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7화
그러자 노왕비 등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갈란군주를 쳐다봤다. 갈란군주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다고 시인했다.
“맞네……. 진서후부에선 우리 집으로 첩자를 보내지 않았네. 부군은 어젯밤에 내게… 지금 이런 때에 진서후가 우리에게 첩자를 보낸다면 그건 틀림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 앞에서 과시하려는 것일 텐데, 첩자를 보내지 않은 건 우리에 대한 예의를 지킨 것이라고 했네.
하지만 우리는… 첩자를 받지 못했어도 이곳에 방문해 축하해야만 했네. 그게 우리 가문의 풍격이니까.”
이 말에 갈란군주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말을 마친 갈란군주는 눈물을 닦으며 저를 찾아온 마마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일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경사스럽던 연회는 순식간에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어색해졌다. 그 미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주묘서와 진씨는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채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제민이 얼른 나서서 엽연채를 위로했다.
“이 일로 너희 부부를 탓할 수는 없어. 경위영 대장직을 네 부군이 빼앗은 것도 아니잖아. 그 사람이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건데. 다리까지 잘렸는데 설마 계속해서 관리로서 일할 수 있었겠어? 불가능한 건 너무나도 명백한 일이야.
그렇다고 자리를 비워 두면 황성은 누가 보호할 건데? 도성의 안위는 누가 책임질 건데? 진서후가 맡지 않으면 비적 떼는 계속해서 활개를 칠 텐데 그럼 우리가 어떻게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겠어?”
제민의 말에 주위에 있던 손님들도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러는 게 이치에 맞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슬프고 처량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쩌지 못했다.
맹씨는 이미 풀 죽은 모습으로 이곳을 떠난 후였다.
“나리.”
이때, 멀리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엽연채가 소리 난 쪽을 바라보니 주운환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어느새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며 말했다.
“며칠 후에 전 제사를 지내러 갈 겁니다. 부인은 우선 방으로 돌아가 푹 쉬십시오.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는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주운환은 사내 손님들을 접대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손님들은 잇달아 진서후부를 떠났고 개중 많은 이들이 오씨 가문으로 조문하러 갔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오씨 가문은 정식으로 부고를 전했다.
부고의 내용은 오일의가 부상을 입은 몸으로 도성으로 돌아온 후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어제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도성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동정했다.
오씨 가문에서는 규율에 따라 시신을 담은 관을 일주일 동안 집 안에 안치했고 날마다 사람들이 조문하러 그 집을 방문했다.
주운환은 첫날에 찾아갔고 장사를 지낼 때 또 그를 찾아가 마지막 길을 배웅해 줬다.
오씨 가문 장례는 그렇게 문제없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오일의의 시신을 안장하고 나서 그 이튿날, 주운환이 막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엽연채가 그의 담비털 외투를 벗겨 주고 있는데 여양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리! 나리, 큰일 났습니다……! 자당께서 또 일을 벌이셨습니다!”
주운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뭘 어쩌셨다는 게냐?”
“자당께서 오씨 가문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셨습니다.”
여양의 대답에도 엽연채와 주운환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고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어떤 생각이 번쩍 나면서 엽연채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어제 막 장례를 마친 오씨 가문을 말하는 것이냐?”
“예.”
여양은 표정을 찡그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당께서 그곳에서 소란을 피우셨습니다.”
“너 되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곁에서 듣고 있던 청유가 기가 차서 웃음을 흘렸다.
“자당께서는 오씨 가문과 원한을 진 적이 없으셔. 아예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인데 자당께서 그곳에 가서 소란을 피우셨을 리가 없잖아? 누군가 소란을 피운다고 해도 오씨 가문에서 우리 가문을 찾아와 소란을 피우겠지. 어째서 자당께서 그리하셨다는 거야?”
“나도 잘 몰라. 아까 내가 문밖 나무 걸상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우리 가문 자당께서 오씨 가문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고 말해 줬어.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그 말이 믿기지 않아 사동 하나를 그 집으로 보내 보고 오라고 했지. 그런데 그 녀석이 보고 돌아오더니 정말로 오씨 가문 문 앞에 계신 자당을 봤다고 말하는 거야.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고 일단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더라.”
“그 말이 사실이냐?”
엽연채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설마 사람들이 우리가 오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말을 해서 어머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곳을 찾아가 소란을 피우신 걸까?”
그 말에 여양과 혜연 등도 모두 웃음을 지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그럴 리가 없었다.
“가자. 일단 가서 보자꾸나.”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외출 채비를 했고 주운환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 주묘서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분명 진씨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고,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그러니 진씨가 환심을 사겠답시고 정말로 오씨 가문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을지도 몰랐다.
오씨 가문 저택도 정륭가에 있었다. 경위영 대장은 천자를 가까이서 모시는 중신이니 정선제도 전에는 오일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천자의 관심을 받는 이 정도 급의 중신은 당연히 정륭가에 살았다.
* * *
진서후부에서 출발한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리게 했고,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많은 사람들이 오씨 가문 집 앞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구경꾼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네.”
혜연과 여양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뒤에서 따라가며 보니 진씨와 마흔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흰옷을 입은 부인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흰 꽃을 꽂고 있었고 상복을 입은 갈란군주는 바닥에 앉아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이런 비열하고 후안무치한 인간을 봤나! 이 악독한 여편네! 어떻게 이따위로 악독한 인간이 있을 수 있지!”
오 부인은 지금 말로는 도저히 진씨라는 사람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고 화가 난 나머지 그저 ‘악독하다’, ‘후안무치하다’ 등 몇 마디 말로 그녀를 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끝내 더는 욕도 나오지 않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씨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쳤다.
“썩 꺼져! 꺼지란 말이야!”
“오 부인, 제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압니까?”
진씨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난처하기에 도저히 물러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운환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뼛속까지 파고들 듯한 싸늘함이 느껴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 부인은 주운환을 보더니 두 눈이 붉어지도록 그를 노려봤다. 주운환이 그녀 아들의 직위를 빼앗아 갔으니 그녀는 그가 죽도록 미웠다.
하지만 그녀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더 유능했다면 이런일은 없었으리란 걸 말이다. 주운환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비적들에게 당해 불구가 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자신의 아들을 원망해야 했다.
하지만 머리가 아는 일과 마음이 느끼는 일이 같을 수 없었다.
오 부인은 주운환을 보며 치를 떨었다.
“셋째야, 마침 잘 왔다. 네가 시비를 가려 주거라.”
진씨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오 부인은 결국 눈물을 떨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뻔뻔한 여편네! 감히 사람을 끌어들여 소란을 피우려고 하다니. 그래, 좋다. 어디 시비를 한번 가려 보자. 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너희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을 보게 할 거다. 내 아들은 어제 막 장사를 지냈고 우리는 비통해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인데, 오늘 아침 이 여인이 우리 집을 찾아오더니 그런 말을, 그런 말을……!”
“말씀하지 마세요… 어머님…….”
여태 울기만 하던 갈란군주는 그녀를 말리나 싶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오 부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씨를 손가락질하며 뒷말을 이었다.
“이 여인이 과부가 된 내 며느리를 자기 큰아들의 평처로 들이겠다는 말을 하지 뭡니까.”
모인 사람들은 전부 기겁하며 숨을 헉 하고 들이켰고 이어 주변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엽연채와 주운환도 순간 진씨의 행동을 듣고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진씨가 이곳을 찾아와 갈란군주를 주비양의 평처로 들이겠다고 했단 말인가?
이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심지어 아직 상중이었다. 갈란군주의 남편은 어제 막 묻어 봉분에 입힌 뗏장도 아직 푸르를 텐데 말이다.
진씨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모였던 사람들은 잇달아 진씨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이제 막 남편을 여의었고 아직 상중이잖아! 정말로 그럴 뜻이 있다고 해도 몇 해 기다렸다가 말해야지.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어? 죽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나 보네. 고인을 이렇게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거야?”
“전 살고 싶지 않습니다……. 흑흑… 살고 싶지 않아요!”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갈란군주는 바닥에 널브러졌고 옆에 있던 두 여종이 그녀를 잡았다.
“부군, 왜 떠난 거예요……. 날 평생 보살펴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리 날 버려서… 이런 모욕을 당하게 하는 거예요.”
“내 수십 년을 살았지만 당신처럼 악독하고 파렴치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오 부인도 따라서 눈물을 흘리며 진씨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내 아들의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어. 이제 막 세상을 떠났는데 이렇게 찾아와 나랑 내 며느리를 괴롭히다니, 당신이 이러고도 사람이야?”
“나라고 원해서 이러는 줄 알아요?”
진씨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다 이 댁 아들의 망령 때문이잖아요! 당신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저녁에 내 꿈에 나타났는데, 갈란군주가 원래 우리 비양이와 정혼했으니 옛정이 좀 있을 거라고 했어요. 자기는 이제 떠나는데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비양이가 꼭 갈란군주를 아내로 맞이해 자기 대신 돌봐 줘야 한다면서요. 안 그러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라더군요!
난 정말 이 댁 아들 때문에 정말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을 그리 괴롭혀대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온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