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9화
일상원으로 돌아온 정 마마는 이렇게 말했다.
“마님, 전 그저 셋째 마님께 이리 말했을 뿐입니다. 돌보기 어려우시면 손을 떼시라고 말이죠. 그런데 셋째 마님은 제게 면박을 주시더니 기어이 도련님을 본인이 돌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진씨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갈란군주가 나섰다.
“어머님, 지금처럼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어린아이가 감기에 걸리는 건 흔한 일입니다. 지금 형님은 편찮으시고 묘화 아가씨는 어립니다. 그리고 백 이낭과 비 이낭은 둘 다 사람이 덜 됐고요. 동서가 학해를 돌볼 마음이 있다고 하니 동서에게 맡겨 두시죠!
어차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의원과 약입니다. 또 다들 한집에 살고 있으니 다 함께 돌보면 됩니다.”
“군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정 마마는 고갯짓으로 동조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한데 학해 도련님이 감기에 걸린 게 큰마님께 옮아서 그런 건 아닐까요?”
진씨는 깜짝 놀라더니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주학해를 데려오면 그녀의 처소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감기가 옮으면 큰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갈란군주의 말대로였다. 병이 낫는 데는 의원과 약이 중요하지, 장소가 무슨 상관일까. 또 사실상 아이는 유모가 돌보니 주학해는 그저 엽연채의 처소에서 지내는 것에 불과했다.
“조심 좀 하라고 하거라.”
진씨의 이 말에 갈란군주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드리웠고 그녀의 눈엔 순간 조롱기가 스쳤다.
한편, 백수는 주방에서 약을 새로 달인 후, 약그릇을 들고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곁채 문 입구에 서서 사 유모가 주학해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지켜봤고, 혜연은 그런 그녀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회임을 한 상태이니 감기에 옮아서는 안 됐다. 작은 병도 태아에게는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사 유모가 주학해에게 약을 다 먹인 후 아이를 재우자 엽연채는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정 마마가 돌아간 지 이렇게 오래됐으니 보고를 해도 벌써 했을 텐데 웬일로 주인마님이 소란을 피우지 않으시는 거지?”
청유가 엽연채 뒤를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말이야.”
혜연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마님 성정에 이곳에 와서 비아냥거리지 않는 게 정말 이상하긴 하다.”
진씨는 기회가 오자마자 전부터 싫어하던 강심설을 가차 없이 버렸다지만 주학해는 진씨의 유일한 손자이니 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진씨는 분명 엽연채가 주학해를 돌보는 걸 원치 않았었다.
그러니 지금 주학해의 병환을 핑계로 그를 자신의 처소로 데려가거나 갈란군주에게 맡기려고 하는 게 마땅할 텐데, 여태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묘했다.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금 어머님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누구니?”
“갈란군주죠.”
청유는 생각도 안 해 보고 대답했다.
“갈란군주는 분명 학해 도련님을 데리고 있으려고 할 겁니다.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도련님이 군주 손에 있어야 큰마님을 괴롭힐 수 있을 테니까요.”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말머리를 틀었다.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밥상을 차리게 하거라. 배가 고프구나.”
* *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해가 밝았다. 하나 주학해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주학해를 보러 온 엽연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이번엔 이 태의를 부르지 말고 육 태의를 부르거라.”
백수는 대답을 한 뒤 태의관太醫館에 가서 육 태의를 불러왔고, 육 태의는 주학해의 맥을 짚었다. 그도 역시나 감기라고 진단했지만 가볍게 볼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열이 내리지 않으면 머리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랐다.
육 태의는 기존 약방을 보고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학해의 병이 호전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약방을 내렸다.
한데 전부터 주씨 가문은 항상 태의를 부를 때 이 태의를 찾았다. 그래서 태의관 사람들은 육 태의를 데려가자 의아해했다. 이 태의가 태의관에 없던 것도 아니니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에 다들 이유를 물어보곤 상황을 알게 되었다. 주씨 가문에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내리지 않는데 이 태의가 치료를 했음에도 회복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사람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최근 주씨 가문은 하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려 작은 문제만 생겨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또 허튼소리를 지껄인 건지는 알 수 없으나 갈란군주의 불운한 기운 때문에 주학해가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은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일전에 강심설이 스스로 화를 못 이겨 화병이 났던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기를, 실은 강심설이 일부러 갈란군주를 모함하고 그녀의 평판을 망가뜨리기 위해 소문을 퍼뜨린 것이지 않았던가.
진귀루에서 술을 마시던 주 백야는 손자가 병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원으로 들어와 보니 진씨는 갈란군주와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 백야는 뒷짐을 진 채 다가와 먼저 운을 뗐다.
“학해가 병이 났다고 들었소.”
그의 말투엔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자 진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도리어 이렇게 쏘아붙였다.
“제가 진작에 아이를 그것에게 맡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다 나리께서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고 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제 만족하시겠네요! 지금 의원을 불러 학해의 병을 진찰하고 있습니다.”
주 백야는 코를 매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인 말은 어폐가 있소. 이런 날씨엔 어린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어른이라고 해도 병이 잘 나는 법이오.”
그가 그리 말하며 다시 밖으로 나가자 진씨가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어디 가세요?”
주 백야는 고개를 돌리더니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한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어디를 가겠소? 당연히 내 손자를 보러 가지!”
진씨는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난번에 엽연채가 자신더러 마치 황태후처럼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비아냥대던 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우르르 궁명헌 방향으로 걸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짙은 약 냄새가 풍겼고, 엽연채는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유심히 약서藥書를 넘겨 보고 있었다.
“나리와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백수의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드니 정말 주 백야와 진씨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갈란군주는 진씨의 손을 잡고 부축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그러고는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군주.”
주 백야는 이미 5개월이라 점점 불러오는 엽연채의 배를 보더니 얼른 손사래를 쳤다.
“넌 몸이 무거우니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
“예.”
“학해는? 어떠냐?”
진씨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직 아픕니다. 그래도 육 태의가 써 준 약방문대로 약을 먹었더니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엽연채의 대답에 진씨는 작게 콧방귀를 뀌고는 낭하로 걸어갔고 주 백야도 그녀를 따라갔다. 서쪽 곁채에 도착해 보니 사 유모는 탁자 옆에서 죽을 식히고 있었고 주학해는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학해야.”
주 백야가 다가가 이름을 부르자 주학해는 눈을 떴다.
“할아버지… 콜록콜록……!”
“에휴…….”
주 백야는 옅은 한숨을 쉬며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대번에 손바닥으로 뜨거운 기운이 전해지자 인상을 썼다.
“학해야, 많이 힘들지?”
“네.”
주학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씨도 주학해에게 다가갔다. 보니 주학해의 조그만 얼굴은 병이 들어 홍조를 띠었고 분명 추운 날씨임에도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였다.
“학해야. 착하게 약을 다 먹었느냐?”
그런데 주학해는 진씨를 보자마자 흑흑 울음을 터뜨렸다.
“저, 전… 콜록콜록… 착하게 약도 다 먹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나빠요……. 제 어머니를 때리셨죠… 흑흑… 어머니를 때렸어요…….”
진씨의 표정은 바로 잔뜩 굳어졌다. 예전에 이 손자는 볼 때마다 너무나 귀여웠는데 지금은 무척 밉살스러웠다.
주 백야는 진씨를 노려보더니 다시 주학해를 달래 주었다. 아이가 너무 피곤해 보이자 그는 일행을 데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곁채에서 나오자 엽연채가 말했다.
“아버님, 모두들 응접실로 가시지요.”
그러자 진씨는 콧방귀를 흥 뀌었다.
“봐라. 네가 애를 돌봐서 병이 들었잖니.”
주 백야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셋째는 지금 회임을 한 상태이고 학해도 병이 났으니 함께 지내기 불편할 거요. 우선 학해를 일상원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겠소?”
갈란군주와 만심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만심은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는 게 가장 좋기는 합니다만… 주인마님께서 요 며칠 기운이 별로 없으십니다. 그러다 감기라도 옮으시면…….”
진씨는 감기에 걸리는 걸 몹시도 두려워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감기에 걸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씨는 얼른 거절했다.
“란이에게 돌보라고 하세요. 어쨌든 란이도 학해의 어머니잖아요!”
갈란군주가 조신하게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동서가 불편할 테니 제가 돌보겠습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아리따운 얼굴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
“셋째야…….”
진씨는 차디찬 표정으로 엽연채를 노려보았고 주 백야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님.”
엽연채가 주 백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주께서 시집을 온 뒤로 가족들은 하나같이 빈부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형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잊으실 수 있습니까? 저희 가문이 가장 가난할 때 저희 가문을 선택한 분이 바로 형님 아닙니까.”
그러자 주 백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언제 큰애를 외면했다는 게냐? 큰애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순간 생각을 잘못했던 것뿐이다. 다 함께 분명히 짚고 넘어갔고 큰애도 훈계를 받았다. 그 일은 마무리됐단 말이다.”
“지금 형님은 병이 나서 가장 민감하고 의심도 많을 겁니다. 남편의 마음속에 형님의 자리가 없으니 아이는 형님에겐 목숨줄과 같습니다. 그런데 형님의 아이마저 군주에게 보내면 형님은 화가 나서 병이 더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예기치 못하게 세상이라도 떠나게 되면 어찌합니까?”
주 백야는 엽연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골머리가 아팠다.
“여인들은 참……. 에휴! 됐다. 가서 백 이낭과 비 이낭을 불러오너라.”
주 백야는 그리 말하며 낭하에 놓인 나무 걸상 위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