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5화
정선제는 침상에 놓인 도침陶枕(도자기로 만든 베개)을 평왕비에게 냅다 집어 던졌고 도침은 큰 소리와 함께 평왕비의 발치에서 깨지고 말았다.
“이 고얀 것들!”
평왕비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잠시 후,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정선제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음랭한 표정으로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평왕비는 낯빛이 변해 다시 시선을 내리뜨렸다.
“말해 보거라.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방 안에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울렸다.
평왕비는 정선제의 말투를 곰곰이 헤아려 보더니 이를 물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바마마… 이게 다 그 파렴치한 것들이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것이옵니다. 란이는 황실의 군주이며 고귀한 자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변 여종을 그리 악독하게 가르쳤겠습니까?
오 부인이 란이가 재가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 악독한 말로 중상모략하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아바마마께서 란이를 위해 나서 주셔야 하옵니다.”
정선제는 호랑이 같은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에는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으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 간악한 것들이! 감히, 감히!”
평왕비는 몸을 숙이더니 다시 정선제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역시 아바마마는 만인의 귀감이십니다.”
“그래. 이만 나가 보거라.”
정선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평왕비는 눈물을 닦고는 그제야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정선제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분을 어찌하지 못했다.
‘우리 란이가 어떻게 그런 악독하고 파렴치한 일을 했겠더냐. 분명 그것들이 무고誣告한 게지. 오 부인뿐만 아니라 그 간악한 것들이! 감히 사람들 앞에서 갈란이 남편을 살해했다는 허튼소리를 씹어뱉다니! 갈란은 내 손녀다! 대제의 황제인 내 손녀란 말이다!
갈란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정말로 했다고 해도 뭐 어떻다는 말인가? 이런 비천한 자들이 감히 왈가불가하다니!’
황실의 존엄을 침범하는 것은 물론, 황실의 명예가 털끝만큼이라도 손상되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제의 군주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 반박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 어린 환관이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폐하. 정 부윤이 상주서를 보냈사옵니다.”
정선제는 손사래를 쳤다. 보지 않아도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묻고 있을 것이다.
정선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했다.
“정 부윤에게 알리거라. 황실의 군주가 가르친 하인은 그렇게 악독할 수 없으며 짐도 란이를 믿는다. 황자가 법을 어겨도 백성과 같이 죄를 다스리는 법이니 정 부윤에게 올바르게 심리하라고 전하거라. 채결아, 네가 직접 가거라.”
“예.”
채결은 내내 눈을 치뜨고 있는 정선제를 보며 어제 갈란군주가 엽연채를 모함했고, 이 일은 전부터 몇 번이나 반복되어 이미 두 사람은 원수지간이 되었음을 얘기하려고 했다.
원래 갈란군주를 주씨 가문에 시집보냈던 건 태자와 주운환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어 두 사람이 너무 친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지금 갈란군주는 태자와 주운환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와 주운환의 관계마저 미묘하게 변화시킬 듯했다.
채결은 고민했으나 침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 같은 상태의 정선제에게 이런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자신보다 정선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 확신하고도 남았다.
채결은 할 수 없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채결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정선제의 흐릿한 두 눈엔 순간 매서운 빛이 스쳤다.
채결은 노쇠한 허리와 다리를 이끌고 궁 밖으로 나갔다.
채결이 관아의 후당에 도착하자 정 부윤은 벌떡 일어서더니 얼른 공손한 모습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채결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황자가 법을 어겨도 백성과 같이 죄를 다스리는 법이니 올바르게 심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이 공무를 보시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그곳을 떠났다.
정 부윤은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 있던 비장이 말했다.
“그리하라고 하시니 참 잘됐군요.”
하나 정 부윤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황자가 법을 어겨도 백성과 같이 죄를 다스리기는 무슨.’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황제의 뜻은 검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얗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단 뜻이기도 했다. 황제가 직접 처리할 테니! 그렇게 모든 증인과 증언, 증거 등이 자신에게 전해지면 애쓰지 않아도 군주가, 아니 군주의 여종이 결백하다는 게 증명될 수밖에 없었다.
“자, 소환장을 작성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전부 소환하게.”
그러나 이 사건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으니 증인 역시 많이 필요했다. 게다가 다들 와야 할 이유가 적지 않으니 당연히 공당에 직접 얼굴을 비추어야만 했다.
정 부윤의 분부가 떨어지자 비장은 소환장을 작성한 뒤 포졸을 시켜 소환장을 전달했다.
* * *
주씨 가문.
궁명헌의 조그만 배나무 원탁 위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엽연채는 자색 고구마가 들어간 찹쌀 죽을 수저로 휘젓고 있었다.
혜연이 그 모습에 의아하단 듯 물었다.
“이 죽을 드시고 싶은 게 아니셨어요?”
“먹고 싶었어.”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가져오니 막상 먹기 싫어졌구나.”
“마님.”
이때, ‘쿵쿵쿵’ 거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백수가 놀랍고도 기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어?”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정말 지친 모습으로 걸어 들어오는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은색 천운금포天雲錦袍를 입고 있었는데 길을 재촉해 오느라 표정에서 조금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엽연채를 보자마자 그 표정이 확 풀리더니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부인.”
엽연채는 바로 숟가락을 던지고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부군.”
주운환은 그녀가 동글동글하게 동산처럼 부른 배로 빠르게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가슴이 조마조마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곤 쏜살같은 발걸음으로 달려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엽연채는 까르르 웃더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왜 오자마자 절 안아 든 거예요?”
“배가 동글동글하니까요.”
주운환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목에 입맞춤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표정이 경직되더니 볼멘소리를 했다.
“부군이야말로 둥그렇거든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무릎에 그녀를 앉히고는 또 입맞춤을 했다.
“전 동글동글한 게 좋습니다. 아주 귀엽지 않습니까?”
엽연채는 그가 귀엽다고 칭찬해 주자 언짢은 기분이 가셨다. 그래도 괜히 입을 삐죽 내밀며 말머리를 틀었다.
“춥지 않아요? 어서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
그는 말을 타고 오느라 찬 바람을 쐬었고 안개비도 맞은 참이었다.
“알겠어요.”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실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엽연채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엽연채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니 배시시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그렇게 꾸물거리며 침실로 갔고 그녀는 그의 단추를 풀어 줬다. 엽연채는 주운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부부가 그렇게 닭살 돋는 애정 행각을 주고받느라 바빴던 탓에 산뜻한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자 이미 일각이 흐른 후였다.
“나리, 마님. 어서 와서 식사하세요.”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불렀다.
“안 그러면 밥이 식을 거예요.”
주운환이 엽연채를 데리고 반청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엽연채 앞에 놓인 자주색 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엇이냐?”
“자색 고구마를 넣은 찹쌀죽입니다. 마님이 아침에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 끓여 놓았는데 또 안 드시고 싶다고 하네요.”
혜연의 대답을 들은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한 숟갈 떠서 엽연채에게 먹여 줬다.
“자색 고구마는 몸에 좋습니다. 자, 먹어 봐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입 먹고는 이렇게 말했다.
“맛있네요. 더 줘요.”
주운환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고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더 달라고요?”
“네.”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혜연과 청유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말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단둘이 되자 엽연채가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주운환은 총화유병蔥花油餠(파를 넣어 기름에 부친 전병) 한 개를 집어 그녀의 밥그릇에 놓아 주며 대답했다.
“요즘 집안에 일이 너무 많았지요? 그래서 저도 일부러 오늘 휴가를 낸 겁니다.”
그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조그만 손을 잡았다.
집안은 엉망진창인데 자신은 매일 타지에 있었다. 아직 감정을 억제하며 때를 기다려야 하지만 엽연채가 혼자 집에 남아 이런 잡다한 일들과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엽연채도 주운환을 염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부군, 황제 폐하 쪽은… 괜찮겠죠? 지금 집안이 어수선하니 폐하께서도 분명 부군이 이 일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휴가를 보낸다는 걸 아실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도리어 제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면 폐하는 또 다른 생각을 하실 거예요.”
주운환이 저를 안심시키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주운환은 국경을 지키는 이가 아니니 부름을 받지 않았다 해서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법은 없으며, 엄연히 그는 수도에서 일하는 관리였다.
조정 신하들은 경조사가 있거나 집안에 일이 있으면 휴가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주운환 역시 한 달에 사흘 휴가를 냈는데, 이틀은 월초와 중순이었고 마지막 하루는 자유롭게 골라 쉴 수 있었다.
곧 엽연채가 젓가락을 내려놓자 주운환은 놀라 이리 물었다.
“겨우 이만큼만 먹습니까?”
“네. 요 며칠 배가 빨리 차네요. 대신 금방 고파지기도 해서 식사 후 반 시진쯤 지나면 간식을 먹어요.”
주운환은 그녀가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다 하니 한 끼에 많이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하고 있네요. 역시 우리 예쁜 부인입니다.”
이때 청유가 갑자기 안으로 들어왔다.
“나리. 백야께서 나리가 돌아온 걸 아시고는 대복이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나리께서 지금 식사 중이니 잠시 후에 건너가실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운환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 먹었으니 금방 가마.”
부부는 간단히 씻고 나서 일상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