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78화 (678/858)

제678화

나 의정은 얼른 청유의 손에 들린 상자를 가져왔고 이 태의와 육 태의도 다가서서 분가루처럼 생긴 그 가루를 유심히 살펴봤다.

“하하, 참 대단한 계략을 꾸몄어요!”

청유가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땐 분가루처럼 보이니 다른 상자들과 함께 놔둔 거죠. 의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요.”

나 의정은 그 가루를 손에 묻혀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분가루는 아니군.”

나 의정은 번개처럼 눈을 반짝이며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주비양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요.”

그의 차가운 말투에 갈란군주는 깜짝 놀라 넋 나간 듯한 모습으로 주비양을 꽉 움켜잡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전 모르는 일이에요……. 이런 게… 어떻게 제 처소에 있었는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전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세자, 오해하지 마세요.”

만심은 쿵 무릎을 꿇더니 창백한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소, 소인이 했습니다. 군주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흑흑.”

만심은 그리 말하며 슬피 울부짖었다.

“마, 만심아… 정말 네가 그런 거니? 네가 이런 일을 벌이다니!”

갈란군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다시 주비양을 붙들었다.

“만심이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전 모릅니다… 전 몰라요……!”

제민과 원남옥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규수들은 이미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다들 후원에서 컸는데 이 정도 일을 못 알아보겠는가. 주인의 지시도 없이 감히 감히 사람 목숨을 해치는 큰일을 벌일 수 있는 여종은 없었다.

“부군…….”

갈란군주는 애절한 눈빛으로 주비양을 쳐다봤다.

하지만 주비양은 평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해 주며 그녀를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더니 옷소매를 홱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했다.

‘이게 무슨 뜻이지? 내가 범인이라고 믿는단 말인가?’

진씨는 낯빛이 창백했고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젠 그녀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갈란군주가 벌인 짓거리였다.

그러나 갈란군주보다도 엽연채가 더욱 밉살스러웠다. 이건 원래 엽연채의 죄여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전부 갈란군주의 죄가 되었으니 화가 날 뿐이었다.

진씨는 마음이 독하고 하는 짓이 악랄한 갈란군주에게 화가 났다가 또 갈란군주의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웠다.

‘이리 큰일을 벌이고도 엽연채 하나 해치우지 못하다니.’

“어머님… 전 만심이가 이런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갈란군주는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더니 진씨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지금은 주비양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우선 이쪽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진씨는 평왕비가 자신에게 장담했던 일을 떠올렸다. 애초에 자신이 왜 갈란군주를 며느리로 들였는가. 그건 주운환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였다.

“알겠다.”

진씨는 그리 말하며 매서운 눈빛으로 만심을 노려봤다.

“이 천한 노비가 감히 학해를 독살하려 하고 란이까지 연루되게 했구나.”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만심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녀와 갈란군주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자매처럼 친한 사이였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에선 당연히 그녀가 갈란군주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왜… 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주 백야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건 도련님이 적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고, 지난번에… 군주께서 큰마님을 병들게 한 거라고 욕을 하셨습니다. 너무 독한 말을 하셔서 제가 순간 눈이 뒤집혔습니다……. 나리, 마님… 다시는 감히 이런 짓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엽연채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주께서 한 게 아니라 정말로 만심이 한 걸까요?”

그러자 진씨가 격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물건이 만심의 방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이 애가 한 짓이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아무리 믿고 부리는 심복이라고 해도 때론 상식에서 벗어난 짓을 벌이기도 한다. 모든 일은 만심이 벌인 것이니 란이와는 무관하다. 란이는 그저 여종 단속을 소홀히 한 것뿐이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놓고 야유하는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이건 진씨와 갈란군주가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 훨씬 더 볼썽사나워져도 이쪽을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어리둥절했고 엽연채가 웬일로 말이 참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분명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기어코 모든 죄를 갈란군주에게 덮어씌우려고 했을 것이다.

엽연채가 밖으로 나가자 제민과 원남옥 등도 우르르 따라 나갔다.

“어……?”

주 백야도 진씨와 마찬가지로 오늘따라 엽연채가 말이 아주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연채에게 너무 따지지 말라고 설득할 기회도, 큰 문제를 작은 문제로 축소할 기회마저 가질 수 없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주 백야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만심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했다.

“이 고얀 것. 감히 독을 타다니! 해독약. 해독약은 어디 있느냐!”

만심은 낯빛이 확 변했다. 그녀는 주학해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지금 해독약을 내놓지 않으면 갈란군주도 주씨 가문에서 지낼 수 없게 된다.

만심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낙타의 발 뼈와 개구리 발톱을 물과 함께 끓이면 됩니다…….”

“계략을 아주 잘도 꾸몄구나!”

주 백야가 아무리 온유하다지만, 하나뿐인 친손주를 죽이려 한 원수 앞에서도 그럴 리가 있는가. 그는 만심의 얼굴을 냅다 걷어차고는 하인에게 명했다.

“곤장 30대를 사정없이 내리친 후 땔나무 곳간에 가둬 놓거라.”

만심은 아연실색했다. 그리 많이 맞게 되면 그녀는 죽고 말 것이었다. 갈란군주도 창백한 얼굴로 만심을 위로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지금 당장은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의정, 어서 학해를 보러 가 주게.”

주 백야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 의정을 부르자 나 의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다른 두 명의 태의와 함께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람이 떠나자 진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갈란군주를 노려봤다.

“잘하는 짓이다!”

갈란군주는 낯빛이 창백해졌지만 모든 일이 폭로된 이상 더는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제가 한 일입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이!”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갈란군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진씨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머님, 제가 부군과 어머님의 자식들에게 무한한 영광을 가져다줄 사람이란 걸 똑똑히 아셔야 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곧, 보름도 안 되어 주운환이 가진 모든 것이 부군에게 돌아갈 거예요.

부군이 모든 걸 얻게 되면 어머님과 큰아가씨도 더는 저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아가씨의 황후 자리도 굳건히 다질 수 있을 테고요.

이 모든 걸 가져오는 사람이 누굽니까? 접니다. 그런데 설마 제가 이 모든 걸 나중에 학해에게 주겠습니까? 나중에 저와 부군 사이에도 아이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제가 가져온 건 저와 부군의 아이에게만 줄 겁니다.

그 아이도 어머님의 손자입니다. 학해는 어머님의 손자이지만 제 아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것들을 그 애에게 줘야 합니까?

저도 어머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님도 집안에 있는 건 털끝 하나도 서자들에게 주려고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뿐만 아니라 서자가 누리게 된 것도 빼앗아 오고 싶어 안달이시죠. 어머님도 못 하시는 걸 왜 저보고는 강요하십니까?”

진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방금 전에 있었던 언쟁 때문에 낯빛이 아직 창백한 갈란군주는 고개를 살짝 쳐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전 군주이고 제 조부님은 황제 폐하라는 걸 설마 잊으셨나요? 할바마마께서 제가 이런 말 못 할 손해를 보는 걸 원하실까요? 전 학해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건 저희 할바마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씨는 조금 놀랐지만 갈란군주의 말을 이해했다.

정선제는 당연히 누군가가 자기 손녀의 이익을 위협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게 강심설이든 주학해이든 말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화병이 난 강심설이 밖에다 소문을 퍼뜨린 일이 벌어진 후, 정선제가 곧장 갈란군주에게 여의를 보냈던 것이다.

만약 이번에 주학해가 정말로 죽게 된다면 정선제는 어쩌면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를지도 몰랐다.

“만심이는… 곤장을 치세요. 하지만 이 애는 우리 평왕부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갈란군주가 뒤돌자 만심과 만소는 얼른 그녀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갈란군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정 마마가 앞으로 나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마님, 아무래도 학해 도련님에 대한 마음을 접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씨는 이해관계를 따져 보더니 하루속히 갈란군주와 주비양을 합방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적자가 또 태어나면, 그 아이는 출신이 귀할 뿐만 아니라 황실의 피가 흐르니 황제가 기뻐하며 작위를 줄지도 몰랐다.

솔직히 정국백부의 작위는 주비양과 그의 자손들에게 세습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앞으로 태어나게 될 자신의 손자가 또 다른 작위를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진씨는 결심했다. 앞으로 강심설과 주학해 일에 더는 관여하지 않기로 말이다.

궁명헌을 나온 진씨는 하인에게 만심을 데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 30대를 때리게 했다.

하지만 갈란군주가 이미 사람을 시켜 만심의 엉덩이에 보호대를 깔게 했고 진씨도 매질하는 마마에게 살살 치라고 일러 뒀기 때문에 소리만 크게 들릴 뿐 충격이 제대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만심은 30대를 맞고도 찰과상만 입었고 당연히 출혈도 심하지 않았다.

매질이 끝나자 진씨는 하인을 시켜 만심을 땔나무 곳간으로 보냈고 내일이 되면 풀어 주라고 했다.

진씨가 일상원으로 돌아와 보니 주 백야는 어두운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진씨를 노려보며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떻게 저런 물건을 집안으로 들인 것이오?”

진씨는 낯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나리,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이 일은…….”

“이 일이 어떻게 여종이 벌인 일이겠소. 이건 갈란이 벌인 짓이오. 그 애가 학해를 이리 병들게 만들었소. 하마터면 학해가 죽을 뻔했단 말이오. 이런 재수 없고 악독한 것을 봤나!”

주 백야는 진심으로 손자를 사랑하고 아꼈기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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