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9화
정 황후가 보니 그들은 그저 점잖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을 뿐 상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 황후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으나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운을 뗐다.
“란아, 너희 가문은 어제 막 발인을 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궁에 찾아온 것이냐?”
“할마마마…….”
갈란군주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더니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아 냈다.
정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마마께서 저희를 위해 나서 주셔야 하옵니다.”
오 부인은 그리 말하며 오늘 진씨가 했던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아뢰었다.
정 황후는 원래 오씨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편이었지만 오일의가 불구가 된 후로는 오씨 가문을 딱히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씨 가문이 이런 수모까지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녀도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고얀! 그런 일이 있었다니. 란이의 부군을 발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튿날 그 집에 찾아가 과부가 된 며느리를 데려가겠다고 한단 말이냐! 아주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구나. 도리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는 행태 아니더냐!”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정말이지 후안무치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 일을 벌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진씨라니, 태자비나 다름없는 주묘서의 친어머니 말이다.
태자비와 요씨 가문이 무너진 상황에서 태자는 주운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주묘서를 황후의 자리에 올릴 것이었다. 그래서 정 황후는 주씨 가문을 정식으로 사돈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사돈인 진씨가 미쳐 날뛰며 이런 우스운 짓거리를 벌인 것이다.
정 황후는 언짢고도 부끄러운 나머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 황후는 낯빛이 극도로 어두워진 채로 항탁에 팔을 괴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마마, 부디 저희를 위해 나서 주십시오…….”
오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거듭 그녀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들이 모욕한 사람은 갈란입니다. 갈란은 어찌 됐든 군주라는 귀한 몸입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감히…….”
오 부인은 정 황후가 나서서 진씨와 주씨 가문을 따끔하게 처벌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제일 좋은 건 황후가 진씨의 외출을 금한다는 의지懿旨를 내려 진씨와 주씨 가문의 체면을 확 깎는 것이었다.
“명옥아, 진씨를 불러오거라!”
과연 오 부인의 기대대로 정 황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밖에 서 있던 궁녀는 대답하자마자 사람을 데리고 오러 출발했다.
한편, 사 마마는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약간 노란빛을 띤 하얀색 소복 차림이었는데, 아까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비스듬히 앉아서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 마마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 부인, 다들 수척해 보이십니다. 마마께서 이 일을 아셨으니 부인과 며느리분들은 우선 별전別殿으로 가셔서 기다리시지요.”
오 부인 등은 그제야 흡족해하며 서로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들이 별전으로 안내를 받아 떠나자 정 황후는 손으로 항탁을 세게 두드리며 태자를 찾았다.
“사 마마, 이 시간이면 이미 퇴청했을 텐데 태자는 어디에 있는가?”
요즘 정 황후는 태자가 퇴청하면 그를 이곳으로 불러와 식사를 같이 했다.
“어서방으로 가신 듯하옵니다. 소인이 가서 보고 오겠사옵니다.”
“그러게.”
정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 마마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어서방.
어서방의 태자와 정선제는 조정 일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어린 환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평왕비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정선제와 태자는 어리둥절해했고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거절했다.
“평왕비가?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왔다는 말이냐? 짐은 지금 태자와 정사에 대해 의논하고 있으니 평왕비를 만나기 어렵다.”
그러자 어린 환관은 난처한 얼굴로 다시 고했다.
“평왕비 마마께서 지금 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갈란군주의 운명과 관계된 일이라고 하시니 폐하께서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옵소서. 마마를 가엽게 여겨 주시옵소서.”
정선제는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사실 별다른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중도 아니었던지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안으로 들이거라.”
어린 환관은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사십 대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소복 차림의 그녀는 예를 갖추며 바로 무릎을 꿇더니 태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전하.”
“일어나거라.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
정선제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실은 그녀가 무릎을 꿇든 말든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의 차남인 평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말고도 아들이 많았기에 정선제는 잠시 슬퍼한 게 전부였다.
그래도 유복자인 갈란군주는 끔찍이 아꼈으나 핏줄이 아닌 평왕비에겐 그러한 감정이 없었다. 또 평왕비 역시 줄곧 평왕부平王府에서 재계齋戒하며 염불을 하느라 평소 궁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폐하… 부디 란이를 위해 나서 주시옵소서. 어제 오일의의 발인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지.”
평왕비의 이 말을 듣고서야 정선제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 냈다. 그건 바로 전 경위영 대장이었던 오일의가 자신의 손녀사위라는 것이었다.
당시 정선제는 전투에서 패배한 오일의의 무능력함에 화가 나 있었고 그 부분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불구가 되어 돌아온 오일의에게 동정심보다는 노여움을 더 느꼈고, 그게 좀 해소되자 이후엔 별반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오일의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당연히 하사품을 내려 가족들을 위로해야만 했다. 어쨌든 오일의는 그의 손녀사위이니 말이다.
“짐도 알고 있다. 잠시 후에 짐이 갈란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아닙니다, 폐하. 그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평왕비는 그리 말하며 진씨가 오씨 가문에서 소란을 피웠던 일을 이야기했다.
정선제와 태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태자는 얼굴이 돼지 간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런 일을 벌인 작자가 자신의 장모라니, 정말이지 낯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일이!”
정선제도 노여움에 호통을 쳤다. 그런데 그가 미처 분통을 터트리기도 전에 평왕비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 제 생각엔… 주 부인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정선제와 태자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일리가 있다고?”
갈란군주가 상을 치르자마자 누군가가 그녀를 아내로 들이겠다고 한 건 오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갈란군주에게 있어서도 모욕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왕비는 그쪽을 비호하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저도 꿈에서 오일의를 봤기 때문이옵니다. 오일의가 갈란을 주비양에게 시집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평왕비의 이 말에 태자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둘째 형수님. 이 일은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갈란은 예의염치를 아는 황실의 군주입니다.”
남편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지금 바로 재가를 하면 이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이겠는가.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떠들어대겠느냐 말이다. 황실의 군주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고 비방할 것이다.
게다가 이건 자신의 장모가 벌인 일이었고, 심지어 갈란이 시집가게 될 사람은 아내 주묘서의 큰오라비였다.
‘안 된다. 갈란과 엽연채는 원한이 있으니 주운환과 주비양은 사이가 더 나빠질 거고, 그럼 주묘서와도 사이가 뜨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태자는 이 일에 결코 찬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왕비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정선제를 쳐다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폐하, 란이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것으로 모자라 어렵게 장자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젠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정말 너무도 가엽지 않사옵니까.”
그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정선제도 마음이 아팠다. 갈란군주는 그가 가장 아끼는 손녀이니 말이다.
“맞습니다. 란이는 정말 가엾지요.”
분위기를 읽은 태자는 얼른 싸늘한 목소리로 동조하는 듯 말하며 반대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가슴이 도려낸 듯이 아플 텐데, 집안을 방문한 사람에게 그런 모욕까지 당했군요.”
그런데 평왕비는 태자의 말을 듣지 못한 양 생뚱맞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란이와 주비양은… 전에 정혼을 했던 사이입니다. 당시 고승 한 분이 제게 갈란과 주비양은 부부의 연이 있으니 갈라놓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 제 잘못입니다. 주비양이 변변치 않아 보여 제가 둘을 억지로 갈라놓았습니다.”
그녀는 오열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물론 눈물이 쓴웃음을 지은 입꼬리를 타고 흘러내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평왕비가 절절한 감정이 깃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정선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갈란군주가 시집가야 된다는 가문은 주씨 가문이었다. 정선제는 ‘주씨 가문’이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번 비적 떼 일이 떠오른 것이다. 당시 자신이 주운환을 오해했고 그 때문인지 어쩐지 주운환은 자신보다 태자와 더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태자와 주운환이 서로를 돕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긴 했지만, 그래도 천자는 아직 자신이었다.
‘갈란이 주씨 가문으로 시집가서 내 편에 서 준다면… 나쁘지 않은 그림이겠구나.’
계산을 마친 정선제가 입을 열었다.
“흠, 고승이 둘이 인연이라고 했단 말이냐? 오일의도 꿈에 나왔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겠구나.”
그러자 평왕비가 기쁜 목소리로 얼른 그를 추켜세웠다.
“역시 폐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지금 오씨 가문 사람들이 황후 마마를 뵈러 궁에 들어와 있다고 하옵니다. 이 일은 저희들끼리 개인적으로 해결하면 되는데 괜히 황후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고개를 돌려 채결에게 명했다.
“네가 가서 잘 해결하게 돕고 오너라.”
“예.”
채결은 대답을 하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태자는 낯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해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마음속은 수만 개의 밧줄로 조여지는 것처럼 괴로웠다.
‘아바마마께서 지금 무슨 뜻으로 이러시는 거지? 갈란군주가 주비양에게 재가하는 데 동의하신다고? 지금 상황에서 주씨 가문이 어수선해지면 난 절대로 이득을 볼 수 없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바마마시지! 내가 어렵게 구축한 세력을 아바마마께서 조금씩 거둬 가시겠다는 건가?’
태자는 저도 모르게 몸 옆에 붙이고 있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정선제를 바라보는 눈빛도 싸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