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4화
“봐라, 봐!”
진씨는 차가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보며 말했다.
“란이는 솔직히 말하고 있다. 네게 허황된 말도 하지 않는구나. 함부로 친어머니처럼 돌보겠다는 말을 하며 장담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학해의 친어머니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과감히 하는 걸 보니 란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한 거다. 강심설은 친어머니인데도 계모만도 못하구나! 란이었다면…….”
“또 무슨 일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주 백야가 뒷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아직 가시지 않은 격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정말로 머리가 너무 아팠다. 주묘화의 여종이 달려와 그를 끌고 오지 않았다면 이 난장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그래도 하나뿐인 손주 일이니 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리…….”
진씨가 말을 하려고 하는데 주 백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소! 학해의 친어머니가 있는데 뭣 하러 이 모자를 갈라놓으려 한단 말이오. 그리하면 오히려 군주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것이오! 당신은 학해를 위해 그리하는 거지만 밖에서는 군주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 텐데 뭣 하러 군주를 그런 사람으로 만든단 말이오.”
“하지만 강심설이 아이 교육을…….”
진씨는 강심설을 제거할 생각인데 어디 주학해를 다시 강심설의 손으로 돌려보내려 하겠는가. 주학해야말로 강심설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 아닌가.
주 백야가 인상을 쓰며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엽연채를 안고 엉엉대는 주학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엽연채에게 이리 일렀다.
“셋째야, 학해의 어미가 병이 났으니 네가 학해를 며칠 돌봐 주거라.”
그는 그리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진씨를 쳐다봤다.
“이럼 되지 않겠소? 갈란에게 돌보라고 하면 지금 상황이 이러하니 갈란도 편히 가르칠 수 없을 거고, 오히려 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것이오. 그렇다고 당신 처소에 데려다 놓으면 당신은 아이가 시끄럽게 구는 걸 싫어할 것이고.
그러니 우선 셋째의 처소로 보내 며칠 지내게 하고 학해 어미의 병이 나으면 그때 아이를 잘 가르치라고 말해 봅시다. 그렇게 해서도 도저히 안 되면 교양 있는 유모를 들이면 되오.”
갈란군주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진씨는 화가 잔뜩 치밀었지만 주 백야가 한 말도 사실이었다. 지금 갈란군주에게 주학해를 돌보라고 하면 갈란은 엽연채가 했던 ‘계모는 십중팔구 나쁘다.’라는 말 때문에 감히 주학해를 단속할 수 없을 것이고, 주학해는 제멋대로 굴며 갈란을 업신여길 것이다.
엽연채는 손을 내밀어 주학해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의했다.
“그리하시지요! 제가 며칠 데리고 있겠습니다.”
아이를 가진 후로 엽연채는 항상 아이의 미래가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아이들이 점점 더 좋아졌다.
‘게다가…….’
그녀는 생각을 하며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억울한 듯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러자 엽연채의 눈동자에 순간 싸늘한 빛이 스쳤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갈란군주는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고 일 처리를 신속하게 하며 기회를 꽉 잡아 승세를 타고 최대한의 이익을 손에 쥐는 사람이라고 귀띔해 줬다.
그러니 갈란군주가 언제 수를 쓸지 추측하고 있기보다는 주도적으로 흐름을 장악하는 편이 나았다.
주학해를 데리고 문밖으로 나간 엽연채는 궁명헌이 아니라 강심설이 지내는 침향거沈香居로 향했다.
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자 만월이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주학해는 바로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더니 흑흑대며 눈물을 흘렸다.
“만월아.”
“도련님, 마님께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세요!”
만월은 그를 껴안아 준 다음 그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녹엽이 주학해를 데려가자 강심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씨의 시중을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에 진씨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강심설은 곧장 만월에게 엽연채를 부르라고 했다. 지금 이 집안에서 진씨를 저지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녀니까.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짙은 약 냄새가 풍겼다. 건넌방을 지나 침실에 도착하자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강심설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주학해는 눈물을 흘리며 침상 위로 달려들었고, 강심설은 살짝 붉어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가까이 오지 말거라. 이 어미는 병이 들었으니 숙모 곁으로 가거라.”
엽연채가 보니 그녀는 낯빛이 창백하고 살도 확 밭아져 있었다.
“하루 만에 병이 이렇게 심해진 거예요?”
“요 며칠 날씨가 좀 추워지고 밤바람도 좀 불어서…….”
강심설은 기침을 했다.
“태의가 감기에 걸린 거라는데 좀 심하게 와서… 동서도 멀리 떨어져 있게. 잘못하다간 동서에게도 옮길 텐데 그럼 안 되잖나. 동서는 지금 아이도 가진 몸인데.”
“큰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청유는 엽연채를 끌고 뒤로 두 발짝 물러섰다.
엽연채가 말했다.
“형님은 감기에 걸린 것뿐이니 몸조리를 잘하면 돼요. 며칠 후에 다시 형님에게 아이를 돌려 드릴게요.”
하지만 강심설은 기뻐하는 대신 두 눈을 꽉 감았다.
‘지금 좋아진다고 해도 그다음은?’
그녀는 지금 삶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암흑처럼 느껴졌다. 갈란군주가 이곳에서 그녀를 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평생, 영원히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비양은…….’
주비양이 갈란군주에게 느끼는 깊은 정이 바로 그녀가 마음의 병을 얻은 이유이며 고통의 근원이었다. 이건 한 여인의 존엄과 관련된 문제였다.
주비양은 줄곧 갈란군주를 사랑해 왔다. 갈란군주가 그를 버렸음에도 결국 갈란군주의 남편이 죽고 그녀가 손가락만 까딱하니 주비양은 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나는 대체 뭐란 말이야?’
세상에 이보다 더 모욕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라는 존재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강심설은 이런 생각을 하며 눈물을 떨구었다.
“내가 이런 상태니…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학해가 말썽을 좀 부리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론 말을 잘 들어…….”
그러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제게 뒷일을 맡기시는 거예요? 그럴 생각은 접으세요! 전 형님을 대신해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예요. 형님도 아시겠지만 곧 있으면 제 아이도 태어나요. 그런데 제가 형님을 대신해 학해를 돌볼 힘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학해는 제 아이도 아니에요. 학해는 큰아주버님과 형님의 아이이며 어머님의 친손자예요. 학해가 정말로 저희 집에서 지내게 된다면 어머님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요. 그럼 저희 진서후부도 어머님 때문에 난장판이 되겠죠. 그런 큰 골칫거리를 제가 떠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강심설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 그녀는 엽연채가 너무 무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엽연채의 말 또한 사실이었다. 진씨는 분명 그 대단한 성미로 엽연채의 생활을 난장판으로 만들 것이다. 자신조차도 그러길 원치 않는데 다른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면 학해를 친정으로 보내세요!”
엽연채는 방법이 없다는 듯 두 손을 펴 보이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만월이 얼른 만류했다.
“갈란군주께서 집안에 들어오셨고 세자 나리는 원래부터 갈란군주를 좋아하셨고 마마를 총애하고 계세요. 군주께서 집안으로 들어온 후로 세자 나리의 마음에 저희 마님은 없습니다. 아니, 나리께서는 단 한 번도 마님을 마음에 품으신 적이 없다고 해야 맞겠죠.
마님의 친정 식구들께서 소식을 들은 후 이곳으로 달려오셨지만 마님을 위해 나서기는커녕 마님께 갈란군주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라고 설득을 하셨을 뿐입니다. 심지어 정실부인의 자리를 양보하고 스스로 평처로 내려오는 편이 낫다는 말도 하셨어요. 그래야 황실도 체면이 설 거라고 말이죠. 그럼 황제 폐하께서 기쁜 마음에 어쩌면 강씨 가문을 보살펴 주실지도 모른다고요!”
만월은 분노와 원망이 섞인 어조로 말했고 강심설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청유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부모가 있을 수 있지?”
명절을 쇨 때 노교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온씨도 첩실을 들이라고 엽연채에게 충고를 하긴 했지만 자기 딸에게 이렇게 큰 설움을 겪게 하지는 않았다.
만월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해 나갔다.
“저희 마님의 자당께서는 본인의 두 아들만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마님은 이미 시집간 여식이고 엎질러진 물인 거죠.”
강심설은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흘깃한 엽연채가 말했다.
“보세요. 친부모라고 해도 꼭 자기 자식에게 잘하는 건 아닌데 숙모인 저와 계모는 더 말할 것도 없죠. 형님이 분발하지 않으면 다른 여인이 형님 남편과 잠을 자고 형님 자식을 때리게 만드는 거예요.”
“걱정 마, 동서. 내 반드시 몸조리를 잘할 거니까.”
강심설은 주학해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자 크게 심호흡하며 심기를 가다듬었다.
“그래요, 형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거나 갑자기 급사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형님 아이는 제 처소에서 며칠간 잘 돌봐 드릴게요.”
강심설은 주학해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조그만 아이가 눈이 빨갛게 변할 정도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숙모 처소에서 며칠 지내거라. 이 어미가 요 며칠 몸이 좋지 않아 너까지 병이 날까 봐 걱정이 되어 그런단다. 학해도 아프고 싶지 않지?”
그러나 주학해는 조그만 입을 쫑긋거리며 고집을 부렸다.
“싫어요, 전 어머니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다른 곳에서 지내고 싶지 않아요.”
강심설은 이렇게나 자신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며칠 만이다. 곧 돌아올 거란다. 이 어미가 다 나으면 계화고桂花糕를 만들어 주마. 착하지?”
엽연채도 몸을 굽혀 주학해와 시선을 맞춘 후 미소 띤 얼굴로 달랬다.
“네가 여기에 있으면 어머니 병이 낫지 않을 거야. 넌 어리지만 사내이니 어머니를 보호해 드려야지.”
주학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전 어머니가 아픈 걸 원치 않아요. 어머니가 건강해지길 바라요. 제가 어머니를 보호할 거예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엽연채는 마음이 따뜻해져 아이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며칠 동안 이 숙모와 함께 지내자꾸나. 울거나 소란 피우면 안 된다. 알겠지? 네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면 이 숙모가 널 데리고 어머니를 보러 올 거야.”
주학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강심설은 당부의 말을 한가득 전한 후에야 두 사람을 보냈다.
만월은 주학해의 옷가지 등을 챙기고 그의 유모인 사 유모를 부른 뒤 함께 궁명헌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