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8화
“내 조카의 상태를 좀 봐 주게.”
“예, 부인.”
엽연채에게 예를 갖춘 의원은 앞으로 다가가 주학해의 맥을 짚었다.
아이는 보통의 감기 증세를 보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엽연채가 진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의원은 집중에 집중을 더해 신중히 맥을 짚었다. 그런 후에는 주학해의 눈꺼풀 등 여러 부위를 진찰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한껏 드러냈다.
시간을 들여 진찰을 다 한 그는 공수하고 말했다.
“부인, 도련님은 몸이 차서 감기에 걸리신 겁니다. 큰 문제는 없으니 약 좀 드시고 몸을 따뜻하게 하면 됩니다.”
“고맙네. 약방문을 써 준 뒤 가는 길에 침향거에 들러 우리 형님도 좀 진찰해 주게나.”
“예.”
의원이 약방문을 다 쓰자 백수는 그를 데리고 침향거로 향했다. 그가 강심설을 진찰해 보니 감기 기운과 열은 다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얼굴에 난 상처는 흉이 지지 않으려면 약을 발라 줘야만 했다.
“부인,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며칠이면 좋아지실 겁니다.”
만월은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의원을 문밖으로 배웅했다.
한편, 의원이 약방문을 써 주자 엽연채는 곧장 백수에게 약을 달이게 했다.
사 유모가 주학해를 재운 후, 엽연채는 응접실로 돌아와 주운환에게 서신을 썼다. 서신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탁자 옆에 선 혜연과 청유도 몸을 기울인 채 엽연채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했다.
“집안마다 이름을 짓는데 규칙이 있습니다. 마님과 자매 분들은 모두 꽃 이름을 쓰셨죠. 연蓮, 이梨, 미薇, 행杏 등을 쓰셨어요. 도련님이 태어나시면 학해 도련님을 따라 ‘학學’을 써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자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졌다.
“난 그 글자는 싫다!”
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해, 학해……. 솔직히 말하면 꼭 공부벌레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응, 맞아.”
엽연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버님께서 지은 이름이지.”
혜연은 풉 실소하더니 웃는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다.
“전에 백야께서는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겠다는 생각뿐이셨죠. 꿈도 집안에서 학자가 배출되는 꿈을 꾸실 정도로요. 그래서 그런 이름을 지으신 거고요.”
엽연채는 눈알을 굴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학자도 괜찮긴 해. 품위 있고 고결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무장도 아주 좋지. 씩씩하고 늠름하며 위엄 있으니까! 여자아이라면 금琴과 바둑, 서예와 그림을 가르칠 거다. 물론 무예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 고르기가 너무 어렵구나!”
“고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나리를 닮아 무엇이든 잘하실 건데요.”
“그래.”
청유가 헤헤 웃으며 이리 말하자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부군 하나는 정말 잘 뒀어. 고결하면서도 풍류도 알고 또 씩씩하고 늠름하잖아. 정말 완벽해!’
혜연과 청유는 즐겁게 웃고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쳐다보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청유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마님, 저희는 지금 어떤 이름을 지을지 생각하고 있는데요.”
“난 도저히 못 고르겠다. 생각난 걸 전부 적어 부군에게 고르라고 해야겠어.”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이름을 하나씩 적을 때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고 세 장을 빼곡히 채웠는데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보다 못한 혜연이 엽연채를 재촉하자 그녀는 그제야 종이를 바람에 말린 다음 봉투에 넣어 경인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엽연채의 서신은 금세 주운환에게 전해졌다.
주운환이 편지 봉투를 열어 보니 안에는 서신이 세 장 들어 있었고 안에 적힌 내용은 전부 어린아이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마음이 저절로 따스해졌다. 이름을 전부 본 뒤, 그는 곧장 붓을 들어 엽연채에게 보낼 회신을 써 내려갔다.
경인은 주운환의 서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고, 엽연채는 서신을 펼친 후 꼼꼼히 읽어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당겨 미소를 지었다.
저녁이 되자 엽연채는 다시 곁채에 가서 주학해를 살펴봤다. 아이는 약을 먹은 후 이미 열이 내린 상태였고, 더 이상 재채기도 심하게 하지 않았다. 안심한 엽연채는 아이를 달래 준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방금 막 자리에서 일어난 엽연채가 씻고 단장을 하고 있는데 백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도련님께서 어찌 된 일인지 또 기침을 하십니다. 열도 다시 나고요.”
청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 어제 우리가 보러 갔을 땐 이미 좋아진 상태였어. 그런데 어째서 또 병이 도진 거야?”
“청유야, 어서 머리를 완성하거라. 가서 보자꾸나.”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을 가늘게 떴다.
청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후, 그녀는 간단한 동심계同心髻 머리를 완성했다.
엽연채는 옷을 걸친 후 서둘러 방을 나섰고 서쪽 곁채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짙은 약 냄새가 풍겼다. 사 유모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학해를 안은 채 침상 위에 앉아 주학해의 몸을 톡톡 두드리며 재우고 있었다.
“마님.”
사 유모는 작은 목소리로 엽연채를 불렀다. 그녀는 일어나서 예를 올리고 싶었지만 품에 주학해를 안고 있어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가 침상 곁에 앉아 보니 사 유모 품에 안겨 있는 주학해는 조그만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직접 열을 재어 보지 않아도 몸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이렇게 갑자기 나빠졌지? 분명 어제저녁에는 괜찮지 않았는가?”
그러자 사 유모가 당황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어제 이미 열이 내렸습니다. 저녁엔 조용히 잠도 주무셨고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다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습니다.”
사 유모는 그리 말하며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 제 탓입니다. 어제 너무 피곤해서 저녁에 학해 도련님을 재운 후 저도 잠이 들었습니다.”
엽연채가 손을 뻗어 주학해의 이마를 만져 보니 과연 어제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녀는 사 유모를 쏘아보며 핀잔했다.
“좀 더 신경 쓰게!”
“예!”
사 유모는 너무 억울했지만 알겠다고 할 수밖에는 없었다.
“의원은 불렀는가?”
“네, 아까 여종 아이를 내보냈습니다. 좀 있으면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린 여종이 어제 불렀던 의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의원은 엽연채에게 예를 올린 후 주학해의 맥을 짚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애가 단 엽연채가 먼저 물었다.
“어떤가?”
의원은 살짝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어제 약을 제대로 드시게 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사 유모가 장담했고 엽연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그녀는 주학해가 약을 먹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난 후에야 이곳을 떠났었다.
“어제저녁에 약을 먹은 후 분명 열이 내렸었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더 심해졌네.”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의원은 사 유모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다시 물었다.
“도련님이 저녁에 다시 몸에 한기가 느껴진다고 하지 않으셨나?”
사 유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절대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럼… 병이 도진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상태가 잘 변하니까요.”
의원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약방문을 써 줬고, 백수는 서둘러 약방문을 가지고 주방에 가서 약을 달였다.
주방은 사람들이 오가며 북적거리는 곳인데 어떻게 주학해가 병이 난 걸 숨길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곧 일상원으로 전해졌다.
일상원의 진씨는 자리에 앉아서 갈란군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녹엽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학해 도련님이 아프십니다.”
그러자 진씨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프다고?”
“예. 주방 사람이 그러는데 요 며칠 백수가 주방에서 학해 도련님이 드실 약을 달이고 있다고 합니다. 주방 어멈이 몇 마디 물어보니 감기에 걸리셨다고 했답니다.”
“흥. 걘 대체 애를 어떻게 보는 거야?”
진씨는 냉소를 지었다.
“겨우 이틀 돌봤는데 영민하고 활발한 내 큰손자가 병이 났구나. 도저히 돌보지 못하겠으면 란이가 돌보게 넘기든가.”
그러자 갈란군주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지그시 누르며 염려하는 말을 했다.
“많이 아픈 걸까요?”
“정 마마. 자네가 가서 보고 오게.”
진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명하자 정 마마는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정 마마가 궁명헌에 와 보니 동쪽 곁채의 낭하에 앉아 햇볕을 쐬고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정 마마는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마님, 참 한가해 보이시네요.”
붉은 매화 문양이 들어간 둥글부채를 쥐고 있던 엽연채는 손을 멈칫하더니 정 마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늙은 노비가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건가?”
그러자 정 마마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집안에선 모두들 그녀를 어느 정도 대접해 줬는데 오직 엽연채만이 이렇듯 사람을 우습게보았다. 입만 열었다 하면 자신을 늙은 노비라고 불러댔다.
하지만 엽연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녀는 정말 늙은 노비였다.
정 마마는 하하 선웃음을 치며 앞으로 다가섰다.
“저도 조용히 쉬고 계시는 마님을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님께서 학해 도련님을 돌보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도련님께서 병이 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주인마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라 저보고 대신 확인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마님, 대체 도련님을 어떻게 돌보신 겁니까? 도저히 돌보지 못하시겠으면 도련님을 넘겨주시지요.”
주황색 나무 걸상에 앉아 꽃문양이 들어간 주황색 기둥에 기대어 있던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학해가 아파 어머님께서 애를 태우고 계신다고?”
“물론입니다!”
정 마마는 대답 끝에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좀 전보다 더욱 비아냥거렸다.
“그럼 왜 학해를 보러 직접 오지 않으시는 건가? 학해는 어머님의 손자인데.”
정 마마는 뜨끔했다.
“그건…….”
“쯧쯧. 지금 군주가 어머님 앞에서 효도를 하니 본인이 그분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지.”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그분’이 ‘황태후’를 의미하는 줄 누가 모르겠는가. 정 마마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무어라 반박하려는데 엽연채가 선수를 쳤다.
“마마는 돌아가서 어머님께 이리 전하게. 내가 아무리 변변치 못해도 여기서 계속 학해를 돌볼 거라고 말이네. 어디 입만 열었다 하면 손자를 아낀다고 염불을 외면서 그곳에 고귀하게 앉아 봉양이나 받고 있는 학해의 할머니와 내가 비교가 되겠는가?”
“이… 흥!”
정 마마는 더는 이곳에 머물 명분이 없어 씩씩대며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