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8화
그는 그날 그녀가 입었던 난초 문양이 들어간 분홍색 유선군과 그의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설 때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상운祥雲 보요가 흔들리며 뿜어내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참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 아리땁고 애교 넘치는 그녀의 용모는 전과 다름없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수척해진 그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그녀 또한 전보다 조금은 여윈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를 보더니 낯빛이 살짝 하얗게 변했고 입술에 잔뜩 힘을 주며 오므렸다. 두 사람 다 말문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린… 파혼했어요. 군주의 집에서 사람이 찾아왔고 우리 할아버지도 동의하셨어요.”
그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를 쓰고 그녀에게 연락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파혼하게 되자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았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으며 또 그녀의 입장을 알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에 주비양은 그저 그녀가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었다. 평왕부에서 분명 그녀를 속인 것이다.
그러니 그는 갈란군주가 몹시 놀라거나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혹은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그녀는 입술을 맞붙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조금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란군주의 이런 표정을 보자 주비양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녀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줄곧 그를 피해 숨어 있었다니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그는 이미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 갔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 공자.”
이때, 갈란군주의 여종 만심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두 분은 이미 파혼하셨으니 매달리지 마세요! 어찌 됐든 간에 두 분은 명예와 위신이 있는 분들이니 이렇게 난처한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주비양은 한 줌 남아 있던 넋까지 모두 잃고 말았다. 그렇다. 두 사람은 이미 파혼했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단순히 예비부부였을 뿐만 아니라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애달프게 매달렸겠는가.
“그래, 네 말대로 그러하지만……. 군주의 집에서 파혼 이야기를 전하러 우리 집을 방문했고 바로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식을 들었을 때 양가는 이미 파혼한 상태였어요.
평왕부 사람도 이미 떠나 버린 후라 난 뒤를 쫓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지요. 하여 난 필사적으로 군주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 한 통 오지 않았지요.”
“맞아요.”
갈란군주는 마침내 입을 열었고 그녀는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냉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미 파혼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만심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어요?”
주비양은 그녀가 이렇게 남 같은 표정과 말투로 자신과 이야기하는 날이 올 거라곤 결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에요, 보통의 예비부부나 그리하겠죠. 우린… 우린 이미 마음속에 상대방을 품고 있잖아요. 이미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사이 아니었어요? 전에 우린…….”
“그만하세요!”
갈란군주는 창백한 얼굴로 호통을 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난 공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네, 우린 전에 예비부부였어요! 하나 다른 사람들도 다 이래요……. 누구와 정혼을 하든 간에 다 이런 거 아니겠어요? 부모님의 명과 중매인의 말이… 그들이 우리에게 정혼자를 찾아주면 우린 서로 사랑하면 되는 거고 그들이 바라는 예비부부가 되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이제… 지금 이 또한 부모님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따른 거예요. 부모님께서 우리의 혼사를 물렸으니… 우리가 뭘 더 어쩔 수 있겠어요? 자식으로서 어른들에게 효도하고 어른들이 정하신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죠…….
전 공자가 말한 그런 지저분한 것들은 하나도 몰라요!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제게 서신을 보내지 마세요. 안 그러면 사사로이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홀로 남겨진 그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녀는 규율을 지키지 않는, 그러니까 세상에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덮어 놓고 규율만 지키는 사람들을 방향도 모른 채 남에게 끌려다니는 ‘아둔한 나귀’라고 욕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에게 부모님의 명령, 중매인의 말 같은 걸 언급하며 규율을 논하는 것이었다.
그가 모를 리 있겠는가? 이 모든 건 그저 변명에 불과했다. 그녀가 그를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지금껏 그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귀여운 데다 활발하며 대범했다. 그런데 주씨 가문이 몰락하자마자 그녀는 예전에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아둔한 나귀’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그는 단념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답장은 한 장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황제가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는 젊은 중신과 정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인식도 치렀다. 모든 건 그렇게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때 그는 똑똑히 보았고 그녀의 속내를 모두 간파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게 될 거라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눈앞의 여인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고 참하며 매력적이었다. 성숙해지면서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 그녀는 이제 겨우 이십 대였고 여인의 아름다움과 매력이 활짝 피는 꽃다운 나이었다.
갈란군주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었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린 어릴 때 정혼했고 서로에 대한 애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었을 거예요. 제가 어떻게 정말로 모를 수 있었겠어요……. 그건 그저 강요에 의한 일이었어요! 지금 부군이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때의 저도 매한가지였어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겠어요?”
주비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 군주이고 할바마마께서 가장 총애하는 손녀이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없어요. 하니 황실 여인으로서 가장 귀하고 곱게 자랐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게다가 혼인은 결국 이익을 교환하는 것에 불과해요. 전에 부군과 제가 정혼했던 것처럼 말이죠. 하나 다행히도 우린 정혼 후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요.
그렇지만, 하늘도 무심하셨죠. 나중에 주씨 가문은 전쟁에서 패하게 됐는데 그에 반해 오일의는 할바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었어요. 할바마마께서는 경위영을 그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으니 당연히 그를 붙잡으려 하셨고요.
마침 부군의 가문에 일이 생겼고 오일의는 할바마마 앞에서 절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번 내비쳤어요. 할바마마는 그 기회를 틈타 절 오일의에게 시집보내셨어요……. 만약 제가 따르지 않았다면 주씨 가문은 어떻게 됐을 거 같아요?”
갈란군주는 이리 말하며 오열했다.
주비양은 크게 놀라 몸을 떨었다.
“지금 또 부군에게 시집을 온 걸 보니… 어쩌면 하늘이…….”
갈란군주는 이리 말하며 머리를 떨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부군이 절 믿지 않으니, 알겠어요. 결국, 우린 이렇게…….”
갈란군주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충격을 받아 몸을 떨던 주비양은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다가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란아… 란아…….”
주비양은 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갈란군주 역시 주비양을 부둥켜안더니 눈물을 한층 더 펑펑 쏟았다.
“부군이 이렇게 절 안아 주니 그동안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게 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사람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있는 힘껏 그러안고 있었다.
갈란군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말했다.
“부군은 일단 돌아가요. 전 오늘 밤 합방할 수 없다는 동서의 말에 동의했어요. 3년을 기다려야 부군과 전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어요. 오늘 부군의 정실부인은… 분명 기분이 언짢을 거예요. 어차피 부군과 전 합방할 수 없으니 정실부인에게 가서 곁에 있어 줘요.”
“안 갈 겁니다!”
그러나 주비양은 단호히 거절했고, 갈란군주는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게 되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줄곧 자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설령 없다고 해도 그는 강심설 그 여인을 사랑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이 분명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갈란군주는 아직도 눈물을 닦고 있었다.
주비양은 빗물에 젖은 복사꽃 같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침묵으로 답했다.
갈란군주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가 있는 곳에 머무르면 안 돼요. 이건 규율에 어긋나는 거예요.”
주비양은 그제야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규율에 어긋난다고 했습니까? 신혼 첫날밤에 신부가 독수공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어요? 잠자리를 가지지 않으면 되는 것뿐이에요.”
주비양은 그리 말하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갈란군주는 속으로 우쭐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창백한 얼굴로 주비양을 살짝 밀어 냈다.
“이러지 말아요. 어서 일어나요.”
하지만 주비양은 자리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 마요.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갈란군주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압니다. 속으로 오일의 일을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거잖아요.”
오일의가 언급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금 이상하게 변했고 두 사람 다 침묵했다. 잠시 후, 갈란군주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 사람과 함께한 건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던 일이었어요. 아까의 부군처럼 말이에요. 그저 부모님의 명과 매파의 말에 따랐어야 했죠. 그런데 지금… 어쩌면 모든 게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었나 봐요. 인연이었던 거죠. 돌고 돌아서… 우린 또… 이제 저도 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줬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주비양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부군… 전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주비양은 살며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갈란군주는 조그만 얼굴을 일부러 그의 목덜미에 갖다 대더니 향긋한 숨결을 가까이에서 풍겼다.
그녀는 그가 자신과 합방을 하면 자제력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되면 주비양의 잘못이며 그가 그녀에게 강요한 것이 된다. 한데 주비양은 두 눈을 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이었다.
갈란군주는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타인에게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킨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데도 기어코 신방에서 잠을 자는 걸 보니 이미 그는 그녀를 충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