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3화
진씨는 자리에 앉더니 갈란군주에게 갈비 한 점을 집어 주며 말했다.
“자, 란아. 이건 우리 집 주방장이 가장 잘하는 음식이다. 초염산배골椒鹽酸排骨인데 먹어 보렴.”
갈란군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어머님.”
“참 나…….”
주 백야는 진씨가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갈란군주의 환심을 사려고 아등바등하자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녹엽아, 가서 셋째 며느리를 데려오거라.”
“데려오긴 뭘 데려옵니까!”
진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리. 비양이야말로 적장자입니다. 셋째는 분가도 했으니 앞으론 비양이에게 의지해야 해요.”
주 백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적장자는 주비양이었고 주운환은 능력이 있기는 하나 이미 분가를 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주 백야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왜냐면 주비양은 주운환에게는 비교도 되지 못하니 말이다.
“비양이는 란이를 아내로 맞이한 후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분명 점점 더 좋아질 거고 집안을 일으킬 겁니다. 란이가 우리 집안을 흥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진씨의 이 말에 주 백야가 주비양을 쳐다보니 아들은 확실히 많이 변한 듯싶었다. 적어도 전처럼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이지는 않으니 좋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옆에 앉은 갈란군주를 보니 절로 주씨 가문이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주씨 가문이 가장 잘나갈 때 갈란군주는 주씨 가문에 속해 있었는데 갈란군주가 떠나자 주씨 가문도 예전만큼 잘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갈란군주가 다시 주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치 길조처럼 말이다.
* * *
진씨와 얼굴을 붉힌 엽연채는 이튿날 아침에 진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았다. 하지만 주묘화는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고,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니 진씨는 탑상 위에, 갈란군주는 진씨 바로 옆에 놓인 하좌의 수돈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만심이 한쪽에 서 있었는데 그녀의 손에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쟁반엔 전지와 연꽃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 함이 놓였는데, 그 안에는 연고 형태의 붉은색 물체가 든 성싶었다.
갈란군주는 진씨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톱에 뭔가를 조심스럽게 발라 주며 말했다.
“이건 북연에서 공물로 바친 응주구단凝珠蔻丹입니다. 매년 몇 상자밖에 안 생기는데 황후 마마께서 매년 제게 한 상자씩 주세요. 그런데 지금 보니 어머니 손에 바르는 게 제 손에 바른 것보다 더 예쁘네요.”
“얘도 참. 말을 어쩜 이리 예쁘게 할까?”
진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황실 물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었다. 진씨는 비위를 맞추기 참 편한 사람이었다. 황실의 군주인 자신이 계속 진씨를 떠받들어 주고 그녀를 고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기만 하면 쉽게 우쭐거리는 것이다.
‘주비양의 마음도 꽉 붙잡아 놨고 진씨도 정복했어.’
갈란군주는 득의양양해하며 입술을 위로 당겼다.
주묘화가 진씨와 갈란군주 쪽으로 걸어가 보니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러자 주묘화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고 강한 반감이 들었다. 동시에 이 집안의 권력 구도가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분가한 엽연채와 주운환이 정말 부러워졌다.
“어머니.”
주묘화가 예를 올렸다. 진씨는 기분이 좋아 주묘화를 보는 것도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앉거라.”
주묘화가 자리에 앉는데 녹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즐거워하는 진씨와 갈란군주의 모습에 한동안 우물쭈물하더니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마님, 큰마님 병세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태의가 오늘 아침에 와서 처방을 해 줬는데 야생 산삼을 써야 한다 합니다.”
정국백부도 다른 대갓집처럼 작은 약방을 갖추고 있었다. 평범한 약은 바로 거기에서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귀한 약재는 진씨에게 먼저 보고를 올려야 했다.
진씨는 정색을 하더니 아주 불만스러워했고 주비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가져가거라.”
그러자 갈란군주가 손수건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녹엽아. 내 혼수 중에 천산야삼天山野蔘이 두 뿌리 있으니 사람을 시켜 가져가게 하거라.”
그러자 진씨가 갈란군주를 째려보더니 꾸짖듯이 말했다.
“얘 좀 봐라. 넌 너무 쓸데없이 도량이 넓구나! 걘 줄곧 옹졸하게 굴었고 네 반도 못 따라가는 애다. 정말이지 이리 비교가 되니 내 울화통이 안 터질 수가 없구나.”
“어머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갑자기 시집을 왔으니… 형님 마음이 편치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형님을 탓하지 마세요.”
갈란군주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만심을 불렀다.
“만심아. 네가 산삼을 가져가 주방에 보내거라.”
주비양은 그녀의 손을 잡았고 갈란군주는 미소로 화답했다.
어쨌든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하니 주비양도 강심설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 해를 같이 지낸 부부였다.
그래도 주비양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였고 그의 마음은 전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대범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강심설의 옹졸한 면이 더욱 부각될 것이고 주비양은 더욱 그녀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녹엽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지금 큰마님께서 병이 나셨으니 도련님은 어찌할까요? 계속 그곳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까요.”
전에 진씨는 주학해를 아주 아끼고 사랑했다. 어미가 어쨌든 그녀의 유일무이한 손자이니 말이다. 하지만 갈란군주가 집안에 들어오자 진씨가 주학해에게 느끼던 애정도 조금 시들해졌다.
그래도 지금 주학해 이야기가 언급되자 진씨는 관심을 보였다.
“학해를 데려오거라. 그 아이도 새어머니에게 예를 올리게 해야지.”
녹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녹엽이 주학해를 데리고 일상원에 돌아왔다.
주학해는 이미 다섯 살이라 아주 아무것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그는 녹엽에게 끌려오는 동안 계속 입을 삐죽거리며 훌쩍거렸다.
진씨는 주학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뜨끔했다.
“학해야, 왜 우는 것이냐?”
주학해는 진씨의 품으로 달려들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세요. 몸이 뜨거워서 제가 후후 불어 드렸는데 어머니는 절 신경도 안 쓰셨어요.”
그러자 진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어미가 너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이냐? 정말이지 옹졸하기 이를 데 없구나. 아이도 신경 쓰지 않다니! 흥! 자, 학해야. 어서 새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려야지.”
주학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갈란구주를 보고는 좀 전보다 눈물을 더 펑펑 쏟았다.
“할머니, 전 새어머니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전 우리 어머니가 필요해요! 이 군주는 나쁜 사람이에요! 흑, 흑흑… 저 사람이 와서 저희 어머니가 병이 난 거예요. 저 사람이 우리 어머니를 아프게 만든 거예요. 전 저 사람에게 인사하지 않을 거예요…….”
갈란군주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목소리를 떨며 이리 물었다.
“학해야… 너… 네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느냐?”
갈란군주의 얼굴은 굴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다시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님, 학해가 인사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억지로 시키지 마세요.”
진씨는 뜻밖에도 주학해가 갈란군주를 욕하는 모습을 보자 그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누가 그리 말하라고 가르쳤느냐?”
주학해는 대답하지 않고 흑흑 눈물을 흘렸다. 그의 입에선 온통 갈란군주는 나쁜 여인이라는 말만 나왔다. 그러자 진씨는 화가 나 주학해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고, 주학해는 더욱 펑펑 울어댔다.
“이런 고얀 것. 분명 강심설 그 비천한 것이 네게 이런 막말을 하라고 가르쳤겠지. 몰락한 가문의 여식답게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란아, 앞으론 네가 학해를 가르쳐라.”
그러자 갈란군주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모와 떨어지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다.”
“안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진씨가 말했다.
“강심설은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아이를 가르칠 줄 모른다. 넌 황실의 군주라 어릴 때부터 궁 안의 마마가 널 가르쳤을 테니 네게 맡기면 나도 안심이 될 게다.”
진씨는 여전히 주학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적장손이잖은가. 게다가 어쩌면 갈란군주에게선 아이를 못 볼지도 몰랐다. 오일의에게 낳아 준 아들이 약골인 걸 보면 또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강심설에게 완전히 학을 뗀 진 씨는 차라리 손자를 갈란군주에게 맡겨 그녀가 가르치고 기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아악!”
주학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어린아이 특유의 장점을 발휘했다. 그는 왁왁 비명을 지르며 이렇게 목청을 드높였다.
“전 나쁜 여인과 함께 살기 싫어요! 전 어머니가 필요해요! 전 제 어머니만 원해요!”
“학해야!”
주비양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지만 주학해는 여전히 울면서 소리를 질렀고, 그에 귀가 다 먹먹해진 진씨는 화를 내며 고함을 쳤다.
“이리 버릇없이 굴다니, 꼭 누굴 빼닮은 것 같구나. 정말 성질나 죽겠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의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였다. 그녀는 진씨 등의 앞에 서더니 눈썹을 추켜세우고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님, 아첨과 무시가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군주 며느리에게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으시네요.”
진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다니?”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친손자를 계모의 손에 맡길 필요가 있습니까?”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계모는 십중팔구 나쁘답니다. 어머님은 손자의 운이 아주 강한 게 싫으신가 보네요?”
“너 같은 소인이 어찌 군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옆에 있던 주묘화는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서 낯빛이 확 변했고 슬그머니 밖에 있는 여종에게 눈짓을 했다.
“그럼 어머님은 그렇게 도량 넓은 대인배시면서 왜 어머님의 아들딸은 다른 사람에게 보내 키우지 않으신 거예요?”
엽연채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고 주학해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거라.”
그러자 주학해는 흐느껴 울며 엽연채에게 달려오더니 그녀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이……!”
진씨가 엽연채를 꾸짖으려고 하는데 갈란군주가 눈물을 떨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네. 계모는 십중팔구 나쁘지! 하지만 난……. 됐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틀린 말이겠지. …부군.”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주비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학해는 제 아들이 아니고 전 이 아이의 친어머니가 아니에요. 전 도저히 이 아이를 완벽하게 기를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 아이가 제 손에 맡겨지면 최선을 다할 거라는 거예요! 이 아이는 당신의 아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