼른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부군… 제 결백을 증명할 거예요. 좀 있으면 제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요.”
주비양은 순간 싸늘한 눈빛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갈란군주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래도 그가 기회를 주니 완전히 마음이 식은 건 아니란 얘기였다.
반면 강심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전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바늘로 사정없이 가슴을 찔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가슴을 한 겹씩 벗겨 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괴롭기 짝이 없었다. 진작부터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코앞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감당해야만 했다.
“됐다, 됐어. 이제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마차에 오르자꾸나.”
주 백야가 사람들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한 명씩 마차에 올랐고, 잠시 후 관아에 도착한 마차는 곧장 후원으로 들어갔다.
* * *
같은 시각, 공당에선 이미 재판이 시작되었다.
정 부윤은 엄숙한 얼굴로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 하좌엔 포졸들이 좌우로 줄지어 서 있었다. 다들 납작하고 긴 붉은색 몽둥이를 들고 몸은 꼿꼿이 편 채였다. 그리고 주변은 백성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다들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숙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참다못한 정 부윤이 경당목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정숙하시오!”
그러자 밖에 있던 백성들은 전부 조용해졌고 정 부윤이 매서운 눈으로 수하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범인을 데려오거라.”
만심은 백성들의 흥분한 눈길을 받으며 포졸들에게 제압된 채 공당으로 끌려 나왔고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 부인은 만심의 옆에 섰다.
정 부윤은 경당목을 힘껏 내리치더니 형식적인 질문을 했다.
“공당에 나온 사람은 신분과 고발 내용을 밝히시오.”
“전 사망한 오일의의 어머니입니다. 제 아들을 독살한 만심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대인. 소인은 억울하옵니다. 대인께서 명확히 밝혀 주십시오.”
오 부인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만심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저희 군주와… 모든 사람들이 소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증인인 갈란군주, 오씨 가문 식구들을 전부 소환하겠소.”
정 부윤의 말이, 정확히는 ‘갈란군주’라는 이름이 떨어지자 백성들은 다들 목을 길게 뺐다. 남편의 상중에 출가하더니 의붓아들에게 독을 썼고, 이젠 전남편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한 군주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보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