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650화 (650/858)

제650화

그 시각 봉의궁.

궁으로 불려온 진씨가 문안으로 들어서 보니 상석에 앉아 있는 정 황후의 음랭한 얼굴이 보였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를 가졌군.”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의 구슬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쪽을 바라보니 오씨 가문 사람들이 별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특히나 선두에 선 오 부인은 진씨를 매섭게 노려봤다.

정 황후의 살짝 동그스름한 얼굴에도 분노의 기색이 비쳤다. 모란 문양이 들어간 백자 찻잔을 들고 있던 그녀가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채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마.”

“아, 채 공공. 어쩐 일로 왔는가?”

정 황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 마마. 갈란군주의 일을 황제 폐하께서 들으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군주의 일을 반드시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군주의 좋은 평판이 공연히 더럽혀지면 절대로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오 부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감격에 겨워했다.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녀는 진정 감동을 금치 못했다. 예상대로 모두들 자신들 편에 서 주었다.

그러나 채결은 표정이 경직되더니 오 부인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귀신이 한 말이기는 하나 완전히 무시하기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전에 선황께서 용이 구중천九重天을 노니는 꿈을 꾸셨는데 그날 밤에 황제 폐하께서 태어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누군가 조상이 물에 잠기는 꿈을 꿔서 결국 그 조상의 무덤을 파 봤더니 정말로 물이 고여 있었다고 하죠. 이게 다 혼백들이 알려 주는 것입니다.”

진씨가 이때다 하고 나서더니 이내 화살을 오씨 가문에 돌렸다.

“상중인 과부를 저희라고 정말로 며느리로 들이고 싶겠습니까? 그 댁 아들이 날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오히려 날 비난했죠.”

“예, 지금 주 부인은 온 세상의 비난도 꺼리지 않고 그런 일을 하셨고, 오 대인이 꿈에 나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세히 따져 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 대인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시고 지하에서 수난을 겪으실 것입니다!”

채결이 진씨를 두둔하듯 말하자 오 부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무슨 뜻이지? 설마, 황제가 진씨 편을 들고 있는 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당신이 허튼소리를 하는 거잖아! 내 아들이 어째서 내 꿈에 나타나지 않고 당신 꿈에 나타나?”

“그 이유를 누가 알겠어요!”

진씨는 오 부인을 흘겨보더니 이렇게 톡 쏘았다.

“묻고 싶으면 그쪽 아들에게 물어보든가요.”

“이!”

“그만들 하시오!”

정 황후가 서늘하게 호통을 치더니 냉담한 눈빛으로 채결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공공, 자네가 고승을 찾아가 오일의가 뭐라고 말했는지 물어보게. 그럼 되겠지?”

오 부인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갈란군주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요, 물어보죠! 그 사람에게 물어봐요! 흑흑흑… 부군은 그렇게 모질게 날 떠나시더니 이런 소란까지 피우시네요. 할바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죠.”

오 부인은 눈앞이 까매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하는 것으로 결정됐구나.”

정 황후는 마른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다들 돌아가게. 폐하께서 곧 화법사華法寺의 주지승을 오씨 가문으로 불러 의식을 행하게 하실 거네. 그럼 정말로 오일의가 주 부인의 꿈에 나타난 게 맞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분명해지겠지.”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진 오씨 가문 며느리들은 별수 없이 오 부인을 부축하며 황궁을 떠났다.

* * *

오씨 가문으로 돌아온 갈란군주는 곧장 평왕부로 갔다.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평왕비가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평왕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일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으니 란이 너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집가면 된다.”

갈란군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염려하는 기색을 다 지우진 못했다.

“하지만… 요양성 쪽이…….”

“걱정 말거라. 소식이 그렇게 빨리 감옥으로 전해지지는 않을 게다. 그리고 이 어미라고 가만있겠느냐? 그동안 방법을 강구해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 거다.”

평왕비가 이리 안심시켜 주자 갈란군주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 요양성의 제안에 응해 그와 협력하기로 했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랐다.

당시 요양성은 그녀에게 정선제를 부추겨 계속해서 주운환의 출생을 조사하게 하라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 일만 해 주면 요씨 가문은 재기할 수 있고, 그러면 그녀의 아들도 계속해서 요 노부인이 제작한 향을 얻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다.

이후에 갈란군주는 요양성과의 일을 평왕비에게 알렸고, 곰곰이 생각해 보던 평왕비는 이렇게 말했다.

“주운환은 운하 공주의 혈육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갈란군주는 아마 믿지 않았을 테지만, 이건 모비 평왕비의 말이었다. 그녀는 평왕비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왜냐하면 평왕비는 전에 소 황후를 곁에서 모시던 이등二等 궁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늘 소 황후를 가까이에서 모셨으니 자연히 운하 공주도 자주 봤었다. 그 말인즉, 운하 공주의 생김새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소 황후가 유배되자 정 황후는 소 황후를 모셨던 위 마마를 막일하는 곳으로 쫓아냈고 일등 궁녀들에겐 참혹한 죽음을 내렸다. 이등, 삼등 궁녀들만이, 그중에서도 일부만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운 좋은 일부에 속했던 평왕비는 평왕 곁으로 보내져 궁녀로 지냈는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평왕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뜻밖에 그의 씨를 회임하게 된 것이다.

물론 평왕비의 당시 신분으로는 복중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평왕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면서 그녀의 배 속에 든 아이는 평왕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이 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평왕의 혈육을 낳은 공을 인정받아 평왕비로 책봉되었다.

평왕비는 또 소 황후 곁에 있을 때 찰랑거리는 구슬 장식이 달린 순금 팔찌를 본 적이 있었다. 소 황후가 그 팔찌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 팔찌가 붉은 비단을 깐 박달나무 상자에 놓여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있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라 평왕비는 운하 공주의 생김새가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진서후가 운하 공주와 정말 많이 닮았다고도 생각했지만 당시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요양성이 주운환의 출생에 대해 집착하고, 엽연채가 찬 그 팔찌를 보게 되자 평왕비는 모든 게 우연치고는 너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때 운하 공주가 죽지 않았다면 주운환은 그녀의 혈육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평왕비와 갈란군주는 요양성이 왜 이 일을 밝히려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금린위金鱗衛들이 이미 조사를 하러 갔다. 곧 그자가 운하 공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것이다. 설령 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요양성은 분명 대비를 해 놓았을 거다.”

평왕비는 홀로 말을 이어 갔다.

“아바마마께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양왕 아니더냐. 만약 주운환이 운하 공주의 혈육이자 양왕의 친누이가 남긴 혈육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아바마마는 분명 크게 상심하실 거다. 하지만 동시에 주운환이 양왕과 한패라는 의심을 하시겠지. 그럼 주운환은 처형을 면치 못할 거다.

하지만 어찌 백성들에게 주운환을 처형한 이유가 그자가 황제의 외손자이기 때문이라고 알릴 수 있겠느냐? 그러니 반드시 적절한 죄명이 필요할 게다. 그자와 가장 관련이 깊은 일이 바로 비적 떼와 요양성 사건이니, 아바마마께서는 요씨 가문에 내린 판결을 뒤집고 주운환이 정말로 비적의 외손자이며 요씨 가문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하실 게다! 그럼 요씨 가문은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거지.”

“쯧쯧. 안됐지만 저도 이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은걸요!”

혀를 차는 갈란군주의 눈빛에 조롱기가 스쳤다.

“요양성이 이미 나무를 심어 놓았으니…….”

평왕비 또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그러니 란이 넌 그 과실을 따거라!”

주운환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된 정선제가 진노할 때, 그때가 바로 자신들이 나설 때였다. 정선제에게 비적 떼 일을 이용하는 것보다 뜻밖의 사고로 위장하는 것이 효과도 더 좋고 더욱 안전할 거라고 넌지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 주운환이 ‘뜻밖의 사고’로 죽게 되어도 병권은 여전히 주씨 가문이 쥐고 있게 된다.

태자는 주묘서를 측비로 들인 지 얼마 안 됐고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계획을 드러냈으니, 온 도성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새로운 태자비를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함부로 행동했다간 무정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할 테니.

그리고 태자는 병권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걸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정에 쓸 만한 사람이 없기에 반드시 주씨 가문을 지키려 할 것이었다.

결국 병권은 주묘서의 친오라비이자 적장자인 주비양 손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쯤 갈란군주는 이미 주비양에게 시집을 간 후일 것이다. 비록 평처 신분이기는 하겠으나 몰락한 가문의 여식에 불과한 강심설이야 거들떠볼 필요도 없었다. 강심설과 주비양은 여전히 동상이몽을 하는 반면, 갈란군주는 과거 정혼자였던 사람이며 무엇보다도 어엿한 황실의 군주였다.

‘더욱이 소싯적의 정을 생각하면, 끝이지.’

갈란군주는 자신이 주비양의 마음을 붙잡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서히 강심설 모자를 피 말릴 거고, 결국 이기는 건 나일 테지!’

이런 생각을 하며 갈란군주는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과거 주비양을 버리고 오일의에게 떵떵거리며 시집을 갔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이 지경에 처한 것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전 정혼자였던 사람의 아내가 자신을 비웃는 걸 가만히 지켜보려고 하겠는가?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먼저 밀고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다.

또 설령 군주라고 해도 과부는 과부였다. 앞으로 재가할 때 주씨 가문보다 더 좋은 곳에 시집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건 금린위가 곧 돌아온다는 점이었다. 주운환의 출생이 공표되기 전에 서둘러 시집을 가야만 했다.

‘다만…….’

갈란군주는 감옥에 있는 요양성을 떠올렸다. 요양성은 그녀가 협조하지 않을까 봐 미리 선수를 쳤다. 그녀 아들의 목숨을 갖고 협박을 하며 더 이상 향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요양성이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갈란군주에게 본인의 아들이 금지옥엽이었던 건 그때까진 오일의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그녀가 오씨 가문에서 발붙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오일의가 죽었고 오씨 가문은 몰락했으니 이 아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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