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3화
진씨는 눈앞이 캄캄해졌으나 이내 매서운 눈빛을 번득였다. 이렇게 됐으니 이젠 정 마마를 안으로 들여보내 만심을 목 졸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는 증언할 수 없으니 말이었다.
그런데 오 부인이 핏발이 설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하하하. 그 여종을 빼돌리지 못하나 보지? 당신의 그 표정을 보니… 그 여종은 이미 죽었다고 날 속이려는 거 아냐? 하하하. 우릴 바보로 아네! 매 맞아 죽지 않았단 건 다들 알고 있어.
그리고 들어 보니 평왕부로 돌려보내려고 한다던데. 어딜 감히? 내가 이미 사람들을 시켜 모든 문을 막아 놨어. 그리고 저 마마가 여종을 빼내려 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멀쩡히 살아 있단 거지! 이제 와 그 여종이 죽었다거나 자결을 했다고 속이려 든대도 누가 믿을 것 같아? 그리고 설령 그 여종이 진짜로 죽었대도 자결일 리가 있어? 당신들이 사람을 죽여 입막음을 한 거지. 그 여종이 내 아들을 독살한 범인이라는 걸 당신들 손으로 증명하는 셈이지!”
오 부인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진씨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속으로 갈란군주를 수없이 욕했다. 그녀는 원래 만심을 때려죽이려고 했는데 갈란군주가 기어이 만심을 평왕부로 보내겠다고 했다. 어젯밤에 죽였다면 어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겠는가?
“무엄하다!”
채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싸늘하게 호통을 쳤다.
“채 공공은 황제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분이시잖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오 부인은 그리 말하며 납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제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범인으로 의심 가는 자를 공당에 고발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 부인이 범인을 감싸 주려고 하니, 이래서 국법이 지켜질 수 있겠습니까?”
“맞아요. 그저 여종을 넘겨받아 공당에 고발하려는 것뿐입니다.”
“맞습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네요. 그 여종은 용의자인데 주 부인은 왜 그 여종을 내놓지 않으려는 거죠?”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더해지자 채결은 눈알을 굴렸다.
오 부인이 사람을 써서 만심이 주씨 가문에서 못 나오게 했다고 말한 탓에 사람들 모두 만심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만심이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판국에서 자신이 더 제지하게 된다면 만심이 오일의를 독살했다는 확신을 주게 될 따름이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채결이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여종을 저들에게 넘겨주어 공당으로 보내시지요.”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대답을 들은 채결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백성들은 채결과 진씨가 의외로 순순히 나와 일이 자신들의 뜻대로 되자 환호성을 지르며 법석을 떨었다.
진씨는 화가 나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정 마마를 포함한 하인들도 우르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강심설을 쳐다봤다.
“재미난 구경거리였죠?”
강심설은 속이 후련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주비양은 냉담한 얼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비양은 곧장 남월헌 쪽으로 걸어갔는데 진씨가 그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진씨와 정 마마도 남월헌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빌어먹을 것. 절대로 그랬으면 안 되는데…….”
창백한 얼굴의 진씨는 쏜살같이 걸어갔다. 그녀의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절대로 그랬으면 안 되는데… 아니지, 뭘 그랬으면 안 된다는 거야.’
진씨는 차마 ‘무엇’을 했으면 안 된다는 건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미 짐작했음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그럴 리가요. 마님, 걱정 마세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정 마마는 계속해서 진씨를 위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후, 그들은 갈란군주의 처소에 도착했다. 문턱을 넘어서자 마침 핏기 없는 얼굴로 밖으로 나오는 갈란군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엔 피로와 자책이 섞여 있었다.
갈란군주는 진씨 등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머님… 부군…….”
진씨는 어두운 얼굴로 갈란군주에게 다가섰다.
“밖에서 벌어진 일은 너도 들었겠지?”
“네…….”
갈란군주는 입술을 깨물었고 낯빛은 한층 백지장에 가까워졌다. 그때, 주비양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더니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오 부인이 한 말이 정말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갈란군주는 깜짝 놀라더니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부정했다.
“어떻게 사실일 수 있겠어요? 부군까지 절 믿지 않다니! 제가 증명할게요. 전 정말 결백해요!”
그러나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주비양의 얼굴엔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싸늘한 한기가 어렸다. 그는 조롱기 섞인 눈으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갈란군주를 빤히 봤다. 눈물로 범벅이 된 추한 몰골을 보고 있으려니 비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주비양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고, 갈란군주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진씨는 주비양이 떠나자 그제야 창백한 얼굴로 갈란군주에게 다가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보거라. 그때… 네 어머니가 날 찾아왔고 내게 오일의가 현몽現夢했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사코 서둘러 널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니… 오일의도 정말 네가…….”
“아닙니다!”
갈란군주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숙한 모습으로 딱 잘랐다.
“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없어요.”
하나 진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추궁했다.
“솔직히 말하거라.”
“제가 없다고 하면 없는 겁니다.”
갈란군주는 초조해하며 이를 악물었다.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여전히 고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씨는 죽일 듯이 갈란군주를 노려보며 다시금 물었다.
“네가 한 말이 정말 사실이냐?”
“어머님은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갈란군주는 조그만 얼굴을 위로 들어 올리며 두 눈을 부릅뜨더니 뜻밖에도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까지 했다.
“제가 오일의를 독살했다면 천벌을 받아 곱게 죽지 못할 겁니다.”
진씨는 갈란군주의 맹세를 듣고 깜짝 놀라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가 억울한 누명을 쓴 거라고 하니 그럼 걱정하지 않으마.”
말을 마친 진씨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마님!”
그때, 만소가 갈란군주를 부축하며 진씨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마님,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저희 군주께서 군주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 봉호는 허울뿐인 봉호가 아닙니다. 군주께서는 황제 폐하의 친손녀입니다. 황가의 여인이시란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알아서 군주의 결백을 밝혀 주실 겁니다.”
하나 진씨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걸어가던 정 마마는 그녀를 따라잡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마님, 군주께서 하신 말씀이…….”
정 마마가 이리 운을 떼자 진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흥’ 콧방귀를 뀌었다.
“맹세까지 한 마당에 거짓을 말하겠느냐? 게다가 황제 폐하의 손녀다! 어찌 됐든 간에 황제 폐하께서 그 앨 보호해 주시고 결백을 밝혀 주실 게다.”
진씨가 확신에 차 대꾸하자 정 마마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살짝 오므리며 동조했다.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갈란군주가 만약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어쨌든 황제가 그녀를 많이 아낀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설령 그녀를 아끼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황가의 여인이고, 고귀한 군주이며, 황실의 얼굴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황급히 일상원으로 돌아가던 진씨 일행이 막 백로 정자를 지나가는데 녹엽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님……! 만심이를 오 부인에게 넘겨야 하는 건가요?”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녹엽의 뺨을 후려갈겨 버렸다.
“이 천비가!”
“악!”
녹엽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러나 아파할 새도 없이 고개를 들어 진씨의 험상궂은 얼굴과 마주해야만 했다.
“귀가 먹은 것이냐? 방금 전에 내가 문밖에서 그 앨 쫓아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쫓아내 버리라고! 그런데 아직도 쫓아내지 않은 게냐? 이런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 쓸모라곤 하등 없구나!”
진씨는 눈을 치뜬 채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고 있었는데 녹엽이 달려와 속을 뒤집어 놓았으니 뺨을 후려갈기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윽…….”
녹엽은 입가에서 피가 흘렀지만, 감히 신음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방금 전 다른 일을 분주히 하느라 자신은 사람들을 따라 문밖으로 나가 오 부인 등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돌아온 사람으로부터 마님이 만심을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정 마마도 자리에 없었다.
자신은 진씨를 곁에서 모시는 직급 높은 여종이긴 하지만, 전부터 그다지 총애를 받지 못했기에 일을 할 때도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만심을 내보내는 일은 당연히 확실하게 물어보기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뺨을 맞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서 가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뭐 하는 게냐?”
정 마마는 녹엽을 노려보더니 그녀를 냅다 걷어차 버렸다. 녹엽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치마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녹엽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천비는 정말 녹지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구나.”
녹엽은 눈물을 철철 쏟으며 땔나무 곳간으로 급히 달려갔다. 보니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막일을 하는 두 어멈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 여종을 오 부인에게 넘기세요.”
녹엽은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말을 전했고, 이미 소식을 들은 두 어멈은 얼른 문을 열어 줬다.
만심은 두 손이 뒤로 묶여 있었고 입도 가늘고 긴 헝겊으로 틀어막혀 있었다. 그녀는 녹엽을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밖을 지키는 두 어멈이 계속해서 입을 놀려 만심도 이미 얘기를 들은 터였다. 오 부인이 주씨 가문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있고, 그 와중에 군주가 오일의를 독살한 일까지 폭로됐다는 것을 말이다.
‘암만 그래도 주씨 가문이 진짜 나를 넘기려고 하다니!’
만심은 겁에 질렸지만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두 어멈의 억센 손길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