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3화
진씨가 화를 내려고 하자 제민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씨 가문 장남의 가족들은 교양과 규율이 이렇나 봐요?”
진씨는 낯빛이 홱 변했고 화가 나 온몸을 부들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매서운 눈빛으로 비 이낭을 쏘아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썩 물러가거라.”
비 이낭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고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제민을 노려봤다.
‘농사나 짓던 천한 농가 소녀 주제에. 누가 누구보다 고귀하다는 거야? 어디 두고 보자. 엽연채가 망한 후에도 그렇게 날뛸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진씨는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똑바로 쳐다봤다.
“비 이낭이 말할 주제는 안 되지만 비 이낭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네가 학해를 병들게 만들었어. 아주 잘하는 짓이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어머님, 제가 어머님의 며느리이고 효도를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시면 안 되죠! 밖에서 사람들이 군주 때문에 학해가 병이 들었다고 하는데 왜 군주에게 따져 묻지 않으시고 아무 근거도 없이 오히려 절 질책하시는 겁니까?”
“아니야……. 나 때문에 학해가 병이 든 게 아니야, 동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갈란군주는 눈물을 흘리며 억울해하는 반면 진씨는 도리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증거? 하하하. 네 존재가 바로 증거다! 넌 진작에 분가를 했고 우리와 관계를 끊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넌 이런 때에 찾아오더니 학해까지 돌보겠다고 우기며 눌러앉았다. 그 결과 학해는 지금까지 쭉 네 손에 있었는데 갑자기 병이 나고 말았어.
그런데 감히 네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냐? 분명 네가 란이가 식구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하려고 수를 쓴 것 아니냐. 그리고 더 악독한 건 란이가 독을 넣었다는 말까지 한 거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양심에 찔리지 않으세요?”
엽연채는 두 눈을 부릅뜨며 조목조목 따졌다.
“저희가 분가를 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 사람이 누구였나요? 지난번 궁에서 베푼 연회에서 절 보더니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누구였죠?”
“주 측비였지!”
원남옥이 눈을 부라리며 대신 대답하자 진씨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때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엽연채의 비위를 맞춘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희 사이에 안 좋은 감정이 있긴 했지만, 그날 전 어머님과 주 측비께 크게 감동받았어요. 그래서 시댁에 와서 잠시 머무른 거죠.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님은 제게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보이셨던 거군요.”
엽연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또다시 전신이 벌벌 떨려 왔다. 정말이지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격이었다.
“동서. 어머님은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냐. 학해가 병이 났으니 어머님께서 초조한 마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갈란군주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학해는 줄곧 동서가 맡고 있었잖아. 그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고 명랑했는데……. 흑흑… 다 내 잘못이네! 내가, 내가 사찰에 가서 지내야겠어.”
엽연채는 표리부동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기가 찰 따름이었다. 갈란군주는 은정랑을 제외하면 그동안 봐 왔던 사람들 중에 가장 가식적인 사람이었다.
“맞다!”
한편, 진씨는 얼른 요점을 포착하고는 반박에 나섰다.
“증거가 있네 없네 하는 소리는 하지도 말거라. 학해는 원래 건강했다. 그런데 네 손에 넘겨지자마자 병이 났어. 그런데도 네가 병들게 만든 게 아니란 말이냐? 더군다나 학해가 병이 나자마자 밖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화살이 애꿎은 란이에게 쏟아졌고!”
갈란군주를 부축하고 있던 만심이 화가 난 목소리로 거들었다.
“저희 군주는 학해 도련님에게 손끝 하나도 대지 않았습니다. 도련님은 마님께서 돌보고 있다가 병이 났는데 그 죄는 전부 군주가 지게 됐습니다. 전 이런 후안무치한 짓은 처음 봤습니다!”
이리 말하는 만심의 눈은 발갛게 변해 있었다.
제민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애가 죽으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는데? 강심설이 죽으면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겠어? 당연히 갈란군주지!”
“이……!”
갈란군주는 마음이 조급해지자 입술을 꽉 깨물더니 성난 목소리로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겠나? 강심설과 그 아들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들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나라며 내가 한 짓이라고 할 텐데! 두 사람이 죽지 않아도 내 불운한 기운 때문에 아팠던 거라고 하겠지. 어차피 두 경우 다 내겐 불리하다고! 분명 동서가 일부러 학해를 병들게 만들어 날 모함하는 거야!
그리고 내 기운이 가족들을 잡아먹는 거라면 왜 부군은 잡아먹지 않는 건데? 왜 어머님이나 아버님, 할머님을 잡아먹지 않고 하필 학해인데? 지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어 버린 거라고……!”
“싸우지 말아요.”
상관운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중재에 나섰다.
“어쩌면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걸 수도 있어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서로 질책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차라리 태의를 불러와 보는 건 어떨까요?”
진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상관운을 쓱 쳐다봤다. 상관운은 금위군 대장의 금지옥엽인데 그녀의 체면을 살려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가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엽연채가 백수를 쳐다보며 명하자 백수는 대답하며 얼른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육 태의와 이 태의가 백수와 함께 걸어왔다. 두 태의는 상황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얼른 한입으로 예를 갖추었다.
“마님들과 군주 그리고 현주를 뵈옵니다.”
“일어나게!”
엽연채가 손을 들어 면례를 해 주자 진씨는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원래 이런 일은 집안의 안주인인 그녀가 해야 마땅한데, 하필이면 저 눈꼴신 엽연채가 이 중에서 품계가 가장 높았다.
“태의들, 자네들이 우리 학해를 진찰해 보게. 이 독살스러운 것이 학해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닌지 살펴보고 알려 주게나.”
진씨가 엽연채를 쓱 쳐다보며 말하자 두 태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여인들의 암투에는 정말이지 끼어들고 싶지 않은데 이미 말려든 모양이었다.
“예.”
별수 없이 두 사람은 대답한 뒤 주학해의 방으로 걸어갔다.
“가서 보자.”
제민은 엽연채를 부축했고 사람들은 모두 서쪽 곁채로 걸어갔다.
갈란군주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악독한 눈빛을 번득였다. 지금이 바로 주학해의 약에 몰래 손을 쓸 때였다. 하지만 그 약은 조사를 받게 될 테니 그리할 수는 없었다.
‘그럼 가능한 방법은…….’
서쪽 곁채는 아주 넓어서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붐비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교 마마는 주학해를 안고 달래고 있었다. 아이는 정신이 조금 흐릿했고 태의가 진맥을 하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태의와 육 태의는 각자 주학해를 진찰했고, 두 사람은 진찰이 끝나자 서로 눈을 맞췄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한 차례 교환한 후, 육 태의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것 참… 도련님은 지금 감기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만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아마… 아마…….”
“아마 뭐?”
진씨는 노여움에 호통을 쳤다.
“아마 열 때문에 머리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육 태의가 뒷말을 잇자 진씨와 주 백야는 머리가 어질어질해 순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주비양이 살짝 긴장된 얼굴로 추궁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네들은 태의인데 감기 하나도 못 고친다는 말인가?”
이 태의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들은 도련님을 진찰했고 증상에 맞게 약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 약이라는 것도 병자가 어떻게 흡수하는지, 기분은 어떠한지 봐 가며 써야 합니다. 보통 이 정도 약을 먹으면 진작에 회복됐어야 하는데 도련님처럼 이렇게 상태가 나쁘고 점점 더 심해지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육 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면피용 말을 보탰다.
“저희는 재주가 모자라고 학문이 얕습니다. 부디 더 훌륭한 의원을 찾으십시오.”
그러자 주 백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 태의를 보았다.
“전에 학해가 감기에 걸렸을 때도 이 태의 자네가 보지 않았는가…….”
“예.”
이 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엔 제가 다 진찰했고 삼사 일이면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참으로 이상합니다.”
“감기 외에 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는가?”
진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를 들면 독에 중독됐거나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었다든가.”
그러자 두 태의는 황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진씨는 이를 악물었다.
‘독이 발견된다면 엽씨 이 빌어먹을 년이 넣은 게 분명한데! 그럼 사람 목숨을 해치려고 한 게 되니 1품 봉호를 받았다고 해도 죽거나 껍질이 벗겨질 텐데.’
“그럼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거 아니에요?”
정 마마도 어떻게든 엽연채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다. 고의로 주학해가 감기에 걸리게 한 거라면 이 또한 사람 목숨을 해치려고 한 것이니 말이다.
육 태의가 말했다.
“도련님은 찬바람을 맞은 흔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진찰해 보니 약도 제대로 드셨습니다.”
진씨는 아주 달갑지가 않았다. 그녀의 손자가 위독한 건 엽연채가 한 짓인데 어찌 이대로 지나가겠는가. 엽연채를 처리할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말이다.
“난 그 말 못 믿겠네. 어떻게 이런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어?”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가서 약 찌꺼기를 조사해 보게! 그리고 약을 달이는데 썼던 집기들도 다 가져오게. 정 마마, 자네가 직접 가게.”
저택 내에서 약은 아주 중요하게 취급됐다. 하여 일반적으로 달이고 남은 약 찌꺼기도 전부 보관했고 병자의 병이 회복되고 나서야 찌꺼기를 처리했다.
정 마마는 대답을 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씨는 이곳에 가만있을 수가 없었는지 서쪽 곁채에서 나갔고 그러자 사람들은 전부 우르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진씨는 성큼성큼 회랑을 따라 걸어가 서차간의 탑상에 앉았다. 엽연채는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이 하좌의 권의에 앉았다.
잠시 후, 정 마마가 두 명의 어린 여종을 데리고 약탕기와 약 찌꺼기를 들고 돌아왔다.
두 태의는 꼼꼼하게 살펴봤다. 주학해의 감기 증세는 꽤나 이상했기 때문에 그들은 꼼꼼하게 살펴봤고 무려 반 시진을 살펴보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부인들, 약 찌꺼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자 진씨가 냉랭한 눈빛을 띠며 그들을 힐난했다.
“자네들은 정말 재주가 모자라고 학문이 얕은 모양이네. 다른 의원을 찾아봐야겠어.”
“나 의정을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갈란군주가 말했다.
나 의정은 정선제가 가장 신임하는 태의이다 보니 왕진은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 정선제를 치료한 후로 더욱 총애를 받게 되자 더더욱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