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1화
주학해의 말을 들은 갈란군주는 그제야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버님. 차 드세요.”
“아버지. 차 드시지요.”
주비양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그래.”
주 백야는 두 사람이 건네는 찻잔을 받아 마셨다.
두 사람은 이번엔 진씨에게 차를 올렸고 진씨 또한 차를 마셨다. 그러자 진씨의 뒤에 있던 정 마마가 걸어오더니 주비양을 부축해 일으키고는 갈란군주에게 말했다.
“군주, 큰마님께 차를 올리세요.”
그러자 갈란군주는 낯빛이 조금 하얗게 변하더니 진씨가 마셨던 찻잔을 쟁반 위에 살짝 내려놓고는 다시 다른 찻잔을 들어 강심설 앞으로 내밀었다.
“형님, 차를 드세요.”
강심설은 손을 떨며 찻잔을 건네받았고 찻잔에 입만 살짝 갖다 대더니 바로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진씨는 또 강심설을 노려봤지만 옆에서 자신을 내내 쳐다보고 있는 엽연채를 힐끗하더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억지로 삼켰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그 말이 일리가 있어도 엽씨 이 계집이 분명 공격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엽씨 이것은 사람 말문이 막힐 때까지 공격을 퍼붓고도 남을 물건이지!’
진씨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대신 속으로 엽연채를 수없이 욕했다.
“일어나요.”
주비양은 갈란군주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마마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해 줬다. 사실 다들 알고 있는 사이였지만 관례에 따라 소개를 해야만 했다. 집안사람들은 주묘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 와 있었다.
본래 도리에 따르면 주묘서도 와야만 했다. 하지만 주묘서는 갈란군주가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불운한 기운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칫 그 불운한 기운이 복중 아이에게 옮겨 붙을까 봐 친정에 오는 걸 원치 않았다.
“비양아, 공거에 가서 할머니께도 차를 올리거라.”
주 백야가 말했다.
매씨, 매 노태군은 몸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특히 지난겨울이 지나고 나서는 거동이 힘들어져 침상에서 주로 생활했으니 당연히 이곳에 오지 않은 참이었다.
“예.”
주비양은 대답을 하고는 갈란군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요.”
“네.”
갈란군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는 달콤한 미소를 지었고 두 사람은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제 다들 돌아가거라.”
진씨는 엽연채 등을 쓱 쳐다봤다.
사람들은 잇달아 자리에서 일어섰고 강심설이 주학해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주묘화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새언니…….”
주묘화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묘화는 갈란군주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갑자기 새언니가 한 명 더 생긴 것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강심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동정심을 느꼈던 차라 지금 극도로 안색이 파리한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다가가 그녀에게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새언니, 낯빛이 너무 안 좋아요. 방금 전에 들어올 때 보니 기침도 하던데요.”
“감기에 걸렸어요.”
하지만 강심설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짧게 대꾸하고는 주학해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주묘화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강심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엽연채에게 말했다.
“작은새언니, 새언니 처소에 가서 차를 마시고 싶어요.”
“그래요. 와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진씨는 엽연채에게 친근하게 구는 주묘화의 모습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정말 간사한 계집이구나. 비양이가 권력을 손에 쥔 후에도 네년들이 날뛸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 * *
대청을 나온 갈란군주와 주비양은 곧장 공거로 향했다.
두 사람이 공거로 가는 모습은 적잖은 여종들의 시선을 끌었고 여종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봤다.
“저 사람이 남편이 죽자마자 시집을 온 그 갈란군주야? 예쁘게 생기긴 했네.”
공거의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이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회색 옷을 입은 마마 한 명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마마는 두 사람을 보더니 바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갈란군주는 주비양과 정혼 관계를 오래 유지했던 사이인지라 주씨 가문 저택을 자기 집 드나들 듯 자주 놀러 왔었다. 그리고 매 노태군을 포함한 예전 주씨 가문 어른들은 그녀를 예뻐했기 때문에 갈란군주는 자연히 장 마마를 알고 있었다.
“장 마마, 잘 지냈는가? 오랜만에 보네.”
갈란군주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으나 조금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장 마마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갈란군주는 입꼬리를 살짝 씰룩이더니 주비양을 쳐다봤다. 그러자 주비양이 말했다.
“마마, 할머니는 요즘 좀 괜찮아지셨는가? 오늘 갈란이 들어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라 함께 할머니를 뵈러 왔네.”
갈란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절한 표정으로 장 마마를 쳐다봤다.
“아. 마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장 마마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님께서 소인에게 대신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썩 물러가거라! 더럽고 불결하고 지저분한 것! 우리 주씨 가문은 평처같이 천박한 건 들이지 않는다! 난 인정 못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씨와 갈란군주 등은 표정이 확 굳어졌고 다들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군…….”
갈란군주는 눈물이 고였고 몸을 살짝 떨더니 주비양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주비양은 그녀의 손을 톡톡 치고는 이렇게 달랬다.
“할머니는 원래부터 이런 분이세요.”
그들 뒤를 함께 따라온 정 마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이렇게 부탁했다.
“그럼 마마가 이곳에서 마님을 대신해 차를 좀 마셔 줘요.”
그러자 장 마마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마님께서는 말씀을 전한 후 바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몸을 낮춰 예를 올리고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사정없이 닫았다.
갈란군주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호기심 때문에 은근슬쩍 모여들었던 여종들은 갈란군주와 주비양이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갈란군주는 순간 낯이 조금 뜨거워졌다. 이렇게 많은 하인들 앞에서 이런 취급을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매 노태군은 집안의 가장 윗사람이라 군주라는 귀한 신분으로도 그녀를 억누를 수 없었다. 품계를 따져도 매 노태군은 1품 봉호를 받은 사람이었고 자신은 황실의 자손이기는 하나 2품 군주에 불과했다.
“이런……!”
갈란군주 곁에 있던 여종 만심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만심도 군주는 어쨌거나 과부이고 게다가 상중인데 시집을 왔으니 그 누구라도 기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매 노태군 앞에서 어찌할 수 있는 힘도 부족했고 말이다.
“노마님은 분명 병마로 고통스러워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것도 있을 겁니다. 여기서 절을 드리는 건 어떨까요? 그럼 노마님께 절을 드린 셈이죠.”
정 마마의 이 말에 갈란군주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주비양이 그녀를 잡아당기며 다독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절을 받지 않으셨지만 부모님과 내가 당신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
갈란군주는 미소를 지었다. 바라던 게 바로 이런 보호와 세심한 마음이었다. 전에도 그는 저를 이렇게 대했다. 아무리 소란을 피우고 오만방자하게 굴어도 그는 이렇게 늘 포용하고 보호해 줬다.
하지만 갈란군주는 어른들을 대할 때는 버릇없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할머님은 웃어른이세요. 정 마마 말이 맞아요. 우리 여기서 할머님께 절을 드려요.”
그녀가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주비양이 그녀를 확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갑시다!”
주비양은 그리 말하며 갈란군주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고 갈란군주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들이 떠나자 주위에 있던 여종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 어린 여종은 강심설의 처소로 달려가 이 사실을 고했다.
강심설은 매 노태군의 성격상 분명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곤경에 빠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주비양이 갈란군주를 더욱 감싸고돌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마음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한편, 공거를 떠난 주비양과 갈란군주는 바로 선물을 들고 수화문으로 가서 마차에 올랐다. 평왕부로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다.
* * *
엽연채 부부는 일상원을 나온 뒤 함께 궁명헌으로 갔다.
“이제 도성을 떠나야 해요?”
엽연채는 조그만 얼굴을 들고 주운환을 쳐다봤다.
“네.”
“그동안 휴가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죠.”
주운환의 대답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망한 기색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그래도 얼른 씩씩한 얼굴을 했다.
“부군, 안심하고 돌아가요. 일은 제게 맡기고요.”
주운환은 자신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더니 마음이 따뜻해져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안 있으면 부인의 생일이죠. 그때 부인을 위해 생일 축하연을 엽시다.”
두 사람은 함께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며 궁명헌으로 돌아갔고 주운환은 물건을 챙긴 후 바로 문을 나섰다. 그리고 엽연채는 응접실에 가서 수를 놓다가 정오가 되자 주묘화와 함께 일상원에 가서 식사를 했다.
진씨는 아직도 떠나지 않은 엽연채를 보더니 냉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넌 왜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냐?”
그러자 엽연채는 진씨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할머님이 편찮으시니 이곳에서 할머님 곁에 많이 있어 드리려고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매 노태군의 몸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특히 요즘 꽃샘추위가 심해서인지 매 노태군의 병세가 더욱 악화됐는데, 알다시피 이곳의 며느리와 손주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니잖은가.
그런 데다 갈란군주도 집안에 들어오게 됐으니 매 노태군이 얼마나 화가 나 있겠는가. 그래서 엽연채는 그녀 곁에 많이 있어 주고 싶었다.
“에휴. 네 말이 맞다. 그럼 어머니 곁에 자주 있어 드려라.”
주 백야는 한숨을 쉬며 그러라 했다. 그의 노모는 성격이 이상했는데 엽연채 부부만은 그녀를 좋게 보는 편이었다.
“예.”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바로 공거로 갔고 매 노태군에게 책을 읽어 줬다. 화본, 지지地誌 등 온갖 책이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