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6화
“이!”
진씨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으나 반박할 말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강심설은 이미 더는 견딜 수 없던 차였다. 그녀는 눈물을 왈칵 쏟더니 입술을 옥깨문 채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입술만 살짝 오므릴 뿐 그녀를 뒤쫓아가지는 않았다.
“새언니…….”
주묘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심히 걱정스러워했다.
주위에 있는 손님들마저 이 상황을 지켜보더니 정실부인이 가엾다고 생각했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씨를 쳐다봤다. 더욱이 진 부인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주 부인은 스스로는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며느리에게는 규율을 지키라고 강요하는군요. 하는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고요.”
이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진씨를 쳐다봤다.
강씨가 미천한 출신이기는 하나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있고, 무엇보다 그녀는 주씨 가문이 가장 힘들 때 시집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집안이 일어서니 당시 자신들을 차 버렸던 여인을 곧장 평처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이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갈란군주는 아직 상중인 과부였다. 그런데 혼례식도 정실부인보다 성대하게 치르려 하고 과부를 한껏 추켜세우지 못해 안달이니, 정말이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럿의 눈총을 받은 진씨는 표정이 말이 아니었고, 주 백야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말 좀 그만하시오.”
진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강심설은 업신여기고 갈란군주는 추켜세우는 게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갈란군주는 황제의 손녀인 고귀한 군주였고, 이 혼사는 황후가 직접 의지를 내린 혼사였다.
‘이 고귀한 혼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건 당연지사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도리어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신부를 맞이하는 행렬이 돌아왔습니다!”
밖에서 어떤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폭죽 소리에 이어 혼례식 음악이 울려 퍼졌고 이어 주비양이 냉담한 얼굴로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여종과 희낭의 부축을 받고 있는 신부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보니 신부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힘이 달리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한입으로 의문을 꺼내었다.
“그게… 신부께서 너무 지치셔서 그렇습니다.”
희낭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평왕부에서부터 쭉 따라온 손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더했다.
“군주께서는 꽃가마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씨 가문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시집을 가라고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가마에 오르려고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에휴!”
“군주께서 몹시 난처하셨겠군.”
주 백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렇게 탄식했고 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 오일의를 위해서예요. 또 내… 에휴, 저 아이는 언제나 착한 아이였죠.”
붉은 수건을 덮고 있는 갈란군주는 그 즉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음을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손님들은 절로 동정심이 들었다.
그때, 엽연채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군주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재가하시는 것이니 받아들이시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군주의 마음을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손님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씨는 저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왜 갈란을 위해 좋은 말을 해 주는 거지?’
바로 다음 순간, 진씨의 예상대로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군주는 끝까지 정조를 지키려고 하셨죠. 그래서 꽃가마에 오르실 때조차 오씨 가문 사람들이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이 집안에 들어와 주씨 가문 며느리가 되셨으니 죽은 남편의 소원은 이뤄 주신 셈이지요. 분명 오일의도 모진 고통 속에서 해방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희도 군주를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군주의 뜻에 따라 군주의 정조를 지켜 드리기 위해 우선 합방하지 말고 삼년상이 끝나면 다시 계획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대청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붉은 수건을 덮고 있는 갈란군주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녀는 수건 너머의 엽연채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합방을 하지 않는다니!’
그녀는 서둘러 합방을 해 주비양의 마음을 붙들어 놓으려고 했고 얼른 회임을 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다. 그런 방식으로 강심설의 아들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 이 빌어먹을 계집이 합방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갈란군주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재가를 원하지 않으며 부녀자의 정렬貞烈을 중히 여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 애쓴 것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지 않겠는가.
“보세요. 군주께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려고 하시네요. 아유, 저한테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엽연채의 미소 띤 얼굴을 본 갈란군주는 화가 나 몸을 비틀거렸다.
“이런 고얀 것!”
진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갈란은 네 형님인데 감히 네가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어머님, 제가 뭘 가르치려 했다는 겁니까? 전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군주께서 오씨 가문을 도우셨고 또 어머님도 도우셨으니, 저희도 응당 군주의 심중을 이해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엽연채가 물러서지 않자 진씨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지하에 있는 오일의가 갈란을 시집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시집을 왔으니 정식으로 절을 올리고 신방에 들어가야지. 갈란이 합방하지 않으면 이 혼사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그럼 오일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고 또 그 망령이 날 찾아와 괴롭힐 게다!”
“어머님.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혼례식 같은 건 그저 의식에 불과합니다. 신방에 들어가야 정식으로 혼인은 올린 거라면 어린 나이에 치르는 액막이 혼사는 뭐가 되는 거죠? 영혼 혼례식 같은 건 또 뭐가 되는 겁니까?”
“맞네, 맞아.”
손님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에 진씨가 급히 흐름을 틀려고 하는데 엽연채가 선수를 쳤다.
“어찌 됐든 간에 군주는 이미 오일의를 위해 많은 것을 하셨어요! 어머님을 위해서도 많은 것을 했고요! 그러니 이제 죽은 남편도 군주를 이해해 줘야 마땅하겠지요! 어머님도 은혜를 알고 보답하시고요!”
그랬다. 애당초 이 혼사는 진씨가 귀신이 된 오일의에게 시달려 죽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니 갈란군주가 진씨와 남편을 위해 희생하고 은덕을 베푼 게 아니면 또 뭐겠는가.
“됐으니 그만하시오. 의식을 치렀으면 됐소. 액막이하려고 시집을 오는 경우나 민며느리(장래에 며느리로 삼기 위해, 성인식을 치르기 전부터 데려다 기르는 어린 여자아이)를 들일 때도 이렇게 하오.”
보다 못한 주 백야가 나섰다.
“갈란이 괴로워하니 일단 합방은 하지 않는 걸로 합시다. 삼년상을 치르고 해도 늦지 않소. 부군에 대한 갈란의 마지막 의리를 지켜 주기 위해, 또 갈란이 적응할 수 있도록 그리합시다.”
“군주, 어떻습니까?”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했지만, 정렬을 중히 여긴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으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의 말이 일리가 있네.”
엽연채는 하하 웃었다.
‘동서라는 말이 아주 술술 나오는구나!’
상황이 이렇게 정리됐으니 진씨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이리 말했다.
“절을 하거라.”
그러자 희낭이 신부를 부축했고, 신부는 세 번 절을 올린 후 신방으로 보내졌다.
“다들 반청으로 가서 식사하시지요.”
진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편, 구석에 서 있던 태자는 혼례식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으로 나갔다. 태자는 이 혼사가 너무도 역겨워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도 정선제의 뜻을 알고 있었다. 정선제는 사실 갈란군주를 주씨 가문으로 시집보내 분란을 일으켜 그와 주운환 사이에 갈등을 만들려는 것뿐이었다.
‘방금 전 진씨의 그 꼴을 보면 분명하지 않은가? 그 여인이 엽연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던가!’
태자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지금 당장 정선제가 죽고 자신이 바로 황위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듯 그는 정선제에게 이미 살의를 품었지만, 수년간 이어진 정 황후의 교육과 원체 조심스러운 성격 탓에 여전히 속으로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대청을 나온 태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진서후부의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그는 머릿속이 너무도 혼란스러워 본능적으로 이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겨우 얼마간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는 이미 백로 정자 쪽으로 걸어온 후였다. 눈앞엔 맑고 시원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 위로는 팔각지붕이 달린 정자들이 일렬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검붉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중간에 있는 정자에 놓인, 팔걸이가 달린 주황색 나무 걸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드는 도포가 몸 위로 펼쳐져 있고 검은 머리칼은 아래로 풀어 놓고 있었다.
빛이 나는 듯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용모, 부드럽고 맵시 있는 풍채, 그리고 자유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뽐내고 있는 이 사내는 바로 주운환이었다.
태자는 걸음을 돌려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니 주운환은 눈을 감은 채 쉬는 중이었다. 그의 옆으로 쓰러진 검은색 도자기 술병이 놓여 있었는데, 병 입구에서 술이 똑똑 떨어지고 있어 조그만 웅덩이가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 때문인지 술 냄새가 주위를 맴돌고 있어 태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운환은 기척을 듣더니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태자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 보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군.”
“소신은 전하의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하하.”
태자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는 주운환 옆에 앉았다.
“방금 전 자네 큰형이 절을 올리는 의식을 치렀는데, 왜 자넨 그곳에 있지 않았는가?”
“가고 싶지 않아 그리한 것뿐인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주운환은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