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5화
엽연채와 청유가 주학해를 데리고 돌아오자 혜연과 백수는 깜짝 놀랐다.
“어? 마님, 왜 학해 도련님을 데리고 오셨어요?”
“이틀 정도만 돌봐 줄 거란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문턱을 넘어서더니 고개를 돌려 주학해를 쳐다보았다.
“발밑을 조심하거라.”
주학해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 피부가 희고 보드라웠다. 생김새는 주비양을 많이 닮았는데, 다소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눈과 눈썹이 그의 작고 동그란 얼굴에 붙어 있으니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가 살짝 화가 나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엽연채는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나도 이렇게 귀엽겠지?’
그녀는 주학해를 곁채에서 지내게 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후라 엽연채는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 바로 씻고 잠이 들었다.
주씨 가문 저택을 밝히는 다른 등들 또한 점점 더 줄어들었고, 어느새 드문드문 몇 개의 등불만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집안 하인들에겐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떠들썩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늘 일상원에서 그런 큰 소란이 있었으니 밖에 있던 여종들은 전부 이야기를 들었고, 후에 엽연채가 주학해를 데리고 궁명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진씨는 새며느리인 갈란군주만 좋아하고 큰며느리인 강심설은 미워해 그녀가 화병이 나게 만들었다.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찼는지 큰며느리의 아들마저 갈란군주에게 넘겨 그녀가 키우게 하려고 했는데, 손아래 동서인 엽연채가 주학해를 데리고 가 버린 것이다.
주씨 가문 하인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다른 한편으론 다들 눈치가 있는지라 이 집안의 권력 구도가 바뀌었음을 바로 알게 되었다. 주비양이 갈란군주를 총애하고 진씨도 이 며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니 정실부인인 강심설은 끝난 셈이었다.
하지만 집안 하인들은 여기에 대해선 감히 입을 나불댈 수 없었고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조용히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그러면서 모두 갈란군주가 과부긴 해도 감히 그녀를 얕잡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녀를 추켜세워야만 한다는 사실을 새겨 두었다.
집안에서는 이렇듯 쉽사리 입을 놀릴 수 없지만, 도성 안의 음식점과 찻집에선 이 이야기로 떠들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갈란군주처럼 남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바로 재가하는 일은 극히 드무니 오락거리가 별로 없는 백성들에게 이 일은 아주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모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 * *
이날 이른 아침에도 도성 사람들은 주씨 가문 일에 대해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초점은 갈란군주가 얼마나 총애를 받고 있는지가 아니라 갈란군주가 상중에 재가했으니 불운이 가족들을 잡아먹을 거라는 데 있었다.
그 시각, 일상원의 진씨는 전과 마찬가지로 갈란 등을 불러 문안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마치 황태후처럼 오만한 자세로 탑상에 앉아 있었고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비위를 맞춰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빤한 속내를 읽은 갈란군주는 하좌에 앉아서 가장 최근에 나온 새로운 장신구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진보루珍寶樓에 귀부인들이 쓰는 비취 장신구들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내일 어머님과 함께 보러 가고 싶어요.”
“그래, 좋지.”
진씨가 흔쾌히 대답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갈란군주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미소가 어제보다 밝아 보이지 않았다. 진씨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 낯빛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구나. 무슨 일 있었느냐?”
그러자 갈란군주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마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듯합니다!”
“마님, 그게 아니라…….”
만심이 죽상을 하며 입을 뗐다.
“만심아!”
그러나 갈란군주가 얼른 호통을 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냐?”
진씨는 어리둥절했지만 갈란군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당연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군주, 군주는 너무 착하세요.”
만심이 말했다.
“밖에서 떠도는 소문 때문입니다. 큰마님이 병이 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호사가들이 그게 저희 군주 때문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진씨는 깜짝 놀랐다.
“뭐라?”
“제가 남편 잡아먹고, 부모 잡아먹고, 자식 잡아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남편의 처첩을 잡아먹는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만심은 빈정거리며 말했다.
“대제엔 질투심 때문에 화병이 난 여인들이 많은데 설마 그 사람들이 전부 다른 사람 때문에 병이 난 거라는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진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떤 천박한 것들이 감히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다는 말이냐?”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만심은 콧방귀를 뀌더니 누군가를 콕 짚었다.
“가장 억울한 사람이겠죠!”
진씨는 쯧, 혀를 찼다.
“더 말할 것 없다. 분명 그것이 벌인 짓이겠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 더러운 일만 할 줄 아는구나. 녹엽아, 가서 그 빌어먹을 것을 불러오너라.”
“어머님!”
갈란군주는 황급히 소리를 치며 그녀를 제지했다.
“만심이가 허튼소리 하는 것이니 듣지 마세요. 만심아, 증거도 없이 남을 모함해서는 안 된다.”
“전…….”
만심은 입을 빼쭉거렸다.
“전 그저 사실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일은 어제 일어났는데 오늘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모를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둘러 군주의 평판에 먹칠을 했습니다.”
“백성들이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뿐이다. 형님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갈란군주는 열심히 강심설을 지켜 주는 척했다.
* * *
그 시각 침향거.
엽연채는 응접실의 권의에 앉아 있었고, 주학해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운 강심설의 품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 엽연채는 식사를 한 뒤 주학해를 데리고 강심설을 보러 왔다.
다행히도 어제 엽연채에게 한 소리 들은 강심설은 주학해를 위해 기운을 많이 차린 모습이었다.
“녹엽 언니, 무슨 일로 왔어요?”
그런데 밖에서 만월의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월과 녹엽은 줄곧 사이가 좋았지만, 어제 녹엽이 주학해를 데려간 후 그런 일이 벌어지자 만월은 저도 모르게 녹엽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녹엽 역시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그저 호의를 베풀었던 것뿐이었다. 갈란군주는 진씨에게 그렇게 예쁨을 받는 반면 강심설의 지위는 이미 위태위태한 정도를 지나 도저히 기사회생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갈란군주가 강심설보다 못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강심설이 적장자를 낳았으며 그가 진씨의 유일한 손자라는 것이었다.
진씨는 줄곧 주학해를 아껴 왔다. 그래서 녹엽은 강심설이 지금 병이 났으니 진씨가 당연히 손자를 본인 곁에 두고 돌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씨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라 며칠 돌보다가 결국 주학해를 다시 강심설 곁으로 돌려보내지, 오래 두지는 않을 터였다.
녹엽은 그 며칠이면 충분하리라고 여겼다. 진씨가 영리하고 귀여운 손자를 보고 있으면 어찌 됐든 간에 강심설의 공로를 고려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좋은 마음으로 행한 일이었으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자 녹엽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낯빛이 조금 하얗게 변했지만, 굳이 변명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강심설을 구해 줄 방법이 더는 없었고 자신은 그저 어린 여종에 불과하며 공교롭게도 그녀의 상전은 진씨였다. 그러니 이참에 아예 침향거 쪽과 선을 긋는 편이 나았다. 안 그러면 앞으로 그녀도 난처해질 것이다.
녹엽이 마른기침을 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심설은 고새 많이 여윈 모습이었다.
그녀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마님, 주인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쿨럭쿨럭……!”
강심설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도 진씨가 언급되자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날 무슨 일로 부르셨느냐?”
“전 그저 말을 전할 뿐입니다. 큰마님께서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녹엽은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기 입으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엽연채가 녹엽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그럼 가자꾸나.”
만월은 몹시 걱정스러웠지만 강심설의 처지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라는 생각이 들자 하는 수 없이 강심설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들은 침향거를 나와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일행이 서차간으로 들어가자 허리를 꼿꼿이 편 단정한 모습으로 배나무 탑상에 앉아 있는 진씨의 모습이 보였고, 갈란군주는 바로 진씨 옆에 놓인 수돈 위에 앉아 있었다.
강심설은 두 사람을 보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두려움이 치솟기 때문인지는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진씨 앞으로 다가간 강심설은 부축을 받으며 예를 올렸다.
“어머님.”
“어머님.”
엽연채도 동시에 몸을 낮추며 예를 올렸다.
진씨는 두 사람이 함께 온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정말 갈수록 못나지는구나. 이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 이젠 엽씨 저 망할 년과 한통속까지 되었어.’
진씨가 들고 있던 찻잔을 냅다 집어 던지자 ‘쨍그랑’ 소리가 나며 강심설의 발치에서 찻잔이 깨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신발은 찻물에 흠뻑 젖었고 심지어 파편 조각 하나가 날아올라 그녀의 손을 할퀴었다.
“어머님…….”
강심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아직 살아야 하고 주학해도 이 집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의지할 곳이 없으니 억울해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잘하는 짓이더구나!”
진씨가 밑도 끝도 없이 노성을 내질렀다.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 시치미를 떼는 것이냐!”
진씨는 냉소를 지었다.
“녹엽아. 네가 말해 주거라.”
녹엽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큰마님이 병이 나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셋째 마님께서 학해 도련님을 돌보게 되셨죠. 그런데… 저희 집안에서 일어난 이 사소한 일이 오늘 이른 아침에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밖에선 이 일을 두고 수군거리기를… 군주께서 집안에 들어와 큰마님께서 병이 난 거라고 하네요.”
강심설과 만월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저 몸이 아픈 것뿐인데 뜻밖에도 이런 효과가 생겼단 말인가? 바깥 동향을 들은 강심설은 속으로 은근히 기뻐했다.
“이 악독한 것!”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진씨가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니, 강심설은 그녀의 의중을 읽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