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7화
한편, 진씨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상관운 등도 경악한 얼굴로 갈란군주를 쳐다보고 있던 그때, 청유가 목소리를 냈다.
“보셨죠? 갈란군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야말로 도둑이 도둑을 잡으라고 소리치는 격이죠.”
궁지에 몰린 갈란군주는 낯빛이 파리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술도 파르르 떨어 댔다.
“전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흑흑… 엽연채……! 네, 네가 감히 증인을 매수했구나.”
진씨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다 거짓이다! 엽연채. 분명 네가 벌인 짓거리인데 증인을 매수해서 란이에게 떠넘기는 게지.”
“하.”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이제 증인과 물증이 모두 갖춰졌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님은 여전히 갈란군주를 도와 절 모함하시려는 겁니까? 역시 제 부군이 어머님의 친자식이 아니라 절 이렇게 미워하시는 건가요?”
“이!”
진씨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주도 참 대단하세요! 황실의 군주이고 본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어찌 평처의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셨겠어요? 군주께서 시집온 후로 형님은 화병이 났어요. 그런데 군주는 이를 이용해 군주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형님이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밖에 퍼뜨리셨죠. 형님에게 화를 전가하기 위해서요.”
“허튼소리 하지 마!”
갈란군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더니 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난 이미 충분히 곤란한 상황이야. 그런데 왜 스스로의 평판을 망가뜨리려고 하겠어……. 내가 왜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려고 하겠어……. 반편이도 아닌데 자기 자신에게 손을 쓸 리가…….”
“하지만 결국에 이득을 본 건 군주시잖아요. 아니에요? 소문 때문에 다들 형님을 악독한 사람이라고 욕했어요. 막상 그 악독하다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스무 대나 맞아 깊은 병이 든 상태예요. 이게 악독한 사람의 최후인가요?”
엽연채의 말에 상관운 등은 일제히 갈란군주를 쳐다봤고, 특히 제민은 조롱기 가득한 눈으로 갈란군주를 노려보았다.
“이 독한 것. 네가!”
진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입 다무시오!”
하지만 그 순간, 주 백야가 호통을 치며 진씨를 제지했다. 잠시 움츠러들었던 진씨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엽연채가 이어서 말했다.
“군주는 예전부터 일 처리가 신속하고 기회를 잘 잡으셨죠. 제가 학해를 궁명헌으로 데려오자 군주는 이를 큰 기회라고 보시고 연지묵을 이용해 학해에게 손을 쓰신 겁니다.
저에게 맡겨진 학해가 갑자기 비명횡사하게 되면 적장자를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형님도 분명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목숨을 잃을 테니까요. 더구나 저도 죄를 짓게 되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인 거죠! 이런 좋은 기회를 어디 가서 찾겠어요?”
상관운과 두 규수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고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민은 쯧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진짜 악독하네! 역시 남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바로 재가해 버린 여인다워!”
“이!”
갈란군주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몸에서 힘이 빠지는지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휘청이는 순간 주비양의 옷을 꽉 움켜잡으며 하소연했다.
“부군, 전… 전 저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저자들이 왜 만심을 지목했는지도 모르겠고요……. 전 정말로 그런 적 없어요. 학해는… 부군의 친아들이니… 제 친아들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모진 짓을 했겠어요?”
“에라이 퉤! 친아들까지 들먹이네.”
보다 못한 제민은 거칠게 침을 내뱉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군주의 친아들은 오씨 가문에 있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재가하느라 친아들도 버리셨잖아요. 이게 군주께서 친아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친아들에게도 이러는데 의붓아들에게 잘할 거라고 누가 기대하겠어요?”
엽연채와 상관운 등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주 백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지금껏 갈팡질팡했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는데 제민이 갈란군주의 아들을 언급하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자신의 친아들마저 버릴 수 있는 여인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갈란군주는 제민의 말에 화가 나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더더욱 눈물을 철철 쏟아 냈다.
“아니에요, 버린 게 아니에요……! 전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적 없어요! 아버님과 어머님이… 아니, 오 노야와 오 부인이 기어코 그 애를 오씨 가문에 남겨야 한다고 하셨어요. 게다가 그 아인 오씨 성을 가졌는데 어떻게 그 애에게 절 따라오라고 하겠어요?
저라고 제 아이와 헤어지고 싶었겠나요? 절대로 이별하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전 그렇게 매몰차고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부군, 절 믿어야 해요…….”
주비양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물었다.
“정말로 안 그랬습니까?”
갈란군주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진씨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증언이 나오자 그녀도 마음이 조금 흔들렸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믿을 수도 없었다.
갈란일 리가 없었다. 범인은 엽연채다. 반드시 엽연채여야 한다.
“어쨌든 학해의 약은 셋째 네가 맡았고 약을 달인 사람도 네 사람이다. 그런데 란이가 어떻게 손을 썼겠느냐?”
엽연채는 대수롭잖게 받아쳤다.
“약을 달일 땐 소홀한 틈도 있기 마련입니다. 만심이 날마다 주방에서 음식을 데우니 백수가 부주의한 틈을 타 음식에 미리 준비한 약을 넣으면 그만이죠.”
그러자 백수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얼른 이렇게 말했다.
“아, 생각났어요. 요즘 제가 약을 달일 때마다 주방에 있는 소화가 절 불러 이야기를 나눴어요. 자기 곁으로 불러 먹을 것도 줬고요.”
그 말에 엽연채는 백수를 쏘아보며 혼쭐을 냈다.
“이런 생각 없는 것을 봤나. 겨우 먹을 것 때문에 약을 달이는 데 소홀했단 게냐?”
갈란군주는 가슴이 서늘해졌고 죽일 듯이 엽연채를 노려봤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엽연채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이 모든 게 실은 엽연채가 짜놓은 판이라는 것이 말이다. 오늘 또한 자신을 이 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날이었던 것뿐이다.
“좋습니다. 군주께서 아직도 억울하다고 항변하시니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방을 수색하는 편이 낫겠네요.”
엽연채가 이리 말머리를 틀자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했다.
“동서가 뭔데 내 방을 뒤져! 난 군주야!”
“저도 정1품 부인입니다!”
이렇게 맞서는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제민이 그녀를 도와 다시 나섰다.
“저라면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방 수색을 하라고 하겠어요. 게다가 지금 모든 증거가 군주를 가리키고 있어요. 설마 마마께선 결백을 증명하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증명할 필요가 뭐가 있어? 자기가 한 거지!”
그리고 상관운 등은 갈란군주의 창백한 낯빛을 보자 그녀가 범인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방을 수색하든 안 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이 천리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는구나…….”
진씨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서 수색해 봅시다!”
이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비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란군주는 얼음처럼 싸늘한 주비양의 표정을 쳐다보고 있으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부군… 전 억울합니다!”
“알아요.”
주비양이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모든 증거가 부인을 가리키고 있어요. 부인, 당신은 결백하니 무서워하지 말아요. 안 그러면 오늘 일이 밖으로 퍼질 텐데 그럼 당신에게도 공평하지 않을 거예요.”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인 데다 지금 상황에선 도저히 뾰족한 타개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정, 우린 이런 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약리에 대해서도 잘 모르네. 그러니 자네가 데려온 아이가 함께 가서 수색하면 어떨까 하는데.”
“예, 후 부인. 그리하시지요.”
엽연채의 말에 나 의정은 옆에 있는 어린아이를 쳐다보더니 다시 엽연채에게 말했다.
“저도 연지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녀석도 의학 이론을 여러 해 동안 익혔으니 독인지 약인지는 구분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고맙네, 의정.”
엽연채는 답례하고는 청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청유야, 어서 가거라.”
청유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가자 진씨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뗐다.
“녹엽, 아니 정 마마. 자네도 가서 보게. 저것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말이네.”
“예.”
정 마마는 얼른 그들의 뒤를 쫓아 문밖으로 나갔다.
몇몇이 밖으로 나가자 방 안 전체가 묘한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삼각쯤 지나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유가 선두로 걸어왔고, 그 뒤를 나 의정의 시동이 따라왔다. 정 마마는 창백한 얼굴로 가장 뒤에서 걸어왔다.
갈란군주는 긴장한 얼굴로 이들을 쳐다보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청유가 조그만 상자를 손에 들고 왔는데, 윗면엔 복숭아꽃 문양이 새겨진 그 상자를 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여인들이 쓰는 화장함 속에 들어 있는 작은 함처럼 생긴 그 상자는 외관은 평범했으나 그 안의 내용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통은 분가루나 연고 같은 것들을 보관하지만 그곳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저희가 정말 찾아냈습니다. 만심의 방에 있던 화장 상자에서요.”
청유가 상자를 열자 안에는 흰빛을 띠는 가루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더욱이 진씨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리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주 백야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정말로 갈란이었다니!’
상관운 등은 가루를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뺐다.
“분가루 같은데요.”
“네.”
원남옥이 분가루가 아니냐 하자 상관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심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다.
“예, 이건 제 분가루예요.”
청유는 싸늘한 눈빛으로 만심을 쓱 노려봤다.
“분가루? 그럼 한번 먹어 볼래?”
보통의 분가루는 먹어도 탈이 없었다.
그러나 만심은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말없이 몸을 살짝 떨기만 했고, 나 의정이 데려온 시동이 말했다.
“무슨 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로 분가루는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