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4화
대문 근처에 오자 멀리서 만소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만소는 만심을 쳐다보며 이렇게 소리쳤다.
“만심 언니, 청렴한 관리가 있으니 분명 언니의 결백을 밝혀 줄 거라는 걸 믿어야 해요. 도련님 일은 언니가 어리석게도 잘못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벌을 내리시겠지만, 그 외에는 언니가 한 일이 아니니 군주와 황제 폐하께서 언니가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게 하실 거예요.”
입에서 헝겊이 치워진 만심은 만소의 말에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알겠어.”
물론 군주가 만소를 시켜 말을 전하지 않았더라도 절대로 이 일을 인정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자신은 이번 생에 제 상전인 군주에게만 충성을 다할 것이고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일만 할 것이었다. 그래도 군주가 자신을 신경 써 준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어멈들은 만심을 제압하여 대문으로 걸어갔다.
대문 근처에선 여전히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다들 주씨 가문이 아직도 용의자를 비호한다며 성토해 댔다. 거기다 오 부인이 데려온 사람들은 맡은 바에 어찌나 충실한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한시도 울부짖음을 멈추지 않아, 문앞은 빈소와 저잣거리가 섞인 몹시도 기묘한 광경이었다.
“어. 나왔다! 나왔어!”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오 부인이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단단히 묶인 채 끌려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냉소를 터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만심이었구나! 그래, 군주가 데리고 있는 여종들 중 네가 가장 충성심이 깊었지.”
만심은 표정이 굳어졌고 싸늘한 눈빛으로 오 부인을 쓱 쳐다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오 부인의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 사나운 눈빛이 스쳤다.
“이!”
그러나 노성을 터트리던 오 부인은 한순간 말을 딱 멈추었다.
만심은 허를 찔려 멍해졌다. 오 부인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기다리던 차였으니까. 오 부인이 맹수처럼 달려들어 자신을 물어뜯기를 기다렸다. 그럼 연약한 여자이고 얼굴도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자신을 동정해 주는 사람들이 분명 생길 테니까. 그런데 오 부인이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조용해질 줄이야!
오 부인은 핏자국이 남은 입술을 위로 당기며 냉소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공당에 가서 부윤 대인께 변명을 해 보거라! 끌고 가거라!”
만심은 분했지만 그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입술을 깨문 채 공당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백성들도 오 부인 등을 따라 우르르 관아를 향해 걸어갔다.
만소는 만심이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남월헌으로 달려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갈란군주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박달나무 탑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만소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만심 언니는 이미 밖으로 내보내졌습니다.”
만소는 갈란군주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어젯밤에 매질을 해서 죽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기어코 인자한 척을 하려다가 이 꼴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갈란군주는 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만심이 살면 어떻고 또 죽으면 어떠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의 결백을 밝힌다는 구실을 대고 있으니 고발해야 할 건 고발할 거다. 하나 만심이 죽는다면 입이 백 개라도 명확히 말할 수 없겠지.”
만소는 깜짝 놀라더니 이렇게 말했다.
“군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갈란군주는 순간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모든 게… 내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 부인 그 늙은 여편네가 분명 구실을 찾아 멋대로 굴 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녀가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말이다.
“분명 엽연채 그 빌어먹을 년이 수작을 부렸을 겁니다! 분명합니다!”
만소는 원망을 거듭 쏟아냈다.
“계략이 끊이지가 않네요. 주학해 일이 있었을 때 군주를 음해하더니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오 부인을 집으로 불러 소란을 피우게 했습니다. 군주께서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요.”
갈란군주는 이마에서 땀이 스며 나왔고 창백한 얼굴을 파르르 떨었지만 결국 차갑게 냉소를 뱉었다.
“일개 후 부인에 불과하다. 주운환을 업고 득세한 여자야. 할바마마께서 그들의 편을 들겠어? 반면에 난 황실의 군주다!”
다만…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이 너무 꼴사나운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 부인이 고발한 사람이 갈란군주였다면 이 사건은 당연히 대리시로 넘겨져 비밀리에 심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만심에게 혐의를 씌웠으니 이 사건은 부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온 천하의 백성들 앞에 폭로되고 말았다.
* * *
그 시각 관아.
정 부윤은 창백한 얼굴로 후당後堂에 자리했다. 비장이 이미 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인지라 정 부윤이 곤란해하며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그 사람들이 이곳으로 온다는 거군.”
“예.”
비장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답했고, 정 부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
‘황제의 친손녀? 오씨 가문과 주씨 가문? 게다가 들어 보니 갈란군주와 진서후 부인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전부 다 골치 아픈 존재야. 최근 2년간 왜 전부 이런 까다로운 사건만 생기는 건지. 정말이지 갈수록 파렴치하고 괴상한 일만 생기는구나.
하나 채 공공도 이 사건을 심리하는 데 동의했으니 그럼 해야지. 게다가 이 일은 황실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고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심리하지 않으면 도리어 갈란군주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얘기를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된다.’
둥둥둥!
마침 문밖에서 북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부윤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떨쳤다.
“공당으로 가자꾸나!”
그가 복장을 단정히 하고 공당으로 걸어가 보니 상복을 입은 오 부인이 아래에 서 있었고 만심은 무릎이 꿇려 있었다.
정 부윤은 자리에 앉아 마른기침을 하더니 경당목으로 책상을 힘껏 두드리고는 관례에 따라 질문을 했다.
“공당에 나온 사람은 신분을 밝히시오.”
“전 정1품 봉호를 받은, 오 부인입니다.”
오 부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1품 봉호는 오일의가 경위영 대장이 되며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이었다.
이후 오일의가 불구가 되면서 황제는 그를 버렸지만, 어쨌든 그가 자신의 손녀사위라는 사실은 변치 않고 당시 본인도 중병을 앓던 때여서 크게 책망하지는 않았다. 또한 오일의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부상을 당해 해직된 것이므로 그 어머니의 봉호를 거두지도 않았다.
정 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오늘 무슨 일로 이곳에 왔습니까?”
“고발할 일이 있습니다. 갈란군주의 노비 만심이 제 아들을 독살했습니다.”
정 부윤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증거는 있습니까?”
그러자 오 부인은 곧장 눈이 빨개질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정 부윤이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하나 제 아들의 죽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오 부인이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이 노비가 이상한 독약을 이용해 주씨 가문 어린 공자를 죽이려 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의정조차도 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죠. 우연히 밝혀진 게 아니었다면 주 공자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
오 부인의 말에 밖에 있던 백성들도 덩달아 한마디씩 했다.
“하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으니 함부로 억울한 누명을 씌울 수는 없습니다.”
“대인, 주씨 가문 어린 공자의 사건을 조사한 방법대로 이 사건을 조사하시지요.”
정 부윤은 맑고 깨끗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증거만 필요한 게 아니라 검시도 해야 하고 여러 증인과 증언 등도 필요하니 우선 용의자를 옥에 가두고 내일 다시 심문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만 물러가시지요.”
오 부인은 범인을 당장 찢어발길 수 없어 속이 편치 않았지만, 그녀도 이 일이 앉은자리에서 즉시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포졸 둘이 만심에게 걸어오더니 그녀를 끌고 갔다.
“에이!”
밖에 있던 백성들은 실망과 불만을 드러냈다. 한창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딱 멈춰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 부윤은 후당으로 돌아온 후 상주서를 작성해 궁으로 보냈다.
* * *
오후가 되기도 전에 궁 안 사람들은 오 부인이 갈란군주를 고발한, 아니 만심이 오일의를 독살했다고 의심받는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 부윤의 상주서는 상부로 착착 넘겨져 정선제의 어서방으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막상 정선제는 자신의 궁침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용탑龍榻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 갈란군주의 일 때문이었다.
궁으로 돌아온 채결이 주씨 가문과 갈란군주의 일을 보고하자마자 정선제는 화가 나 숨도 제대로 못 쉬더니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 의정이 한참을 분주히 움직이고 나서야 정선제는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 병환에서 회복한 후로 지금껏 기절한 적이 없었는데 다시 그리되고 만 것이었다.
“그 불효막심한 것……!”
“폐하. 건강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채결은 초조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중병이 나은 후 정선제는 건강에 별 이상이 없었는데 어쩌면 이대로 다시 나빠질지도 모른단 걱정이 든 탓이었다.
이때, 어린 환관 한 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분명히 어떤 내용을 보고하고자 입술을 떼었음에도 정선제의 모습을 보더니 결국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에 정선제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소인… 소인이…….”
어린 환관은 정선제가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어찌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왕비 마마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채결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거라!”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선제에게 말했다.
“폐하, 옥체를 보전하셔야 하옵니다. 지금은 평왕비 마마를 보지 마시옵소서.”
“캑, 콜록……!”
정선제는 화가 나 각혈을 하더니 호랑이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채결을 노려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여라! 안으로 들여!”
채결은 길길이 날뛰는 정선제를 보며 그가 가슴속의 화를 도저히 풀 수가 없어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되었다. 말릴 수 없단 걸 깨달은 채결은 별수 없이 어린 환관을 불러 명을 전했다.
삼각이 지나 평왕비가 걸어 들어왔고 그녀는 정선제를 보자마자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를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