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52화 (652/858)

제652화

진서후부 운연거.

탑상에 앉아 있는 엽연채는 자수틀을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 곁에 서 있던 청유가 주인의 심중을 읽고 먼저 입을 뗐다.

“결국… 그 혼사가 정말 이뤄지려나 봅니다.”

그러자 소월이 얼른 이렇게 말을 받았다.

“갈란군주께서 집안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마님은 그분과 동서지간이 되시는 것 아닙니까? 한데 만만한 분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 만만하지 않다 뿐이겠어? 진짜 남의 속을 뒤집어 놓는 분이시지.”

혜연은 이리 대꾸하며 차갑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맞아. 역겹기 이를 데 없지!”

청유가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어느 집 여인이 이렇게 행동하겠어!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겨우 며칠 전에 발인해 아직 봉분에 풀도 안 돋았는데 재가를 해 버리네. 세상에, 아직 시신이 채 식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정말 야박한 사람이야.”

여종들의 이야기를 듣던 엽연채가 냉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제일 역겨운 건 그런 게 아니다. 갈란군주는 분명 야박한 사람인데 죽은 남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하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아주 위대한 사람처럼 되어 버리다니, 참 우스우리만큼 역겹구나.”

“그나마 나리와 마님께서 정국백부에서 나와 따로 사시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셨을 겁니다.”

청유가 이렇게 대꾸하는데 밖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혜연과 청유 등의 여종들은 얼른 몸을 돌려 예를 올렸다.

“나리.”

인사한 후에는 알아서들 바로 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은 파리를 삼키기라도 한 양 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갈란군주를 재가시키고자 하시니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말리기도 곤란하고 말이지요.”

그는 지금 충신의 역할을 잘 소화해야만 했다.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갈란군주가 이 일을 오랫동안 계획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 * *

어찌 됐든 갈란군주와 주비양의 혼사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오씨 가문은 슬픔과 근심에 잠겨 있었으나 주씨 가문은 법석을 떨며 혼사를 준비했다.

이 와중에 이리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 수 있는 집안은 온 나라를 통틀어 주씨 가문밖에 없을 것이었다.

주씨 가문 식솔들은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였지만, 강심설만은 어두운 얼굴로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 주학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주판 등의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강심설은 전부터 자신의 인생이 잿빛으로 물들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미천한 출신이어서 늘 시어머니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편은 오로지 전 정혼자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혼자 때문에 온종일 우울해했다. 부부는 같은 자리에 누워 있다 뿐, 속으로는 각자 딴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자신에게는 아이가 들어섰고, 아들을 낳으면서 적어도 시어머니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 있었다. 비록 시어머니가 사람을 우습게 여기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 당시만 해도 주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오십보백보였다.

그런데 주씨 가문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운환이 진서후가 된 건 그렇다 칠 수 있었다. 어쨌든 그건 셋째 부부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구역질이 나는 건 주묘서가 고귀한 곳에 시집을 가서 태자 측비가 된 것이었다. 향후 그녀는 황후도 될 것이었다.

주비양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지만 주묘서의 친오라비였다. 즉, 향후 황후의 오라비가 되므로 당연히 몸값도 좀 올라가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요즘 들어 시어머니는 더욱더 자신을 업신여겼다. 지금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건 주비양에게 평처를 들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그녀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갈란군주냐는 말이다.

강심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큰마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녀의 여종 만월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알을 굴렸다.

“세자께서도 곧 돌아오시겠군요.”

그러자 강심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곧 있으면 또 신랑이 되는데 당연히 돌아오겠지.”

주비양은 요 며칠 친구들과 외출을 한 상태였다.

“큰마님.”

이때, 분홍색 옷을 입은 어린 여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마님께서 일상원으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강심설은 난색을 보였다. 주비양과 갈란군주의 혼사가 정해진 후로 그녀가 집안의 웃음거리가 됐다는 건 하늘이나 알 것이다.

그러나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강심설은 문을 나섰고 잠시 후 일상원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진씨는 탑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고 주묘화는 하좌에 앉아 있었다.

“어머님, 부르셨습니까?”

강심설이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리자 진씨는 탁 하고 낭랑한 소리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추켜올리며 대뜸 이리 물었다.

“방에서 뭐 하고 있었느냐?”

강심설은 입을 살짝 오므리며 말했다.

“학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유모가 있지 않느냐?”

진씨는 코웃음을 치며 강심설을 쳐다봤다.

“넌 도리도 모르는구나. 요즘 집안이 무슨 일로 정신이 없는지 모르는 것이냐?”

그러자 강심설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고,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하루 종일 방 안에 숨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진씨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리 가문에 시집온 지 오래됐고 집안을 관리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는데 넌 내내 방 안에 숨어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구나. 설마 시어머니인 나보고 직접 챙기라는 말이냐?”

강심설은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진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심설을 훑어봤다. 이 며느리는 용모는 평균보다 조금 나았지만, 낯빛이 누르스름한데 또 전지 문양이 들어간 옅은 노란 빛깔의 두꺼운 긴 상의를 입고 있었다. 진씨는 그녀의 출신을 떠올리고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쯧쯧.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다 알고 있다. 그 옹졸한 모습을 보니 과연 보잘것없는 가난한 가문 출신답구나.”

강심설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진씨는 감히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그녀를 보자 더욱 화가 났다.

“갈란군주는 평처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실부인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 순서를 따지자면 갈란군주가 먼저고 네가 다음이다.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 그런 인품으로 십 년 가까이 세자의 부인으로 살았으면 더없이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내가 너였다면 진작에 스스로 나서서 내쳐 달라고 청하며 정실부인의 자리를 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가만히 있는 게냐?”

“맞습니다. 형님은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죠.”

누군가의 비웃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씨와 강심설은 멍한 표정을 지었고 이어 발이 걷히더니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마저 저를 모욕하자 강심설은 화가 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형님은 큰아주버님께 어울리는 짝이 아닌데 어머님은 그때 왜 형님을 며느리로 들이셨습니까?”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가까이 다가섰다. 진씨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녀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너 이게 무슨 태도인 게냐?”

“제 태도가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전 그저 질문을 드리는 것뿐인데요? 제 질문의 어느 부분이 어머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겁니까? 전 도통 이해가 가지를 않네요. 원래부터 어머님이 마음에 들어 한 사람은 갈란군주였고 군주는 원래부터 큰아주버님과 정혼한 사람이었는데, 당시 어째서 군주를 며느리로 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진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누가 혼사를 물리고 싶어서 물렸겠는가. 하지만 평왕비가 권세를 이용해 자신들을 압박했다. 당시 너무도 두려웠기에 파혼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씨는 원망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지만, 갈란군주를 향한 집념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체면이 있잖는가. 갈란군주에게 한 번 거절당했는데 자기 입으로 다시 자존심도 없이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진씨는 새파란 얼굴로 이렇게 변명했다.

“그때… 우린 가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갈란 같은 좋은 소저를 우리 가문에서 썩히고 싶지 않아 며느리로 들이지 않은 것이다.”

“아.”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도 알고 계셨네요. 주씨 가문도 전에는 몰락한 가문이었다는 걸 말이죠! 그럼 당시에 형님 가문과 엇비슷한 셈이었네요! 안 그러면 어머님께서 뭐 하러 형님을 며느리로 들였겠어요?”

진씨가 이를 악물고 부정하려 하는데 엽연채가 이어서 말했다.

“가난했을 때는 형님을 며느리로 들이셨으면서 이제 집안 형편이 피니까 온갖 구박을 하시네요. 어머님, 설마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신 거예요?”

정곡을 찔린 진씨가 화를 벌컥 냈다.

“우리가 지금 저 애를 내쳤느냐? 지금 쟤가 주씨 가문 큰며느리 노릇과 세자 부인의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으니 따끔하게 가르쳤을 뿐이지! 그리고 넌 배가 불러오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거라.”

“3개월을 넘겼으니 의원이 많이 돌아다니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서 이렇게 절 싫어하시니 앞으로 이유 없이 찾아뵙지 않겠습니다.”

엽연채의 이 말에 진씨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묘서가 황후가 되려면 그 빌어먹을 종자에게 기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그녀는 화를 꾹꾹 참고 거짓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그저 푹 쉬라는 뜻이지. 그건 그렇고 셋째는?”

“경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주운환은 이미 정식으로 경위영을 맡게 되었고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이번에 특별히 도성에서 오래 머무르게 된 건 정선제의 병이 회복되어 궁중 연회에 참석하라고 그를 불렀기 때문이고, 또 그가 영전하며 오일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정선제가 아예 그에게 열흘의 휴가를 줬기 때문이었다.

이제 충분히 쉬었으니 그는 경위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방금 전 그는 엽연채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바로 도성을 떠났다.

“집안이 혼사 준비로 바쁘니 저도 이곳에서 며칠 지내면서 잘 배워 놓겠습니다.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앞으로 나가 강심설을 끌어당겼다.

“형님, 같이 가시죠.”

그렇게 형님과 동서는 함께 문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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