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1화
엽연채가 일어서자 강심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여위어 반쪽이 된 주학해의 얼굴을 쓰다듬더니 두꺼운 옷을 입힌 다음,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궁명헌을 나온 엽연채 일행은 일상원으로 갔다.
그 시각, 갈란군주는 창백한 얼굴로 일상원에 앉아 있었고 채결도 그곳에 서서 갈란군주에게 훈화를 전하고 있었다.
“군주께서 여종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여종이 그런 악랄한 짓을 벌였으니 황제 폐하께서 벌로 한 달 동안 벽을 보고 반성하며 『금강경』을 백 번 필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알겠네.”
갈란군주는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셋째 마님과 큰마님께서 학해 도련님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씨는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가 맨 앞에 섰고 그 뒤로 강심설이 주학해를 안고 들어오고 있었다. 진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학해를 불렀다.
“학해야. 많이 좋아진 게냐? 이 할미가 걱정이 되어 죽는 줄 알았다.”
그러자 엽연채가 진씨를 쏘아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형님이 여종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처소로 달려오셨어요. 저희는 ‘어머님께서 왜 여태 안 오시지. 학해를 그렇게나 아끼시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들어 보니 다행히 어머님께서 아직 학해에게 관심이 있으셨군요.”
진씨는 채 공공 앞인데도 미소를 짓고 있기가 조금 힘이 들었다. 이는 자신이 주학해를 아끼는 척한다는 공격 아닌가.
“공자가 무사하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채 공공은 적당한 때에 입을 열었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따지자면 갈란군주의 친정 식구 쪽 사람이었다. 그 역시 당연히 주학해가 죽기를 바랐다.
채 공공이 위로의 말을 더 건네려고 하는데 갑자기 쿵쿵쿵 하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마님! 큰일 났습니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여종은 방 안의 사람들과 채 공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진씨는 성난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 고얀 것. 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냐? 채신머리없이.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
“오 부인이 실성한 사람처럼 저희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계십니다.”
진씨는 깜짝 놀라 안색이 확 변했다.
“뭐라? 어떤 실성한 여편네가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게냐?”
“오 부인이요!”
여종이 다시 고하자 갈란군주는 저도 모르게 몸 양쪽에 둔 손을 꽉 틀어쥐었다. 심장도 쿵쿵 뛰어 그녀는 온 신경을 그 여종에게 곤두세웠다.
진씨도 조금은 예상이 된 모양이었다.
“오 부인이? 그 사람이 왜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저도 모릅니다. 문을 지키는 대호가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오 부인이 대문 밖에서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고 그 주위로 백성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종은 울상을 지으며 난처해했다.
“대호와 다른 하인들이 아무리 쫓아내도 가지 않고 계십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야? 그 막돼먹은 여인이… 왜, 왜 또 와서 소란을 피운다는 말이냐?”
낯빛이 가매진 진씨는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채결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공공, 우스운 꼴을 보였군요.”
“부인, 그리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둘러 가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채결이 희끗희끗한 눈썹을 찌푸리며 이리 권하자 진씨는 자리를 박찼다.
그의 말대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집안은 이미 충분히 망신을 당했는데 지금 오 부인이 와서 또 소란을 피운다고 하니 그녀는 마음이 정말 조마조마했다.
진씨는 얼른 정 마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채결도 함께 따라갔다.
엽연채의 눈빛엔 짙은 조롱기가 스쳤다.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기려나 보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갈란군주를 쓱 쳐다봤다. 갈란군주의 조그만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변해 있었고 손도 주먹을 꼭 쥔 채였다.
엽연채의 시선을 느낀 만소가 갈란군주를 부축했다.
“군주…….”
“가자꾸나!”
그런데 갈란군주가 향한 곳은 대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소의 손을 잡고 황급히 문을 나서더니 남월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엽연채는 몸을 돌려 강심설에게 말했다.
“형님, 저희도 가 보죠.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나 본데요!”
강심설은 어리둥절했다. 갈란군주는 어쨌든 황실의 군주이고 지금 채결도 이곳에 있으니 그녀는 큰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 부인이 아무리 작정하고 왔대도 그저 군주의 체면을 깎는 정도에 불과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엽연채가 끌어당기자 강심설은 할 수 없이 주학해를 만월에게 맡기고 엽연채와 함께 문을 나섰다.
함께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보니 집안 여종들이 하나같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대청을 나오자마자 주비양도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비양은 몹시 지쳐 보였다. 어디를 갔던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눈언저리가 거무스름하게 그늘져 있는 걸 보니 밤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한 듯했다.
강심설은 그를 보자 가슴이 찌릿했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결국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비양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심설을 보더니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엽연채와 강심설이 밖으로 나가 보니 대문 앞 계단 위쪽에 서 있는 진씨와 채결이 보였다.
다음 순간,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구경거리를 예상했던 엽연채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 부인이 상복을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닥에 앉아 목청껏 통곡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흙이 잔뜩 묻은 관도 대문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이 진기한 광경에 당연히 백성들은 대문 주위를 빼곡이 둘러싼 채 수군덕거리는 중이었다.
“내 아들을 돌려내! 내 아들을 돌려내라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내 새끼. 저 악독한 것에게 독살을 당한 거였어! 독살당한 건 그렇다 쳐도 네가 죽자마자 바로 옛 정인에게 시집을 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오 부인의 외침에 엽연채와 강심설은 깜짝 놀라 멍한 얼굴로 이 광경을 쳐다봤다.
특히나 엽연채는 오 부인이 와서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그저 사람들을 좀 데려오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의 무덤마저 파헤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오 부인은 오일의의 관을 주씨 가문 대문 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았다.
이보다 더 강력한 시각적 효과가 어디 있으랴. 주위의 백성들이 이곳을 둘러싸고 구경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강심설은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지만 속으론 형용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때, 낯빛이 하얗게 질린 진씨가 온몸을 푸들푸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억지 부리지 마세요! 왜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당신 아들은 다리가 잘려 병으로 죽은 건데 왜 남의 집 앞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겁니까?”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 내 새끼…….”
오 부인은 진씨는 상대도 하지 않고 주위에 있는 백성들에게 외쳤다.
“다들 어느 쪽이 맞는지 시비를 따져 보세요! 누가 옳은지 말이에요! 흑흑… 나도 내 아들이 병으로 죽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주학해 일을 통해 알게 됐어요……. 내 아들은 갈란 저 악랄한 것에게 독살당한 거예요!”
그러자 백성들은 소스라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독살당했다고? 남편을 살해했다는 거야?”
“아니지. 남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죽인 다음 바로 재가했다는 거지.”
“허튼소리 하지 말거라!”
지켜보던 채결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으나 오 부인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갈란군주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주학해를 독살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내 아들도 죽였어요. 내 아들의 죽음을 정확하게 조사해 주지 않는다면 난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머리를 박고 죽을 거예요.”
“이런 무례한 사람을 봤나!”
진씨가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인파 속에서 오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오 노야를 홱 쳐다봤다.
“오 노야.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댁 부인이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게 내버려 두다니요!”
“가족은 무슨……! 내 안사람을 제외하고는 우리 오씨 가문 사람이 아닙니다.”
오 노야는 차갑고 어두운 얼굴로 얼른 오 부인 곁으로 달려갔다.
“이 사람이 참, 돌아갑시다.”
며칠 전만 해도 오 부인은 잠자코 있었고 허튼짓을 벌이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아 오 노야는 그녀가 단념했으며 집안도 차차 안정돼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부인이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파헤친 아들의 관을 주씨 가문 대문 앞에 옮겨 놓고 고성을 지르며 큰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까지 여럿 고용해 대성통곡을 하고 있다니 그는 크게 놀랐다.
“돌아가요.”
오 노야와 서자인 그의 둘째 아들 오일봉은 이미 앞으로 달려 나와 오 부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 부인이 눈이 새빨개질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뜨더니 오 노야의 손을 잡고는 사정없이 그의 손을 물어 버렸다.
“으아악!”
오 노야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을 물어뜯는다!”
오일봉은 깜짝 놀라 오 부인의 머리를 밀쳤다.
“이런 막돼먹은! 놔요! 놓으라고요!”
오일봉에게 맞은 오 부인은 몸이 휘청이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퉤’ 소리를 내며 살덩어리를 내뱉었는데 그건 오 노야의 것이었다.
“아아악! 나 죽네……! 세상에나! 사람을 물어뜯다니!”
오 노야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고, 주위에 있던 백성들도 덩달아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끔찍해라!”
오 부인은 선혈로 물든 얼굴을 들어 올리더니 깔깔거리며 냉소를 짓고는 한껏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영요! 당신은 내 아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갈란군주가 출가하는 걸 도왔어. 그러고도 일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어? 가증스러운 사람 같으니라고! 난 당신 살점을 뜯어먹고 당신 피를 마셔서 복수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