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74화 (674/858)

제674화

“오, 의정을 부를 수 있느냐?”

“물론입니다.”

주 백야가 반색하자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심아. 가서 내 패자를 가져오너라.”

만심은 대답을 하고선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씨는 갈란군주를 쳐다보더니 다시 냉담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훑었다. 그 시선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도 마침 그러자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엽연채의 말에 진씨는 냉소를 띠었다.

“입만 살아 가지고!”

한편, 갈란군주는 엽연채를 힐끗 쳐다봤다.

‘엽연채는 분명 내가 약을 썼다고 이미 의심하고 있겠지. 하지만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잖아! 그래 지금 의정을 불러오면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자기 길을 끊어 놨다는 걸 느끼고 말이야. 그래서 오늘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일을 크게 만든 다음 결국 의정을 불러오게 하려는 수작이고!’

갈란군주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틀렸다. 이 정도 일조차 대비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상황이 일단락되자 혜연은 쟁반을 들고 와 진씨와 엽연채 등 자리한 사람들 옆 찻상 위에 찻잔을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무려 반 시진을 기다리고 나서야 백발이 성성한 나 의정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약상자를 맨 어린 시동이 따라 들어왔다.

진씨와 주 백야 등은 나 의정을 보더니 잇달아 자리에서 일어섰고, 진씨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의정, 어서 오게나. 자리에 앉지!”

그러나 나 의정은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부인,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의 감기가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들었으니 우선 도련님부터 보는 게 좋겠습니다.”

진씨와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시게. 이쪽일세.”

사람들은 모두 나 의정을 둘러싸고 서쪽 곁채로 함께 이동했다.

나 의정이 침상으로 걸어가 보니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회색 옷을 입은 마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병 때문에 발갛게 익어 버린 조그만 얼굴을 살펴본 나 의정은 몸을 낮추고 주학해의 맥을 짚었다.

진씨와 주 백야 등은 모두 숨을 죽이며 집중했고 이 태의와 육 태의마저 나 의정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 의정은 이내 미간을 점점 더 심하게 찌푸렸다.

“태의, 어떤가?”

엽연채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의정은 주학해의 손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은 그저 평범한 감기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증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주 백야는 마음이 괴로웠다. 그는 얼굴이 핼쑥해진 주학해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의정, 고칠 방도를 생각해 보시게!”

진씨도 불만이 가득했다.

“어서 약 찌꺼기를 조사해 보게. 뭔가를 발견해 낼지도 모르네.”

나 의정은 여전히 주학해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을 만져 보기도 하고 등을 만져 보기도 했다. 정 마마는 하는 수 없이 서차간으로 돌아가 약 찌꺼기를 가져오더니 나 의정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나 의정은 손으로 안에 든 찌꺼기를 집어 냄새를 맡아 보고 만져 보기도 했지만 또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부 감기를 치료하는 약입니다.”

“그럴 리가! 큰손자는 아주 건강했네. 그런데 이 애 손에 맡겨진 후로 병이 났어. 병이 난 건 그렇다 쳐도 전에는 치료만 하면 바로 나았는데 지금은 아무리 치료를 해도 회복이 되지 않네. 세상에 이런 기이한 일이 어디 있는가? 분명 이것이 내 손자를 병들게 한 거네!”

진씨는 그리 말하며 매서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봤다.

“어머님… 동서를 나무라지 마세요. 의정조차도 약에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동서가 학해를 해한 거겠어요.”

갈란군주가 말했다.

“맞습니다. 분명 연채는 아니에요. 그저 주씨 가문이 다사다난한 거죠.”

제민이 눈을 치켜뜨며 흰자위를 보이자 갈란군주는 순간 싸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그러나 가만 보면 도리어 기회를 포착한 매의 눈이었다. 안 그래도 이 화제를 꺼내는 이가 없어 고민하던 참이었으니까.

“이……!”

주인의 속내를 읽지 못한 만심은 화가 잔뜩 났다.

“또 책임을 우리 군주에게 전가하려고 하네요. 나 의정, 온 김에 백 이낭과 비 이낭도 진찰해 주세요. 두 사람이 병이 난 건지 아닌지 봐 주세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계속 주씨 가문 사람들이 전부 병이 났다는 소리를 할 거예요. 그런 일은 결코 없는데 말이죠. 우리 군주의 결백을 밝혀 주세요.”

갈란군주는 시선을 아래로 하며 난초 문양이 들어간 비단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녹엽아. 가서 백 이낭을 불러오거라.”

진씨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려 비 이낭을 쳐다봤다.

뒤에 서 있던 비 이낭은 표정이 굳어졌으나 별수 없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물론 속은 속이 아니었다. 자신과 백 이낭이 어제 꾀병을 부린 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다들 속으로 뻔히 알고 있긴 해도 진찰 결과가 나오게 되면 자신들은 몹시 곤혹스러워질 것이었다.

하지만 갈란군주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녹엽은 밖으로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백 이낭과 함께 돌아왔다.

상관운과 다른 두 규수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도 갈란군주에 관한 소문은 들었기에 정말로 갈란군주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주씨 가문 사람들이 아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잖고서야 어떻게 갑자기 병자가 이리 많이 나오겠는가?

만소는 수돈 하나를 가져와 나 의정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백 이낭과 비 이낭은 난처해하며 그의 앞으로 나왔고 나 의정은 두 사람의 맥을 짚더니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병이 나지 않았습니다.”

백 이낭과 비 이낭은 민망해했고 비 이낭은 헛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 속이 너무 더부룩하고 메스꺼워 구토를 좀 하고 그랬던 것뿐이에요.”

나 의정은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이렇게만 말했다.

“체했나 보군요.”

비 이낭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더는 입을 놀리지 못했다.

“그러니까 두 이낭은 전혀 아프지 않다는 거죠.”

만심이 냉소를 지으며 결론을 냈다.

“고로 학해 도련님은 그저 몸이 아파 병이 난 거네요.”

그러자 주 백야는 초조한 마음에 얼굴이 조금 하얗게 변했다.

“그럼…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엽연채가 독약을 넣은 거면 그녀에게 해독약을 내놓으라고 하면 해결된다. 그리고 갈란군주 때문에 병이 난 거라면 불가의 의식을 치르거나 어떻게든 해결하면 그만이다. 하나 지금 둘 다 아닌데 병세도 아주 이상하니 이렇다 할 해결책이 없었다.

“분명 이 애가 병들게 만든 겁니다.”

그러나 진씨는 여전히 엽연채를 물고 늘어졌고,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진씨를 쓱 쳐다봤다.

“어머님. 생사람 잡지 마세요.”

나 의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 무슨 일이든 간에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십시오.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진씨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는 엽연채를 노려보더니 손수건을 홱 뿌리치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상관운 등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하며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큰 소리를 낸 사람은 주학해를 안고 있던 교 마마였다.

“나 의정, 이것 좀 봐 주세요. 학해 도련님의 뒤통수에 연지색 작은 점이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갈란군주는 넋 나간 표정을 지었고 순간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곤 다만 손수건을 더욱 꽉 움켜쥘 뿐이었다. 그렇다지만 이미 엽연채가 그 반응을 예리하게 눈치채고 입꼬리를 위로 올린 후였다.

“연지색 작은 점?”

“네, 보세요.”

교 마마는 대답하며 주학해의 뒤통수가 보이도록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리해도 머리숱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하여 교 마마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젖혔는데도 여전히 잘 보이지가 않았다.

진씨는 얼른 몇 발짝 앞으로 나왔고 그제야 주학해의 뒤통수에 있는 조그만 붉은색 점이 눈에 들어왔다. 진씨는 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분명 독에 당한 흔적이다!”

갈란군주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는 이리 말했다.

“어머님… 그건… 그냥 모기에게 물려 작게 부어오른 자국일 뿐이에요. 독에 당한 흔적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진씨가 고개를 돌려 갈란군주를 쏘아봤다.

“넌 마음이 너무 착해서 탈이구나! 무슨 일이든 항상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니 말이다. 이게 무슨 모기에게 물려 부어오른 자국이니? 이건 독에 당한 증거다!”

진씨는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봤고 그런 다음에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교 마마를 쓱 쳐다봤다. 그러자 교 마마는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진씨는 쯧쯧 혀를 찼다.

‘제가 키우던 개에게 물린 꼴이구나!’

엽연채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 조그만 붉은 반점은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모기에 물려 부풀어 오른 자국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추운 날씨에 모기가 어디 있겠어요? 설령 모기가 있다고 해도 문다면 학해의 뒤통수가 아니라 당연히 얼굴을 물었겠죠. 정말 이상하군요. 의정에게 보여야겠어요.”

진씨는 전혀 초조해하지 않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며 조금 의아해했다.

‘설마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독을 쓴 게 아닌 건가? 다 들통났는데도 여유를 부린단 말이야? 아니야, 아니지. 엽씨 이 계집은 능청을 잘 떠니까. 지금 속으로는 분명 초조해 미칠 거야.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태연한 척하는 거지. 혐의를 벗으려고 말이야.’

이렇게 고부가 기 싸움을 하는 동안, 나 의정은 앞으로 걸어나와 주학해의 머리카락을 젖혀 붉은 반점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건…….”

이 태의와 육 태의도 서로 눈을 맞추더니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

갈란군주는 손마디가 희어지게 주먹을 쥐었고 이마에선 땀방울이 스며 나왔다.

‘이럴 리가 없어. 태의라고 해도 분명 못 알아볼 텐데. 게다가… 주학해가 정말로 독살당할 뻔한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건 엽연채의 책임이야!’

“란아. 보거라. 태의가 세 명이나 여기 있으니 분명 쟬 가만두지 않을 거다.”

진씨가 말을 붙이자 갈란군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렇죠…….”

갈란군주가 부자연스러운 웃음소리를 내자 진씨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진씨는 낯빛이 창백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란아. 왜 그러니? 낯빛이 별로 좋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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