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6화
진씨는 그녀의 우쭐한 말투를 듣더니 기뻐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네가 이길 것 같구나!”
“당연하죠! 상대를 봐 가면서 행동해야죠. 제가 누군 줄 알고요.”
주묘서가 혀를 쯧쯧 차자 진씨는 더욱 기가 살아 제 딸을 한껏 칭찬했다.
“그래그래, 우리 묘서는 지혜롭고 총명한 아이이지.”
“하지만 이 모든 건 그 두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주묘서의 두 눈에 순간 싸늘한 빛이 스쳤다.
“그러니 어머니, 당분간은 그 두 사람에게 좀 잘해 주셔야 해요. 태자 전하께서 저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좋다고 생각해야 절 더 믿으실 테니까요.”
“네 말이 맞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물끄러미 주묘서를 바라보더니 눈시울을 조금 붉혔다.
“우리 묘서가 정말 다 컸구나. 전에는 무작정 달려들고 보는 어린아이였는데 이젠 제 몫을 해내는 어른이 되었구나.”
주묘서도 감회가 새로웠다.
“좌절을 겪으면 그만큼 현명해지는 법이죠. 다 그것들한테 억눌리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모녀는 감동에 젖어 서로를 잠시 부둥켜안았다.
“그 빌어먹을 종자가 경위영 지휘사로 임명되었으니 연회를 베풀기로 결정되었어요. 엽연채는 지금 회임을 한 몸이라 연회를 준비할 수 없을 테니 어머니가 엽연채를 대신해 잘 준비해 주세요. 이 시기만 넘기고 제가 황후가 되면 그것들이 큰코다치는 꼴을 보게 되실 거예요!”
“암 그렇고 말고!”
주묘서의 호언장담에 진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후에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 * *
정월 그믐날, 주운환이 경위영 지휘사로 임명되자 진서후부에선 연회를 열었고 여러 손님들이 축하하러 집을 방문했다.
이날 아침, 진씨와 주 백야는 가족들을 거느리고 진서후부에 왔다.
엽연채가 자리를 권하자 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식구인데 나한테까지 예의 차릴 것 없다. 넌 아이도 가진 몸이잖니!”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다시 탑상 위에 앉혔다.
엽연채는 주묘서 모녀가 분명 큰일을 위해 한동안 치욕을 참으려 할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진씨는 주묘화와 강심설을 데리고 나가 손님들 대접에 열과 성을 다했다.
엽연채와 주묘서는 주연을 베푸는 정원에서 쉬고 있었고 제민도 이곳에 와 있었다. 제민은 엽연채와 주묘서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총명한 사람이라 엽연채가 이유 없이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는 않을 줄 알고 있었다.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엽연채에게 다가가 이리 말을 붙였다.
“영교는 안 보이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 옆을 톡톡 쳤다.
“민아, 여기 와서 앉아. 고모는 개월 수가 점점 차서 몸이 아주 무거우신가 봐. 얼마 전에 궁에서 베푼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셨거든. 오늘 고모에게 첩자를 보냈는데 요 며칠 감기에 걸려서 시어머니께서 이곳에 오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대. 참, 이번에 궁에서 베푼 연회에 넌 왜 안 왔던 거야?”
제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 옆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감기에 걸렸었어.”
“그럼 우리한테서 얼른 멀리 떨어져요!”
주묘서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 임신 중인 몸인데 환자를 가까이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자 제민은 그녀를 쏘아보며 받아쳤다.
“다 나았거든요.”
주묘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제민을 거들떠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일찍들 왔군.”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왕비가 자신의 여식을 데리고 오더니 주묘서 옆에 앉았다.
주묘서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동서지간이기는 하나 노왕비는 마흔 살이 다 된 사람이었고 그들은 아직 어린 아가씨들이었다. 그런데 노왕비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한참 젊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하는 걸 좋아했다.
주묘서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조금 우쭐거렸다. 노왕비도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기를 쓴다 싶었다.
“백모님, 주 측비.”
뒤이어 누군가의 옅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고개를 들어 보니 갈란군주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노왕비는 깜짝 놀랐다. 갈란군주는 지난번에 엽연채와 옥신각신하며 사이가 벌어졌으니 서로 상대하지 않아야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갈란군주가 뜻밖에도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가 앉은 자리로 오고 있는 것이었다.
“란이가 왔구나. 호호호.”
노왕비는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참, 저 앞에 복숭아꽃이 정말 예쁘게 폈던데 우리 함께 가서 보자꾸나.”
“안 갈래요.”
갈란군주는 배시시 웃으며 노왕비 옆에 앉더니 주묘서를 쳐다봤다.
“전 주 측비와 진서후 부인과 함께 앉아 있을래요.”
그러자 엽연채는 더욱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갈란군주는 친하지 않았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갈란군주가 이렇게 군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백모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갈란군주는 까르르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설마 지난번 일 때문에 그러세요? 지난번 일은 오해였어요. 전 이미 진서후 부인에게 사과했고 부인도 절 용서해 줬어요. 그렇지?”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러자 엽연채는 호호 하고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녀를 상대할 마음이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제민을 바라보며 이렇게 운을 뗐다.
“민아, 우리 복숭아꽃을 보러 가자.”
주묘서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얼른 따라붙으려 했다.
“나도 갈래요.”
그러자 갈란군주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그럼 나도 같이 가세.”
그러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군주께서 꽃구경할 생각이 없다고 하시 않으셨나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네!”
갈란군주는 손사래를 치며 잡아뗐다.
“내 말은 주 측비와 진서후 부인과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었네. 두 사람이 복숭아꽃을 보러 간다고 하니 나도 가고 싶네.”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갈란군주 말이야. 왜 이렇게 사람을 짜증나게 하지?’
“군주! 군주!”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회색 옷을 입은 낯선 마마嬷嬷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육 마마, 무슨 일인가?”
그녀가 허둥지둥대자 갈란군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리께서… 나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육 마마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쏟았다.
“뭐라?”
갈란군주는 아연실색했고 엽연채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리? 지금 어떤 나리를 말하는 거야?’
“오일의를 말하는 것이냐?”
노왕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노왕비의 질문을 들은 그 어멈은 눈시울을 붉히며 오열했다.
“예, 저희 나리께서……!”
“뭐라고? 오일의가 죽었다고?”
주위에 있던 손님들도 뜻밖의 부고 소식에 기함했다.
“원래 경위영 대장이었던 오일의가 죽었단 말이야?”
“어쩌다 돌아가신 건가?”
어떻게 죽었느냐고 질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맹씨였다.
오늘 장씨 가문 사람들도 당연히 이곳에 와야 했지만 엽이채와 장박원은 참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운환과 엽연채가 곧 끝장날 거라고 기대에 기대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주운환은 완벽하게 상황을 역전시켰다.
당연히 부부는 화가 나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고, 거기다 이제 주운환이 경위영 대장으로 영전했는데 그들이 무슨 낯으로 이곳에 오겠는가?
그러나 맹씨와 장굉은 어쩔 수 없이 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찬이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 말이었다.
“견뎌 내지 못하셨어요…….”
육 마마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희 나리께서는 작년에 부상을 당하고 도성으로 돌아오신 뒤로… 당시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셨어요. 다리 전체가 으스러지셨죠. 결국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의가 잘 보살펴 줘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나리께서는 다리를 자른 후 심경이 극도로 안 좋아지셨고… 특히 최근 들어… 심하게 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왜 요즘 들어 유독 심하게 앓았겠는가? 다 주운환이 정식으로 영전하고 경위영 대장직에 임명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아이고. 어찌 이렇게 됐단 말인가?”
노왕비는 인상을 썼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정의 눈빛을 갈란군주에게 보냈다.
육 마마는 계속해서 오열하며 말했다.
“한 시진 전에… 소인이 나리의 방으로 식사를 가져갔다가 이미 숨을 거두신 나리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리 떠나실 수 있단 말이냐.”
갈란군주는 넋 나간 모습이었고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오일의의 비참한 마지막을 듣고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한입으로 탄식했지만 갈란군주를 보지 않고 오히려 엽연채를 쳐다봤다.
오일의가 어째서 불구가 됐고 어째서 죽음을 맞이했는가. 이건 주운환의 영향이 컸다.
오일의는 위풍당당한 경위영 대장이었다. 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로 도성에서 목에 힘을 주고 돌아다닐 수 있던 귀인이었다. 그런데 결국 비적들에게 당해 불구가 되고 말았다.
불구가 됐으니 그런 요직은 더 이상 맡을 수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오일의는 해임되었고 주운환이 경위영을 맡게 되었다.
오일의는 잘나가던 천자의 근신近臣에서 하루아침에 버려진 불구가 되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씨 가문은 상갓집 개처럼 초라한 신세가 되었고 체면도 모두 잃게 되었다.
오씨 가문은 처량하고 비참한 신세인 데 반해 진서후부는 떠들썩하게 승진 축하를 위한 연회를 열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이때, 오일의가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분은 이미 충분히 가련한 처지인데 어째서 초대장까지 보내 연회에 참석하라고 했는가?”
맹씨는 이때다 싶어 엽연채를 쳐다보며 마음대로 지껄였다.
“오 대인은 불구가 되어 이미 충분히 안된 처지인데… 에휴, 부인도 좀 착하게 살게. 지금 부인과 부군은 충분히 위엄을 떨치고 있고 충분히 잘나가는데 오씨 가문 앞에서까지 과시할 필요가 있는가? 보게. 지금… 사람을 화병으로 죽게 만들지 않았는가?”
그러자 엽연채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 부인, 저도 충고 좀 하죠. 부인도 좀 착하게 사세요. 온종일 저희 집안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마시고요. 또 온종일 저희 집안에 불운이 닥치기를 바라지도 마시고요. 지난번에 저희 집안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부인의 며느리가 내 부군이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비아냥거리다가 결국 관아로 끌려갔죠. 잊진 않으셨겠죠?”
이 말에 손님들은 저도 모르게 ‘풉’ 하고 웃었고 맹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엽연채는 맹씨에게 반박할 기회 따윈 주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오씨 가문 앞에서 과시한 적이 없어요. 오씨 가문에 첩자를 보낸 일은 더더욱 없고요. 군주, 그렇지 않습니까?”