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9화
“나리. 얼토당토않은 말은 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정말로 그 애가 벌인 일이 아닙니다. 여종이 눈이 뒤집혀서 벌인 짓이죠. 여종과 주인의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엽씨만 봐도 그래요. 엽씨에게도 추길이라는 애가 있지 않았습니까? 또 매화인가 행화인가 하는 애도 있었죠. 한 아이는 엽씨와 십 년 동안 함께한 대시녀였고 다른 한 명도 엽씨 가문에서 데려온 충복이었어요. 하나 결국 두 아이는 함께 쫓겨났습니다. 왜 그랬나요? 주인과 마음이 맞지 않아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쫓아냈겠습니까?”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잔뜩 오므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만심이도 란이와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겁니다. 이 일로… 란이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럼 만심이는 어찌했소? 곤장은 쳤소?”
“네.”
주 백야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천한 노비가 감히 상전을 독살하려고 하다니. 불구가 되거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질을 한 다음 도성 밖으로 쫓아 버리거나 팔아 버리면 그만이오.”
“그 애는 평왕부 사람입니다. 노비 문서도 평왕부에 있고요.”
그러자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놀라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갈란이 우리 가문으로 시집을 왔는데 어째서 여종의 노비 문서가 아직도 평왕부에 있다는 말이오?”
주 백야가 자꾸 추궁하니 진씨도 언짢았다. 일은 갈란군주가 저질렀는데 뒤처리는 본인이 해야 하니 말이었다.
물론 만심의 노비 문서는 당연히 갈란군주 손에 있었다. 하지만 갈란군주가 만심을 보호하려고 하니 하는 수 없이 갈란을 위해 이리저리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나리도 아시겠지만 평왕비가 계속 과부로 지내고 있고 란이를 아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란이는 만심이가 자신을 대신해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도록 만심이를 평왕부에 남겨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여 평왕부로 돌아가 재가하는 날을 기다릴 때 노비 문서를 평왕비에게 주었던 겁니다.
그런데 란이가 재가하는 걸 두고 사람들이 비난을 하니 만심이가 잠시 란이 곁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잠시만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내일 이른 아침 만심이를 평왕부로 보내 왕비께서 처리하시도록 해야겠어요.”
주 백야는 꽤나 불만스러웠지만 사정이 그렇다니 더는 따지고 들려 하지 않았다. 추잡한 일이 더욱 크고 시끄럽게 번져 도저히 덮을 수가 없게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말이지 불운한 일을 몰고 오는 물건이야.”
주 백야는 탄식했다.
“나리, 무슨 불운한 일을 몰고 온다는 겁니까? 바로 발견했으니 운이 좋은 거죠.”
이미 한배를 탔으니 진씨는 갈란군주를 거듭 대변했다.
“란이는 우리 주씨 가문에 행운을 가져다줄 겁니다. 그 애가 있으면 우리 주씨 가문은 점점 더 번영할 거예요. 두고 보세요!”
주 백야는 표정이 굳어졌지만 진씨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더니 더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남월헌.
갈란군주는 차갑고 어두운 얼굴로 탑상에 앉아 있었고 만소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녀 옆에 시립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만심이는 땔나무 곳간에 갇혀 있습니다.”
만소가 조심스럽게 고해 오자 갈란군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비양을 찾았다.
“부군은?”
“서차간에서 나가신 후 주학해가 있는 서쪽 곁채로 가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서재로 가셨어요.”
이 말에 갈란군주는 분노에 찬 눈빛을 번득였다.
“쓸모없는 사람. 내가 자기를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하는데… 그 사람은……!”
‘날 믿지 않다니! 아들 때문에 날 믿지 않았어.’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런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주학해는 주비양의 아들이었다. 자식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어떻게 일을 꾸민 쪽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군주, 화 푸세요. 세자야의 마음은 앞으로 천천히 돌리면 됩니다. 지금이야 아들이 하나뿐이니 당연히 중요하게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앞으로 군주께서 나리에게 아들을 안겨 주시면 나라의 마음은 전부 군주에게 향할 겁니다. 사내들이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내들은 대부분 계모를 얻으면 자신도 계부가 된다. 특히 새로 아들을 얻게 되면 전처가 낳은 아이는 초개를 보듯 하찮게 여겼다. 그러니 어디 아이의 생사를 신경 쓰려고 하겠는가?
“네 말이 맞다.”
만소의 위로에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참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엔 온유한 기색이 조금도 어려 있지 않았다.
“다만… 엽연채! 하, 정말이지 아주 대단한 계집애야. 그렇게 큰 함정을 파고 줄곧 날 모해할 줄이야.”
그녀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성난 표정을 지었다. 만소도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어요.”
“그 여인을 몇 번 봤는데 볼 때마다 책을 읽고 있었다.”
갈란군주는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의서나 잡스러운 약서藥書인 듯했다.”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죠. 때마침 연지묵을 봤던 거겠죠?”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엽연채가 어떻게 연지묵을 알겠는가?
“그 여인은 여기서 끝내지 않을 게다.”
만소는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오늘 그 소저들을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갈란군주는 금방이라도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 같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만심이를 보러 가자꾸나.”
진씨는 원래부터 갈란군주 편이라 전심전력으로 그녀를 보호했고, 주 백야는 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갈란군주는 외출 금지를 당하지 않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만소는 등롱을 들고 갈란군주와 함께 문을 나섰다.
남월헌을 나온 두 사람은 땔나무 곳간으로 갔다.
만심은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제 심한 매질을 당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상처를 입었고 또 추운 상태로 하룻밤을 보냈으니 몹시 초췌해 보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만심이 눈을 뜨고 보니 갈란군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만심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군주.”
갈란군주는 몹시 초췌해 보이는 만심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만심아… 미안하다…….”
“아닙니다. 군주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기꺼이 바칠 겁니다.”
만심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는 갈란군주의 말을 들으니 그녀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제아무리 충성심이 남다르다 해도 다른 이를 위해 대신 죄를 뒤집어쓰는 건 역시나 괴로운 일이었다.
갈란군주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만심은 어릴 때부터 쭉 함께 해 온지라 자매나 다름없는데, 자신 때문에 이렇게 고초를 겪고 있으니 말이다.
“만심아… 걱정 말거라. 평왕부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머니께서 널 잘 돌봐 주실 거다. 후에 평왕부 밖으로 보내 주실 거고.”
“예.”
만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갈란군주가 분명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군주와 헤어지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만심의 표정을 보자 갈란군주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눈물을 멈추려고 애를 썼다.
‘내가 어떻게 네게 활로를 열어 줄 수 있겠니! 만심아, 넌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죽지 않으면 안 돼!’
갈란군주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낮췄고 순간 매서운 눈빛을 보였다.
오늘 그녀가 일부러 만심을 찾아온 것은 여러 해를 함께 지내며 쌓은 주종의 정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만심을 당장 때려죽이지 않고 평왕부로 보내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만심이 죽기만 하면 모든 일이 종결되는 셈이었다.
“힘들겠지만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거라. 나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구나. 하룻밤만 참으면 돼. 내일 평왕부로 돌아가면 다 좋아질 게다.”
“알겠습니다.”
갈란군주의 도닥거림에 만심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갈란군주와 만소는 땔나무 곳간을 나와 남월헌으로 돌아왔다.
갈란군주가 차갑고 어두운 목소리로 작게 일렀다.
“가서 문방사우를 가져오너라. 어머니께 서신을 보내야겠다.”
“예.”
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온 도성이 발칵 뒤집혔다. 찻집마다 어제 주씨 가문 어린 공자가 독살당할 뻔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사람들은 주씨 가문 어린 공자가 갈란군주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병이 난 게 아니고, 갈란군주를 모함하기 위해 엽연채가 어린 공자를 병들게 한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실상은 갈란군주가 어린 공자에게 독을 쓴 것이었다.
그렇다. 여종 따위가 한 짓이 아니라 갈란군주가 벌인 짓이라며 다들 혀를 찼다. 애초에 여종한테 떠넘긴다고 누가 믿겠는가?
주씨 가문이 있는 큰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진귀루는 갈란군주 일로 아주 떠들썩했다.
“원래부터 좋은 여인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의붓아들을 독살하려고 했겠지.”
“정말 여종이 그랬겠어? 누굴 속이려는 거야? 그 여인이 직접 한 거지.”
“정말 악독하고 의뭉스러운 여인이야! 얼마 전에 그 집 세자 부인이 병이 나지 않았어? 그런데 밖에 이런 소문이 퍼졌잖아. 세자 부인이 화병이 난 거면서 그 여인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자신이 병이 든 거라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렸다고 말이지.
그때 그 여인이 얼마나 억울해했는지는 다들 들었지? 그 여인이 눈물 좀 짰다고 그 세자 부인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스무 대나 맞았다는 이야기.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이득을 봐 놓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그 여인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주씨 가문 사람들이 병든다는 소문이 또 퍼졌잖아? 이야기를 들은 주 부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진서후 부인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대. 심지어 의정을 불러와 이것저것 조사하게 했고. 진서후 부인이 그 여인의 평판을 망가뜨리고 모함하려 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말이야!”
“매번 그 여인이 억울하다고 할 때마다 상대는 늘 주 부인에게 핍박을 당하네!”
사십 대로 보이는 한 아낙이 쯧쯧 혀를 차더니 갈란군주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이렇게 말했다.
“형님은 정실부인이니 저보다 위에 있습니다. 아, 전 너무 억울해요. 형님이 병이 났는데 제 불운한 기운 때문이라고 하네요. 어머님, 절 위해 형님을 때려 주세요! 의붓아들도 눈에 거슬리니 그 녀석도 제거해 주세요!
마침 동서가 아이를 데려갔는데 이 동서란 것도 아주 마음에 안 드네. 의붓아들이 동서 손에서 죽게 만들면 의붓아들도 제거하고 동서에게 화를 전가할 수 있고 형님도 화병으로 죽게 만들 수 있으니 일석삼조잖아!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해. 아, 어머님. 전 너무 억울합니다. 의붓아들이 병이 들었고 이낭들도 병이 들었는데 분명 동서가 제가 식구들을 잡아먹는 거라며 절 모함하려는 겁니다. 어머님, 절 위해 동서를 때려 주세요!”
이 아낙의 목소리와 손놀림은 너무 과장되어 부자연스러웠지만 대당 안의 사람들은 모두 떠들썩하게 웃어 댔다.
“하하하하하!”
한 영감이 웃음을 멈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흉을 보았다.
“그러면서 황실의 군주란 말이지. 퉤! 이게 황실의 위엄이란 말이야?”
“아무리 군주라고 해도 아직 어리니 첩실들이나 하는 행동을 보이는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