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4화
“어머니, 뭐 하고 계셨습니까?”
“뭘 하고 있었겠니.”
진씨는 호호 웃더니 주비양에게 희소식을 전해 주려 했다.
“맞다, 도성에서 일어난 일을 넌 아직 모르고 있겠구나. 갈란이…….”
“알고 있습니다.”
주비양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진씨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됐다.”
그녀는 전엔 변변치 않은 주비양을 아주 원망했었다. 하지만 이젠 갈란군주가 주운환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주비양에게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웃음꽃이 만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린 너희 두 사람을 위해 성대한 혼례식을 열어 주려고 한다. 아무래도… 그 애가 아직 상중이니 이 혼례는 반드시 시끌벅적하게 치러야 한다. 그래야만 불운한 기운을 누를 수 있을 게야.”
싱글싱글하던 진씨는 이 생각을 하자 아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갈란군주는 상중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평왕비가 이미 고승에게 오일의를 위해 제도를 해 달라고 부탁한 상황이었고, 그 제도는 무려 49일 동안 진행될 것이었다. 재齋를 마친 뒤 오일의를 위해 금불상을 만들고 치성을 드리면 그는 다음 생에 훌륭하고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갈란군주는 아직 상중인 사람. 불운한 기운을 지니고 있으니 혼례식을 떠들썩하게 치러서 그 나쁜 운을 전부 깨끗이 씻어 버려야 했다.
그렇게 주씨 가문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녀는 주씨 가문 사람이 되는 것이니, 오씨 가문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된다.
“아들아. 그 앤 결국 네 인연이었던 게다!”
그러나 주비양은 희색이 만면한 진씨의 모습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네.”
진씨는 그의 냉담한 태도에 진작 익숙해진 터라 동의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제멋대로 해석했다.
“역시 저 애 마음엔 갈란뿐이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비 이낭이 혀를 차더니 이렇게 비위를 맞추었다.
“전에 갈란군주에게… 크흠. 전에 갈란군주와 인연이 있었으나 일이 틀어진 후로 큰도련님은 기가 확 꺾이셨죠. 아내를 맞이하고도 시큰둥하셨어요. 게다가 강심설 같은… 아유, 큰도련님에게는 정말 모욕적인 일이었죠.
그런데 지금 갈란군주는 시집을 한 번 가긴 했지만 어쨌든 군주라는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큰도련님의 평처로는 딱이죠.”
진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강심설보다야 갈란군주가 천 배는 더 좋았다. 또 가장 중요한 건 갈란군주가 주비양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이 엄청나단 사실이었다.
“이제 두 분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런 걸 바로 호사다마라고 하죠! 세자께서는 바라시던 바를 이루셨으니 앞으로 갈란군주의 격려 속에서 분명 분발하실 거예요! 세자께서는 적장자이니 아무래도 집안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분발하기만 한다면 집안을 빛내는 일이 어디 남의 일이겠어요? 하하하.”
비 이낭은 온 힘을 다해 주비양을 추켜세웠다. 진씨는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바라 온 게 바로 이런 날인데, 비 이낭이 제 마음을 아주 기똥차게 읽었다. 전에는 백 이낭과 사이가 좋았지만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을 간 후로 오히려 비 이낭과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이낭은 조용히 한쪽에 앉아서 나지막이 웃을 뿐이었다. 그녀도 전엔 매일같이 진씨를 추켜세웠지만 많은 일을 겪고 나니 알게 되었다. 아무리 진씨에게 아첨을 하고 그녀를 위해 갖은 수고를 해도 무의미하단 사실을 말이다.
주묘서는 고기를 먹게 되었지만 주묘화는 남아 있는 국조차 마실 수 없었다. 그러니 감정을 소모하고 침을 튀겨 가며 아양을 떨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 * *
갈란군주의 혼사가 정해지자 정선제는 그녀가 앞으로 주씨 가문에서 발붙이려면 당연히 뒷배경이 든든할수록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재가를 했다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그가 중요시한다는 걸 보여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황제의 뜻으로 혼사를 정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일의가 죽은 지 얼마 안 됐고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재가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도리에 어긋나며 그가 생각하기에도 면목이 없었다.
하여 생각을 하던 정선제는 채결을 황후 쪽으로 보내 말을 꺼내게 했다.
봉의궁의 정 황후가 태자와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채결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마, 군주께서 며칠 후에 출가하십니다.”
태자는 속에서 구역질이 났다.
‘염치도 모르는구나! 남편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황급히 다른 사내를 찾다니.’
“아, 그래.”
정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출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실의 군주이신데 마마께서 군주의 혼수를 채워 주실는지요?”
채결이 이리 말을 잇자 정 황후는 표정이 확 굳어졌다. 밖에서 죽은 남편을 위해서라는 둥 좋은 소리를 해 대지만, 갈란군주를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판국에 정 황후와 태자는 가급적 끼어들지 않는 편이 좋다고 판단해 모르는 척, 갈란군주가 알아서 시집가게 내버려 뒀다.
그런데 채결이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 황후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정선제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황실에서 움직임을 보여 갈란군주를 지지해 주려는 것이었다.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공의 말이 일리가 있군. 사실 나도 이미 혼수를 준비해 놨네. 혼사를 맺어 준다는 의지는 어찌하면 되는가?”
“마마께서 아끼는 손녀이시니 마마께서 의지를 내리시면 되옵니다. 이와 관련된 모든 일은 전적으로 마마께서 결정하시면 되옵니다. 그럼 소인은 마마와 전하의 식사를 방해하면 안 되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이 일에 황후가 나서게 되면 사람들이 정말로 안 좋은 소리를 한다고 해도 황후가 앞에서 떡하니 버티고 서 있게 되는 셈이었다. 채결은 아주 흡족해하며 돌아서서 떠났다.
태자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
“어마마마, 갈란의 일 말입니다. 너무 경솔하고 염치를 모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는 하필 이런 때에 갈란을 재가시키려고 하시네요!
하지만 다른 가문도 아니고 왜 하필 주씨 가문이란 말입니까? 이건 주씨 가문이 너무 평안하고 주묘서와 진서후의 관계가 너무 좋은 걸 못마땅해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갈란을 집어넣어 대립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바마마는 저와 진서후의 관계가 좋은 걸 그리 두고 보지 못하시는 겁니까? 전에는 저희보고 서로 도우라고 하셨으면서 이제는…….”
“건아!”
정 황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네 아바마마의 마음속에 후계자는 너 하나뿐이었다는 걸 생각하거라. 지금 네 아버지가 심리적으로 불안하실지언정 아버지의 마음속 황태자는 늘 너였다! 영원히 너일 것이다!
천천히 기다려야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다. 안 그러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네 것이다. 반드시 네 것이 될 게다.”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네 아버지께선 어릴 때부터 널 그리 아끼셨다. 기억하느냐…….”
그러고는 태자의 어릴 적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다 정선제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부각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예전처럼 그녀의 말에 감동받지 않았다. 이미 주묘서의 말에 각성한 후였으니 당연했다.
그때 주묘서는 황후가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셨냐고 물었다. 왜 전에는 말씀하지 않다가 하필 이제서야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도 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모후는 자신이 부자간의 정을 기억해 본분을 잊지 않고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왜냐면 황후도 정선제가 장수할 거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정선제는 앞으로 이삼십 년을 더 살 거고 자신은 오십 대가 될 것이다. 그리되면 자신의 아들마저 스무 살을 넘긴 성년일 것이었다.
가까스로 양왕과 노왕 등의 형제들을 물리쳤는데, 그때는 또 자신의 자식과 조카들과 적이 되어 맞붙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자 태자의 눈동자에 순간 음험하고 악랄한 빛이 스쳤다.
‘그 죽지도 않는 늙은이. 왜 그때 죽지 않은 거야! 멀쩡히 살아나서 뭘 하려고? 그때 분명 병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게 다 나 의정 그 빌어먹을 놈 때문이야!
하지만 얼마 전만 해도 아주 허약한 상태라 다들 아바마마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갑자기 급사한다고 해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겠지? 다들 그저 임종 전에 잠깐 정신이 맑아진 것뿐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 급하다고 꼭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다. 돌아가다가 아예 늦어 버리면 그걸로 끝이니.’
태자가 궁을 떠나자 정 황후는 사 마마를 시켜 주씨 가문에 의지를 전달하게 했다. 정 황후는 의지에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아 다시 부부의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같은 덕담을 한가득 쏟아 냈고, 그렇게 갈란군주를 주비양의 평처로 짝지어 줬다.
의지를 받은 진씨는 정선제와 정 황후 역시 갈란군주를 중요시한다고 여기게 됐다. 그래서 갈란군주가 상중에 재가를 했지만 더는 이를 조금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혼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갈란을 끔찍이 아꼈다.
진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설령 갈란군주가 당장 주운환이 가진 것들을 빼앗아 올 수 없다고 해도 이득을 볼 일이 한가득했다.
그녀는 황제의 손녀라는 신분을 갖고 있고 이렇게 정선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주비양에게 적잖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장밋빛 앞날을 그리며 진씨는 혼사를 더욱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이제는 집안엔 돈도 있고, 또 태자의 처남 집안이며 갈란군주도 며느리로 들이게 됐으니 혼사를 성대하게 준비했다. 전에 정실부인을 들일 때보다 더욱 격식을 따질 정도였으니 그 수준은 말하면 입만 아팠다.
진씨는 원래 강심설이 혼사 준비를 주관하게 하려 했는데 그녀가 암암리에 훼방을 놓을까 봐 걱정이 되어 다시 자신이 도맡았다.
* * *
이월 초열흘날, 갈란군주는 출가했다.
도성은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혼사를 보러 달려갔고 무슨 공주의 혼례식보다도 더욱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이런 기이한 혼사는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가서 봐야만 했다.
주씨 가문은 길시吉時에 신부를 맞이하기로 했고 구경하러 온 백성들이 평왕부의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