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7화
진씨는 돌아서서 처소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남은 갈란군주는 창백한 낯빛을 하고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비양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그 사람이 잘못된 일을 벌여 당신이 억울한 일을 겪게 됐군요.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알아요.”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그리 옹졸하고 포용력 없는 사람인가요? 그저 사람들에게 몇 마디 들은 게 전부이고 이제 명백히 밝혀졌어요. 조금 피곤하니 먼저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주비양의 말에 갈란군주는 손사래를 쳤다.
“전 이만 형님을 보러 갈게요. 혼자 조용히 있고 싶기도 하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만심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주비양은 그곳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 * *
갈란군주와 만심은 일상원을 떠나 곧장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고 만심은 그제서야 분노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께서 그 천박한 것을 도우시다니요!”
그러자 갈란군주의 부드러운 얼굴에 순간 비웃음이 스쳤다.
“어쨌든 자기 여인인데 어떻게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을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 역시 물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기품을 잃어서야 되겠느냐.”
“흥. 그러면서 마음속엔 오직 군주뿐이라고 하시네요.”
만심은 갈란군주를 부축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씩씩댔다.
갈란군주는 방 안으로 들어가 탑상 위에 비스듬히 앉았다. 사람은 무쇠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키우는 강아지가 맞아도 마음이 아플 텐데 여러 해를 함께 지내 온 부부이니 오죽하랴.
‘얼마간 시간도 필요한 법이야.’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갈란군주는 백자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찻잔이 입가에 닿기도 전에 냅다 집어 던졌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찻잔은 산산조각이 났다.
“천박한 년!”
역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감정은 제어되지 않았다.
지고지상한 군주인 자신이 어째서 굽혀야 한단 말인가? 이건 그녀의 신분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연유가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녀는 주비양이 이 소식을 듣게 되면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나가 강심설을 냅다 걷어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신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 *
진씨가 갈란군주를 위해 강심설을 때렸다는 소식과 함께 결국 ‘진상이 낱낱이 밝혀진’ 이 일은 곧장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사람들은 모두 강심설이 못된 짓을 벌였고 갈란군주를 모함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소문을 퍼뜨렸음을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순순히 수긍했다. 하기야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그리 동네방네 다 퍼질 수 있겠는가? 딱 봐도 이 일은 누군가가 조작한 것이었다. 일부는 강심설이 자초한 일이며 자업자득이라고 탄식했다.
오후가 되자 갈란군주는 다시 일상원으로 돌아왔고 진씨는 하인들에게 밥상을 차리게 했다. 그런데 녹엽이 갑자기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마님, 군주……! 채 공공이 오셨습니다.”
“뭐?”
진씨는 깜짝 놀랐다.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채 공공이?’
진씨와 갈란군주가 미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채 공공이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군주, 부인.”
“아이고. 공공이 오셨는데 나가 보지도 못했네요.”
진씨는 들뜬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한껏 환대했다.
“어서 차를 내오거라. 공공, 자리에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채결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뒤쪽을 돌아봤다. 그러자 어린 환관 한 명이 곧장 앞으로 나왔는데, 그의 손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쟁반 위엔 백옥여의가 올려져 있었다.
채결이 말했다.
“폐하께서 군주께서 시집가신 후로 여러 가지 일도 있고 탈도 많아 특별히 군주께 여의를 하사하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진씨는 더욱 깜짝 놀라 흥분과 설렘을 느꼈다.
‘역시 갈란을 들인 건 올바른 선택이었어! 봐봐, 갈란이 억울한 일을 좀 겪었다고 폐하께서 바로 하사품을 내리셨잖아! 사실 폐하께서도 속으로 불만이 많으실 거야. 황실의 군주가 일개 평처가 됐으니 말이야.
그런데 강심설 그게 세상 물정에 어찌나 깜깜한지 알아서 정실부인 자리에서 내려오지를 않으니 원. 이젠 갈란을 괴롭히기까지 하니 폐하께서 당연히 군주를 뒷받침해 주시려는 게지.’
“황송하옵니다.”
갈란군주는 앞으로 한 발짝 나와 미소를 머금고 여의를 건네받았다.
“공공, 돌아가면 날 대신해 할바마마께 안부 인사 좀 전해 주게. 그리고 집안일은… 다 오해일세. 바깥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며 허튼 소문을 퍼뜨린 것에 불과하네. 형님과는 관계없는 일이지. 그러니 할바마마께 나무라지 마시라고 전해 주게나! 란이는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야!”
채 공공은 갈란군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군주는 항상 괜찮다고 하시지만 폐하께서는 군주께서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길 바라십니다.”
“물론이네.”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폐하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겁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소인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채 공공은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갈란군주는 옥여의를 손에 쥐고선 채 공공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역시 할바마마는 여전히 날 아끼시는구나!’
때가 되어 주운환 일이 폭로되면 그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될 거고, 그때 태자는 권세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는 건 내키지 않을 테니 손을 쓸 것이다. 그럼 모든 것이 주비양 손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되면 나는 다시금 경위영 대장의 아내가 되겠지.’
하지만 강심설이란 존재가 거슬렸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추켜세우고 있다 해도 어쨌든 신분으로는 강심설에게 밀리는 것이다.
* * *
옥여의 일은 금세 침향거로 전해졌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심설은 격정을 주체하지 못해 몸이 기우뚱하더니 하마터면 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만월이 눈물을 흘리며 그런 주인을 위로했다.
“마님, 화내지 마세요. 이러다 정말 화병으로 돌아가시게라도 되면 그 사람 뜻대로 해 주는 겁니다.”
강심설은 숨을 크게 몇 번 내쉬고는 다짐했다.
“난 죽지 않을 거다! 반드시 잘 살고 말 거다! 설사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해도 그 여인도 짜증 나 미쳐 버리게 만들 거야. 난 학해가 자라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거니까.”
“마님, 옳은 생각이십니다. 군주의 출산 가능 여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설령 정말로 출산할 수 있다고 해도 한 번에 득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만약에 그 군주가 정말로 운수가 좋아 그리된대도 저희는 잠시 때를 기다리면 그만입니다. 학해 도련님이 다 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도련님을 열심히 공부시켜 나중에 도련님도 장원이 되면 셋째 나리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장원이 되지 못해도 셋째 마님께서 도련님을 발탁해 주시기만 하면 잘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는 꼭 고난에서 벗어나게 될 겁니다.”
강심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월이 다시 말을 이었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도련님이 매일 이곳에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단 거지요.”
“그래도 학해가 궁명헌에 있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이 일이 잠잠해지면 아버님께 부탁을 드려 보자꾸나. 아버님은 학해가 돌아오는 것에 동의하실 거다. 가서 학해를 보고 오너라.”
“예.”
만월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만월이 궁명헌에 도착해 보니 엽연채가 탑상에 앉아서 주학해에게 간식을 먹여 주고 있었다.
“학해야, 음식은 얌전히 먹어야 해. 그래야 얼른 커서 어머니를 보호해 드리지.”
“네.”
주학해는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음식을 조심스레 받아먹었다.
“마님.”
안으로 걸어 들어온 만월은 이 모습을 보니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만월아!”
주학해는 얼른 만월에게 달려갔다.
“학해 도련님, 잘 지내셨죠? 당분간은 이곳에서 계속 지내셔야 해요. 안 그러면 큰마님 병이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아시겠죠?”
“응.”
만월은 몇 마디 더 주학해를 위로해 준 후 그곳을 떠나갔다.
한편, 엽연채는 회임한 몸으로 주학해를 챙기느라 요 며칠 너무 힘들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저녁에도 꼬마에게 음식을 다 먹인 후에야 잠이 들었다.
이튿날, 엽연채는 조금 늦게 일어났다. 막 청유가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는데 백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고했다.
“마님, 학해 도련님이 열이 좀 납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
“예.”
백수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청유는 손질에 속도를 높였고 잠시 후 엽연채의 간단한 올림머리가 완성됐다. 그녀의 머리 위엔 홍옥으로 장식된 해당화 보요가 꽂혀 있었다.
엽연채는 혜연이 가져온 옷을 걸친 후 곧장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주학해가 지내는 서쪽 곁채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 유모가 주학해를 안고선 잠을 재우고 있었다.
“어떤가?”
엽연채는 사 유모 앞으로 다가섰다.
사 유모는 스물다섯쯤 된 젊은 여인으로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나 복스러운 상이었다. 그녀는 주학해가 어릴 때부터 쭉 그에게 젖을 먹여 온 유모인지라 주학해에게 정이 깊었다. 지금 주학해가 음식을 먹지 못하니 그녀는 정성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도련님 몸이 조금 뜨겁고 재채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 유모가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주학해가 그 말을 듣더니 괜찮다고 억지를 썼다.
“난 안 아파요. 금세 좋아질 거예요…….”
엽연채는 아픈 기색이 역력한 아이에게 다가가 조그만 머리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금세 좋아질 거다. 학해야, 조금 있다가 약도 잘 먹어야 된다.”
주학해는 약 소리에 몸을 살짝 떨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입은 삐죽거렸지만 말이다.
“어쩜 이리 말도 잘 들을까?”
엽연채는 마음이 녹아내려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요 녀석도 이렇게 말을 잘 듣겠지!’
그런데 엽연채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표정이 경직되더니 작게 탄식했다. 뒤에 있던 청유와 혜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님,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요 녀석이 배를 찼어.”
엽연채는 입을 빼쭉거렸다. 녀석이 배를 힘껏 찼기 때문이다.
혜연은 풉 하고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질투하나 봐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었고 더욱더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 후면 요 녀석이 태어날 텐데 무슨 이름을 지어 줘야 좋을까?’
생각을 하던 엽연채는 살짝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아직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주운환은 또 집에 없었다. 엽연채는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의원이 왔습니다.”
밖에서 백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오십 대로 보이는 의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고 약상자를 매고 있는 아이가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