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5화
“그게…….”
갈란군주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긴 약 냄새가 너무 심하고 사람도 많아서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드네요.”
“맞습니다.”
만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마를 만지며 말했다.
“보세요. 비 이낭조차 낯빛이 창백하네요.”
만심은 얼른 비 이낭을 끌어들였다.
진씨가 고개를 돌려 보니 정말 비 이낭도 낯빛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에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니 확실히 짙은 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이런 말이 나와서인지 그녀도 가슴이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갈란군주는 숨을 죽이고 나 의정를 비롯한 세 태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나 의정은 얼마간 그 반점을 더 살펴보더니 두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는 마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붉은 반점은 언제 발견했소?”
교 마마가 말했다.
“어제저녁에 발견했어요……. 하지만 그땐 그저 모기에게 물린 거라고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약만 발라 드렸죠. 그런데 지금 보니 아직도 있네요. 제가 괜한 의심을 하는 건 아닌가 했지만 도련님의 병을 생각해 보니 좀 걱정되어서요. 별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태의분들이 살펴봐 주기를 바랐습니다.”
“의정. 뭐 발견한 거라도 있는가?”
진씨가 다급히 물었다.
“음… 어떤 의서醫書에서 본 적이 있는 독 같습니다. 무색무취의 독인데 약에 넣어도 검출되지 않고 진맥을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에 당한 피해자의 병세를 악화되게 만들죠. 예를 들면 부상을 당한 자는 상처가 더 심해지고 감기에 걸린 자는 감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독의 유일한 특징은 뒤통수에 연지색과 유사한 조그만 붉은 반점이 나타난다는 것이라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챌 수 없습니다.”
나 의정의 설명을 들은 진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 봐. 내가 말했지. 분명 독에 당한 거라고! 분명 독일 거라고 말이야! 엽연채 이 빌어먹을 것. 정말 음험하고 악독하구나. 감히 학해에게 이런 독을 쓰다니!”
상관운과 두 규슈는 모두 깜짝 놀랐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주 백야도 깜짝 놀라 멍한 얼굴로 말을 더듬댔다.
“셋째야… 너, 너 어떻게…….”
“아이고. 세상에서 제일 독한 게 여인의 마음이라죠! 제가 욕한 게 틀린 게 아니었죠?”
비 이낭은 이 상황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세상에. 마침내 저 계집을 끝장낼 수 있게 되었어.’
한편, 갈란군주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의정이 이 독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대로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모든 죄를 전부……!’
“동서…….”
갈란군주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엽연채를 바라봤다.
“날 모함하기 위해… 어린아이에게까지 손을 쓰다니.”
그러자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독을 연지묵臙脂墨이라고 하죠. 그렇죠, 군주?”
갈란군주는 엽연채의 입에서 뜻밖에도 ‘연지묵’이라는 세 글자가 나오자 뻣뻣하게 경직된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저 여인이 어떻게 안 거지……!’
만심도 아연실색했지만 안간힘을 다해 자신을 진정시킨 후 기선을 제압했다.
“겨, 결국 인정하셨네요.”
“그러게 말이야. 드디어 셋째 마님이 학해 도련님에게 독을 쓰셨다고 실토하셨네요! 그래 놓고 우리 군주께서 가족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퍼뜨리신 거죠.”
만소 역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거들고 나섰다.
“여봐라, 독을 쓴 죄인을 제압하거라!”
심지어 이렇게 사람을 부르자 혜연이 앞으로 나오더니 짝 소리가 나게 만소의 뺨을 후려갈기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뭔데? 비천한 노비 주제에 감히 정1품 후부인을 제압하려는 것이냐?”
그제야 신분 차를 인지한 만소의 낯빛이 종잇장처럼 하얘졌다.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마저 딱딱거렸는데 그야말로 두려움이 극에 달한 모습이었다.
만소는 갈란군주를 곁에서 모시는 사람이라 당연히 규율이 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엽연채가 뜻밖에도 연지묵 이야기를 꺼내자 순간적으로 머릿속엔 ‘위험’ 두 글자가 떠올랐고,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 미흡한 만소는 차라리 먼저 기선제압을 하려고 했다.
분수와 규율 같은 걸 따질 겨를이 없었으니, 그렇게 엽연채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한 것이다.
“어머님…….”
갈란군주는 진씨를 쳐다봤다.
진씨는 이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마침내 엽연채의 약점을 잡게 된 그녀는 흥분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말했다.
“저 악독한 것.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감히 내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구나. 1품 후부인이면 뭐? 감히 이런 잔인무도한 짓을 벌였는데 네가 1품 후부인이라는 봉호에 걸맞은 것 같으냐? 여봐라. 이 빌어먹을 것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어내거라!”
“아, 아니. 뭘 끌어낸다는 말이오. 해독약! 해독약이면 되오!”
주 백야가 다급히 중재에 나섰다.
“지금은 학해를 구하는 게 중요하오! 인간은 성현이 아닌데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뭣보다도 우린 모두 한 가족이오. 셋째가 해독약을 내놓아 학해만 구해 준다면 그걸로 됐소.
이번엔… 확실히 셋째가 잘못했지만 순간적으로 생각을 잘못한 것뿐이오. 금강경을 두 번 필사하고 벽을 보고 반성하게 하는… 그런 벌을 내리면 충분하오.”
“나리!”
진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주 백야를 노려보며 버럭버럭 호통을 쳤다.
“나리는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여 법을 어기려 하는군요. 하하하. 황족이 법을 어겨도 백성과 같이 죄를 다스리는 법인데 쟨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정1품 봉호를 받은 부인이 감히 이런 더러운 짓을 벌였습니다. 쟤가 과연 황제 폐하께서 내린 봉호에 걸맞은 사람입니까?
게다가 쟤가 모함하려 한 사람은 군주입니다! 황제 폐하의 친손녀요! 아직도 쟬 감싸고돌려는 겁니까? 좋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용서하실지 어디 한번 보죠! 하하하.”
마구 쏘아 대는 진씨의 눈 속에선 쾌감이 출렁였다.
주 백야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는 물고 늘어지는 진씨에게 화가 났지만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허둥거리만 했다.
엽연채가 황제의 손녀를 모함하여 평판을 망가뜨렸다는 걸 황제가 알게 된다면? 천자가 분노하면 엽연채의 봉호가 거두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주운환에게도 영향이 미칠지도 몰랐다.
주 백야는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어쨌든 한 식구이니 무슨 일이든 간에 덮어 줄 수 있는 건 덮어 줘야 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소란을 키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논할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해독약이었다!
“셋째야. 해독약으로 어서 학해를 구하거라.”
겨우 정신을 차린 주 백야가 말했다.
“어서 해독약을 내놓지 않고 뭐 하느냐!”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봐라, 이 계집애를 제압하거라! 어디 안 내놓고 배기는지 한번 보자꾸나!”
“다 하셨습니까?”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에 싸늘한 빛을 띠며 고개를 들더니 진씨와 주 백야를 쓱 쳐다봤다.
“두 분 다 말다툼을 하느라 아주 신이 나셨네요. 그런데 제가 언제 제 입으로 독을 썼다고 했나요?”
그러자 진씨가 매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넌 당연히 인정하지 않겠지.”
“마님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만심이 얼른 진씨를 도왔고 진씨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엽연채를 몰아붙였다.
“학해는 줄곧 네 손에 있었다. 계속 네가 돌보고 있었어. 학해가 먹는 음식을 네가 책임졌고 약도 계속 네 사람이 달였다. 그런데도 네가 아니라는 것이냐?”
“어머님, 연지묵이 뭔지 아세요?”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진씨를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고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엽연채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자 안 좋은 예감이 밀물처럼 세차게 몰려든 것이다.
‘이름을 알 뿐만 아니라… 설마… 어떻게 쓰는지도 전부 아는 걸까? 아니야, 그럴 리가……! 하지만, 이름도 알고 있으니 다른 것도 다 아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냐?’
“부인, 왜 그래요?”
주비양은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그녀의 손을 꽉 움켜잡았는데 그녀의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게…….”
갈란군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약 냄새가 심해서 그래요. 사람도 많고요. 거기다 이렇게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하니… 가슴이 너무 답답하네요. 우리…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는 편이 좋겠어요.”
만심과 만소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얼른 앞으로 나와 갈란군주를 부축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물론 이렇게 놓아줄 엽연채가 아니었다. 그녀는 픽 하고 입바람을 터트리며 갈란군주를 붙들었다.
“군주, 어딜 가시려고요?”
갈란군주의 참한 얼굴이 어두워지자 만소가 창백한 얼굴로 변명했다.
“저희 군주께서 너무 답답하다고 하셔서… 밖에 나가 바람을 쐬려는 것뿐이에요.”
“그 누구도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못 박았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지키고 있던 청유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뭐 하는 것이냐? 정말 제멋대로 구는구나!”
진씨는 두 눈을 부릅뜨며 엽연채에게 삿대질을 했다.
“란이에게 이게 무슨 태도인 게냐? 그리고 방금 전 독약 이야기를 했을 때 왜 란이를 부른 것이냐? 아직도 책임과 죄를 란이에게 떠넘기고 싶은 것이냐? 정말 악독하구나.”
갈란군주도 흥분한 목소리로 오리발을 내밀었다.
“도, 동서. 왜 날 모함하는 거야! 약도 동서가 달였고 무슨 음식을 먹였든 간에 아무튼지 전부 동서가 한 숟갈씩 떠먹여 준 거잖아……! 그런데 내 탓으로 돌리다니.”
엽연채는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정곡을 짚었다.
“군주의 여종 하나도 매일 주방에 있었지요!”
“그 앤 어머님께 드릴 보약을 달인 거야.”
갈란군주는 눈물을 쏟았다.
“내 호의가… 이렇게… 이렇게……!”
진씨는 말도 못 할 정도로 화가 나 냉소를 지었고, 상황을 지켜보던 주 백야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셋째야……. 네 시어머니는 이미 화가 많이 났다……. 더는 감정 상하게 하지 말고 네가 솔직하게 행동하는 게 좋겠구나. 더 이상 책임을 미루지 말고.”
“여러분!”
그때, 나 의정이 싸늘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하더니 진씨를 쳐다봤다.
“부인, 서두르지 마시고 일단 진정해 보십시오. 어떤 독인지 알았으니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 독을 탔는지도 알 수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