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57화 (657/858)

제657화

태자는 어리둥절해했으나 곧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주운환은 서자였고 어렵사리 오늘 같은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형제들 중 가장 능력이 출중하고 가장 좋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이제 후야도 되었으니 말이다. 적모인 진씨와 적녀인 주묘서조차도 그에게 의지해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적자인 형이 갑자기 군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비록 과부긴 하지만, 어쨌든 황제의 친손녀이며 황후가 혼사를 맺어 준다는 의지도 내렸으니 황제가 군주를 중요시한다는 걸 만천하에 알린 셈이었다.

그러니 주운환은 당연히 달가울 리가 없었고 형제의 처지가 서서히 변화되는 꼴이 눈꼴사나운 것이었다. 이건 인지상정이었다.

어쨌든 주운환은 권세를 쥐고 있으니 그가 절을 올리는 예식을 보고 싶지 않으면 안 보면 됐다. 진씨 등도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반면에 태자인 자신은 아무리 원치 않아도 혼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자신이 정선제의 결정에 복종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억지웃음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태자의 온화하고 품위 있는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난 대체 언제쯤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걸까?’

“저희 큰형님은 참…….”

그때, 주운환은 이리 운을 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에 갈란군주와 정혼했을 때 군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게 확정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군주께서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더는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 군주를 집안으로 들이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정말이지 세상일은 예측하기 힘들고 길흉화복 또한 점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렇듯 세상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시간은 유수처럼 빠르게 흐르는데도, 또 어떤 일들은 이미 하늘이 다 정해 놓은 듯합니다.”

태자는 이 말을 듣자 가슴이 요동쳤고 낯빛도 한층 더 가매졌다.

그렇다. 주운환의 말대로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수 있단 그 말이 대체 왜 있겠는가.

자신이 지금은 안정적으로 태자의 자리에 앉아 있고 황제가 가장 흡족해하는 후계자이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누가 알겠는가.

황제의 병처럼 말이다. 황제는 분명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복되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제위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설마 이것 또한 하늘이 이미 다 정해 놓은 운명인 걸까? 이미 한 번 제위에 오를 기회를 날리고 말았으니, 앞으론 기회가 없는 걸까?’

이후 어떤 변고가 생기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태자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태자는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얼굴엔 미소를 띠며 이렇게만 말했다.

“자네가 이 일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나 보군.”

“맞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영광을 누리는 건 저지만 앞으로 영광을 누리게 될 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입니다.”

태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맞아. 지금 영광을 누리는 건 나고 황태자도 나야! 하지만 앞으로 누가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

그러나 태자는 겉으론 하하 웃더니 주운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리 위로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게. 그리고 자네도 반드시 정국백定國伯이라는 봉호를 이어받을 필요는 없네. 다른 활로를 찾으면 되지. 그자들보다 더 빛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면 되네. 나부터도 자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잖나!”

그러자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사의를 표했다.

“전하께 우스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소신을 중요하게 생각해 주셔서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전하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소신, 마음이 놓입니다.”

“부군, 부군…….”

이때, 멀리서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주운환과 태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 입구에 서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주운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태자에게 인사했다.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가 보게.”

태자가 고갯짓하며 허락하자 주운환은 그에게 읍한 뒤 그곳을 떠났다. 검붉은 옷을 입은 존귀한 모습의 주운환은 빠르게 엽연채 곁으로 걸어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그렇게 부부는 함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태자는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길흉화복은 점치기 어려운 법인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손에 쥔 것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황제가 서서히 권력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자신의 운명은 또 황제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주도권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그때 가서 황제가 후계자를 바꾸려 한다면, 이미 자신은 반항할 능력조차 없을 것이었다.

* * *

백로원을 나온 주운환과 엽연채는 함께 궁명헌으로 향했다. 걷는 내내 주변으론 경사스러운 분위기와 꽃이 핀 따뜻한 봄 풍경이 펼쳐졌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물었다.

“방금 전에 태자 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인생에 대해 논했습니다.”

주운환이 입술을 위로 당겨 호선弧線을 그려 보였다.

“이야기한 거예요?”

“네.”

주운환은 그리 대답하며 갑자기 그녀를 확 안아 들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쳤지만 금세 또 즐겁게 까르르 웃었다. 그녀는 즐거운 얼굴이었으나 그의 목을 끌어안고 주의를 주었다.

“여긴 보는 눈이 많아요!”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내 아내가 피곤하니 남편인 내가 안아 주겠다는데.”

“안 피곤한데요?”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 고부를 잔뜩 열 받게 만들어 속이 아주 후련해요.”

주운환은 작게 웃음을 짓더니 그녀의 코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내 부인은 어쩜 이리 귀여울까!”

“이제 알았어요?”

엽연채가 이리 되물으면서 또다시 까르르 웃으니 주운환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여 입맞춤을 하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가슴팍을 찌르며 핀잔했다.

“밖에선 입맞춤하지 마요.”

* * *

대청을 나온 손님들은 바로 반청에 가서 식사를 했다.

그 시각 신방 안.

신방으로 보내진 갈란군주는 침상 위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고, 그 곁의 희낭이 웃으며 주비양에게 말을 붙였다.

“신랑께서 붉은 수건을 걷어 주세요.”

주비양이 희간喜杆(신부가 쓴 붉은 수건을 걷어 올릴 때 사용하는 붉은 막대)을 집어 들어 붉은 수건을 걷어 올리자 갈란군주의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희낭은 덕담을 한가득 전했고 신랑 신부가 합환주를 마시자 여종들을 데리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

갈란군주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보니 저처럼 붉은색 혼례복을 입고 있는 주비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지만 낯빛이 칙칙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십 년 전 패기만만하던 그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두 사람은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고 금동옥녀金童玉女 같은 존재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지금의 주비양은 예전과 다름없이 준수했지만 암담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인지 풍채가 십 년 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주운환과 비교하면 그 반도 못 따라갈 지경이었다.

이런 생각을 들자 갈란군주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건 그저 일시적인 모습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빼앗아 오면 그는 더 없이 빛나는 경위영 대장이 되어 있을 테니까.

‘신분과 처지가 상승하면 분위기와 기개도 함께 상승하게 되는 법이지.’

생각을 마친 갈란군주는 눈물을 머금고 그를 쳐다보며 말을 붙였다.

“부군…….”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주비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때 당신은 내게 시집오고 싶지 않다고 했지요. 우리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다면, 이 혼사가 이미 정해져 더는 바꿀 수 없는 게 아니었다면 난 절대로 이 혼사에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갈란군주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부군이 아직까지도 날 원망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방금 전에 부군이 말했죠. 이 혼사가 정해진 게 아니었다면, 부군의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날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제 그 마음이 어떤 건지 당신도 안다면, 어째서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겁니까? 그때 저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때 저도 그런 입장이었다고요!”

주비양은 깜짝 놀랐다.

과거 주씨 가문이 전쟁에서 패하여 집안 숙부들이 전부 전사하자 할아버지는 그 일로 모든 재산을 들여 전사한 주씨 가문 병사들에게 보상했다. 그리고 집안의 방계 친척들은 연루될까 봐 두려워 잇달아 주씨 가문을 떠났다. 원적지로 돌아가거나 저마다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우두머리가 망하면 따르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사람이 곤경에 처하면 뭇사람들이 달려들어 공격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집안은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와 갈란은 어릴 때부터 정혼한 사이였고 죽마고우이자 서로 마음이 통하는 관계였다.

그가 검술을 연습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으면 그녀는 슬그머니 다가와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고,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라 항상 그에게 조언을 해 줬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지만 아무리 만나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식으로 만날 땐 규율과 예절을 지켰지만 남몰래 밀회를 가질 땐 손을 잡고 포옹하며 입맞춤을 했다.

처음으로 사랑에 눈뜬 소년과 소녀는 애틋한 마음과 열렬한 감정 때문에 헤어질 때마다 못내 아쉬워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집안 상황이 급변하며 그가 초라해지자 그녀는 그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당시 집안 가산은 거의 병사들에게 배상하는 데 쓰인 상태였고 방계 문객들은 전부 줄행랑을 쳤으며 진씨는 날마다 울부짖었다. 그리고 보슬비가 내리던 그날, 평왕부의 하인이 찾아와 파혼하겠다는 내용의 첩자를 전했다.

진씨는 소리를 지르며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지만, 당시 아직 살아 있던 조부는 화가 나 그 자리에서 평왕부 사람을 발로 걷어차 문밖으로 쫓아내며 이렇게 고함을 쳤다.

“군주께서 그런 인품을 가졌다고 하니 그럼 이 혼사는 없던 일로 하겠다!”

주비양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결정된 후였다. 그는 넋이 나갔고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서신을 보냈지만 그녀에게선 답장이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고, 가까스로 장신구를 파는 한 상점의 후문에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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